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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돈으로 대신할 수 없는 사랑 (고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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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대신할 수 없는 사랑 (고전 13:1-3)

사람들이 제일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지만 교회가 제일 말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돈에 대한 것입니다. 이중적인 잣대를 더 심화시킵니다. 마치 긴 젓가락과 같습니다. 예로부터 점잖은 사람일수록 손을 음식으로부터 멀리해야 된다는 지론으로 젓가락을 일부러 길게 쓰게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왜 먹습니까. 그걸 입에 넣어 먹으면서 손을 멀리해야 된다는 지론이 모순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들의 반미사상과도 비슷한 것입니다. 정치를 말할 때는 반미를 외치면서 자식들은 전부 미국에 유학을 보내는, 모순 아닙니까. 이론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돈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이유는 할 말이 별로 없기 때문이고 레퍼토리가 제한돼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흔히 말하는 돈의 레퍼토리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나눠서 쓰라는 것입니다. 

돈은 거름과 같기 때문에 밭에 뿌리면 곡식을 잘 자라게 하고 유익이 되지만 쌓아놓으면 냄새가 난다, 이런 식의 가르침. 두 번째는 상당히 상반된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하면 물질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로 심고 거두는 원리를 강조해서 우리가 하나님 사업에 심으면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다, 아무개는 십일조 생활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물질적으로 섬겼더니 복권까지 맞더라, 이런 식의…. 둘 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돈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심히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반된 가르침이 기독교인의 이중성을 심화시킨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내놓으라는 아우성입니다. 정부에게도 아우성을 칩니다. 돈 내놓으라고. 도와 달라고. 보조해 달라고. 마치 돈이 나무에서 자라기라도 하듯이 그 돈을 어디서 조달할지는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내놓으라고 정부에 손을 내밀고 그리고 재력가들에게도 아우성을 칩니다. 부를 사회에 환원하라고. 돈을 내놓으라고. 그래서 대통령마저도 사재를 사회에 환원하지 않았습니까. 

신문에 부자가 돈을 기부했다는 기사가 나오면 사람들이 환호를 지릅니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서 요즘은 부득이 돈을 기부하는 기업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들이 정말로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는 보지 않고 국민의 여론을 의식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교회와 종교단체에 대해서도 아우성을 칩니다. 돈을 내놓으라고. 좋은 일에 돈을 쓰라고. 그 좋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기준이 없고 그저 남을 위해서 쓰면 좋은 것이라고들 생각합니다. 교회 본연의 사역을 위해 돈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것 그것만이 좋은 일이라는 사상이 팽배합니다. 그러다보니까 교회가 정말로 원해서 하는 게 아니고 남의 눈을 의식해서 피할 목적으로 돈을 지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야 비난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성경말씀에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했는데 교회가 무엇을 믿음으로 하는 게 아닌 남의 눈을 의식해서 한다면 그건 잘못하는 것이고 믿음에 담대하지 못한 것이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초대예루살렘 교회가 재물을 나눈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사회구제를 위한 것이 아니고 성도들 중에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교회 내부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교회가 바깥의 문제까지 해결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 됩니다. 교회가 사회봉사단체는 아니라고 저는 봅니다. 교회가 사회봉사단체를 세울 수는 있습니다. 

대학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봉사단체를 세울 수는 있지만 교회 자체가 사회단체는 아니라고 봅니다. 교회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모든 에너지와 모든 힘과 창의력과 지혜를 기울여야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이 사랑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논리에 파묻히다 보면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진실입니다. 만일 부모가 자녀와 시간을 보내주는 대신 돈으로 때운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빠가 골프를 치러 가면서 자녀에게 ‘아빠가 바쁘기 때문에 오늘 너와 시간을 보낼 수 없으니 이 돈을 용돈으로 받아 쓰거라.’ 그것이 그 자녀에게 상처가 되지 않겠습니까. 돈으로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대신에 돈으로 때우려고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보, 내가 잘 못해 주는 대신에 돈을 줄 테니 받으시오.’ 그것이 정상적인 부부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당연히 헌금도 해야 되지만 헌금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하나님에 대한 섬김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대신 헌금으로 때우겠다,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도는 헌금은 헌금대로 해야 되지만 자기 시간으로, 자기 정성으로, 자신의 수고함으로 주님을 섬기고 성도를 섬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돈으로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에 대한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으로 때울 수 없습니다. 만약에 젊은이가 병역의 의무를 하는 대신에 세금으로 때우려고 한다면 그럴 수 없는 것이지요. 영국의 황태자들 결혼하는 것을 볼 때 한 가지 유의할 것은 그들이 군복을 입고 결혼식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입을 옷이 없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들이 현역 군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상류층이라고 나라를 지키는 의무를 피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나라는 지킨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왕족일수록, 귀족일수록 자기가 현역군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군복을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고 하셨는데 당연한 말씀이지요. 

말로만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사랑한다면 당연히 주머니를 열어야 되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돈이 사랑을 대신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바로 3절에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더라고 사랑이 부재한 가운데 구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 사랑이 부재한 가운데 헌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구제=사랑, 헌신=사랑 이 공식만을 주장하는데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붕위에 바이올린이라는 영화가 있지요. 뮤지컬입니다. 딸 넷을 둔 유태인 농부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의 위상, 아버지의 역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전통을 고수하려는 남자의 고민을 다룬 영화입니다. 딸들이 자라서 하나씩 하나씩 시집을 가게 되면서 하루는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여보, 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아내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질문입니다. ‘내가 당신과 30년을 같이 살고 딸 넷을 낳아주고 매일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는데 나에게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요?’ 남편 대답하기를 ‘당신이 나를 위해서 수고한 것은 잘 아는데 그래도 나를 사랑하오?’ 아내가 뭐라고 대답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대답하지 않습니다. 

이건 말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사랑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수고는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사랑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몇 십 년을 같이 살 수도 있고 매일같이 밥을 해줄 수도 있고 또 가족을 위해서 돈을 벌고 애쓸 수 있는데 그게 반드시 사랑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굳이 남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오늘 돈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돈의 장점 중의 하나는 많은 것을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돈으로 노동을 대신할 수 있고, 돈으로 시간을 아낄 수가 있고, 돈으로 땀을 줄일 수가 있고, 돈으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국민이 직접 나서서 만리장성도 짓고 피라미드도 짓고 국민이 직접 나서서 노동을 해야 했는데 화폐경제가 발달한 이후에는 돈으로 노동을 대신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내가 돈을 내면 대신 누가 일을 해줄 수 있는 아주 편리한 시대가 왔습니다. 그러나 사랑마저도 돈이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황금만능주의의 잘못된 생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 그렇지 않습니다. 남편이 퇴근해서 집에 왔을 때 남편의 식사를 아내가 직접 챙기는 것은 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고 해줄 사람이 있더라도 아내이기 때문에 남편의 식사를 아내가 직접 챙기는 것이고 이건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대신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잠자리에 들 때 자식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기도해주는 것 이건 부모의 특권입니다.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고 대신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웃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돈을 보내면 끝나는 게 아니냐. 돈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아니에요. 사랑이 부재한 상황에서 돈은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직접 찾아가야 됩니다. 만나봐야 됩니다. 아픔을 나눠야 됩니다. 손이라도 잡아줘야 됩니다. 같이 밥이라도 먹어야 됩니다. 돈이 사랑의 부재를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종교인의 위선의 위험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방언 · 천사의 말 · 예언하는 능력 · 모든 비밀과 지식 · 산을 옮길만한 믿음 · 구제 · 몸을 불사르도록 내어주는 이 모든 것이 사랑의 부재를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없는 은사 · 사랑이 없는 능력 · 사랑이 없는 예언 · 사랑이 없는 지식 · 사랑이 없는 구제 · 사랑이 없는 선행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이 없는 것을 선행으로, 좋은 말로, 신앙적인 행위로 감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고 사람도 사실은 속지 않습니다. 큰 집회를 인도하러 오는 목사님들 중에는 집회하는 중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성도들 기도도 해주고 하다가 집회가 끝나면 뒷문으로 퇴장할 것을 요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인들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부담이 된다고. 반대로 집회가 끝난 후에 교인들이 다 갈 때까지 기도 받는 사람들을 일일이 기도해 주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사랑이 있는 것입니까. 병자를 고치고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행하더라도 애정 없이 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은사가 사랑을 대신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경건의 모양이 사랑의 부재를 감출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구절은 내가 설사 방언을 하지 못하고, 예언하는 능력도 없고, 비밀과 지식을 알지 못하고, 산을 움직일만한 믿음도 없고,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구제도 하지도 못하고, 내 몸을 불사르도록 내어줄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내게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이 이런 모든 것보다도 더 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앙의 척도가 어디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잘 믿는 것이냐. 어떻게 하는 것이 선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냐. 잘 믿는 신앙의 기준 이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보고 저 사람은 훌륭한 기독교인이다, 저 사람은 믿음이 좋다, 이것을 무엇을 가지고 분별할 것입니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떠들썩한 것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저 사람은 열심도 있고, 저 사람은 능력이 있고, 저 사람은 뜨겁고, 이런 식으로.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우리의 모든 말과 우리의 모든 행위와 우리의 모든 쇼와 우리의 모든 겉치레를 꿰뚫어서 보실 때 하나님의 기준은 한가지입니다.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사랑으로 하느냐! 믿음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귀중하게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떠들썩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은 조용합니다. 겸손합니다. 사랑은 쇼가 아니에요.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고 그것은 감출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잔소리가 자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훈계가 학생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사랑할 때 훈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록 엄하더라도 그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믿는 마음으로 주께 가오니 나를 영접하소서’ 주님의 말씀은 어려워요. 엄해요. 하나님의 말씀은 어려워요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위로가 되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사랑은 쇼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은 느껴집니다. 진실이 전달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떠들썩한 은사나 능력이나 행사가 없을지라도 진실한 사랑이 있을 때 거기에는 의외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사람들에게도 소중하고 하나님에게도 소중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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