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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침례 (마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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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침례 (마 3:13-17)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예수님은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막13:31, 눅21:33)고 말씀하였다. 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내 마음대로 가감하면 절대 안 된다(계22:18-19, 신4:2, 12:32, 잠30:6)고 하였다. 

그런데 보통 성경에는 ‘세례’로 쓰여 있는데, 왜 ‘침례’라고 읽는가? 이는 가감하는 일은 아닌가? 이런 의문이 생길까봐, ‘침례’라고 읽는 이유를 말씀드리겠다. 왜 침례로 읽느냐 하면, 성경의 원문이 침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번역된 성경이다. 
원래 성경은,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쓰였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기 나라말로 번역된 자국어 성경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성경을 접할 수 없던 중세 암흑기에 비하면, 자국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어서, 복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번역 성경은, 원문과 차이가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지만, 좀 더 정확하고, 확실하게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많은 부분들이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번역되고 있다. 그래서 세례라고 나와도, 침례가 옳은 말이다. 원문이 일점일획도 변함없는 말씀이지, 번역본은 아니다. 

1. 세례(洗禮)와 침례(浸禮)의 차이점 

(1) 형식적으로, 언어적으로 살펴보자. 
세례는 머리에 물을 뿌린다. 침례는 몸이 물에 완전히 잠긴다. 

물을 뿌림을 나타내는 명사는 란티스모스(‘ραντισμός), 동사는 란티조(‘ραντίζω)다(히9:13; 19, 21-22). 물에 완전히 잠김을 나타내는 말은 밮티스마(βάπτισμα) 동사는 밮티조(βαπτίζω)다(마3:11, 13 28:19). 밮티조는 밮토(βάπτω)에서 왔는데, ‘물에 완전히 잠그다, 옷감을 염색하기 위해 잠근다.’는 뜻이다. 
한글성경에 세례라고 표기한 곳은, 원문에는 ‘란티스모스’가 아니고, 모두 다 ‘밮티스마’다. 따라서 원문을 바르게 번역하게 되면, 세례가 아니라 침례다. 일본어 성경에는, 헬라어 ‘밮트스마’가 그대로 사용되어 있고, 영어성경도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밮티즘(baptism)이라고 했다. 

(2) 예수님은 어떤 형식으로 받으셨고, 어떤 형식으로 주라고 하셨나?(13-14).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라고 했다. 물속에 들어갔기에, 물속에서 올라오셨다. 올라오셨다는 말은, 솟아나다는 말이다. 따라서 일반 성경에는 세례로 되어있지만, 성경 원문은 밥티조(βαπτίζω), 침례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례(ῥαντίζω)를 받지 않고 침례(βαπτίζω)를 받으셨다(마3:16). 마28:19을 보면,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침례를 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지 않고, 분명히 침례를 받으셨다. 따라서 침례를 받음이,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이다. 

(3) 형식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침례의식을 행한다. 
이 의식을 א󰕰󰙓󰗬(미크베)라고 한다. 미크베는 ה󰕯󰙌(카바)라는 말에서 왔다. ‘함께 묶는다’, ‘…의 도움을 기대하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는 말이다. 명사(티크바)가 되면 ‘하나가 됨, 소망’이 된다. 

예수님과 함께 묶여, 예수님의 도움을 받기를 기대하며, 예수님을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물이 안 닫는 곳이 없도록, 손가락도 다 벌리고, 겨드랑이도 완전히 붙이지 않고, 완전히 들어갔다가 나온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 성도들도, 완전히 물속에 잠기는 침례를 받았다. 

예수님은 침례를 소중히 여기셨다. 마지막 유언인 지상 명령에서도, 침례를 주라고 하셨다. 또한 (행1:21-22) 사도들은 침례를 강조하여, 초대교회에 가룟 유다 대신, 사도를 뽑는 조건에, 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자이어야 했다. 

(행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하며, 회심한 자에게 침례 받으라고 했다. (행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2. 세례와 침례는 내용적으로 일치하는가? 

아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일치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세례(洗禮)의 ‘洗’자는 씻을 세자다. ‘죄에서 정결케 되었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물을 뿌린다. 

그러나 침례의 의미는, 하나 되었다(연합)는 뜻이다. 2가지 형식과 의미를, 예수님께서 대입해보자.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죄에서 돌아서겠다는 의미로 받는다. 그렇기에 죄인에게 필요한 의식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면, 예수님도 죄가 있단 말인가? 
예수님이 죄가 있다면 이단이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요한에게 침례 받으려고 하실 때,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할 수 없다고 하자, 예수님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셨다. 

그래서 요한이 허락하고,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침례를 받아야만 했나?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주님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이는 침례를 통해서만, 잘 설명할 수 있다. 예수님은 죄로 물든 우리와 하나가 되어, 죄를 짊어진 사건이 침례에 나타났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그 이튿날 나오자, 요한은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선포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다. 구약에서는 우리의 죄를 짊어진 속죄물을, 어린양이라고 했다. 어린양’은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제물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어린양에게, 자기 죄를 짊어지게 하고, 그 양을 죽였다. 요한은 바로 그 제물이, 예수님이라고 선포하였다. 이렇게 제물이 되기 위해,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은 원래 죄가 없지만, 침례를 받음으로 인간과 하나가 되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공식적 제물로 죽으셨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음으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의 사역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예수님은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하셨다.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예수님은 침례를 받았다. 
우리가 죄를 용서함을 받음은, 그냥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속죄양 되신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이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실현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예수님과 연합된 우리는, 죄를 모두 청산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주님과 연합된 우리는, 같이 부활하게 되었다. (롬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하였다. 

침례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물속에 들어가 잠길 때,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선언한다. 물속에서 다시 올라올 때, 예수님과 함께 연합되었기에, 부활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니 침례가 얼마나 놀라운 복음인가? 따라서 나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신앙으로 고백해야 한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이 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청산하셨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사람들 앞에서,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침례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했다(행2:38).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다. 이제 내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음을 선포해야 한다. 침례를 통하여,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 값을, 모두 치르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과 마귀에게 선포하라. 침례의식은, 엄격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이며 부활의식이다. 내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함께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고백이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함께 부활했다는 고백이다. 옛 사람은 죽고, 주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을 살기 바란다. 

3. 침례가 왜 세례로 바꿨는가? 

성경은 침례를 가르치고, 예수님도 침례를 받으셨다. 초대교회도 침례만을 베풀었다. 2C에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자, 진리가 흐려지기 시작하여, 침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교리가 나타났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의 생각은, 이런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막1:4) “침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했다.”고 했다. 또 (막16: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했다. 

그래서 침례를 받지 못하면,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요3:5中)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했는데, 물을 침례로 생각했다. 그래서 콘스탄틴황제는, 일생동안 지은 모든 죄를, 한 번에 완전히 씻으려고, 죽기직전까지 침례를 연기했다. 
이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해서, 침례가 구원의 필수조건이 되자, 구원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이나 노인들이나 병자들에게는, 침례를 베풀기가 곤란했다. 물속에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2세기에 쓰인 디다케(12 사도들의 교훈서)를 보면, 침례를 실시할 수 없는 경우에는 물을 부으라고 함으로, 비성경적인 침례를 가르쳤다. 3C의 씨프리안은, 죄를 씻는 것은 물의 양의 문제가 아니니, 세례도 좋다고 하며 세례를 허용했다. 그러나 8세기까지의 교회들은, 주로 침례를 실시했다. 
8세기 중반에 로마교회의 법왕 스데반 3세가 영을 내려, 침례 대신 세례를 줘도 좋다고, 정식으로 공포했다. 1311년 라벤나 회의에 모인 로마교회 대표들은 세례만을 실시하고, 침례를 실시하면 사형하기로 결의하여 많은 성도들을 핍박했다. 그 후부터는 세례만 실시되었다. 

16C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성경의 교훈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인간적인 이유로 세례를 고집했다. 그들을 도와주는 영주들이, 세례 받았기 때문이다. 칼빈도 성경에는 침례로 되어있다고 하면서, 현실적인 이유로 세례를 계속했다. 아직도 세례를 실시하는 교회들이 많다. 
성경적인 침례에서 벗어나자, 침례교도들은 회개했다는 표시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침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은 틀렸다고 하면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싸웠다. 성경이 말하는 침례는 ‘예수님을 믿고 자기 죄를 회개한 자는, 그 신앙을 침례로 표현하라는 말이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침례를 받았다(막1:4-5). 따라서 침례는, 전에는 내가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만인에게 공포하는 선언이다. 쉽게 생각하면 침례식은 결혼식과 같다고 설명할 수 있다. 
요즘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많지만,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 있다. 물론, 결혼식을 꼭 해야만 부부는 아니다. 초라하게 해도 결혼식을 치렀어도, 호적에 올라가면, 결혼은 성립된다. 

그러나 결혼식을 하지 않아서, 결혼사진이 없다면, 의심받을 수 있다. 따라서 진심으로 사랑하면, 결혼으로 자기 사람임을 인정하듯이, 예수님을 나의 신랑으로 선포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죄를 분명히 회개하는 신앙고백이 없다면, 침례를 받을 수 없다. 
갓 태어난 아이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없기에, 침례교에는 유아세례를 주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다. 유아세례를 인정한다는 말은, 세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침례교인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자, 가톨릭교도들과 일부 개신교도들에게, 자신들의 받은 유아세례를 무시한다고, 무참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성경에는 유아 세례는 없 
다. 만일 침례가 구원과 연결된다면, 더욱 침례를 받아야 한다. 세례와 침례는 다르기 때문이다. 
(16-17)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침례 받으실 때, (1) 구속을 위한 길이 열렸기에, 하늘이 열리고, (2)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 (3)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과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연합하여 살겠다고, 침례로 신앙고백을 하고 선포할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음성이 있다. 예수님을 진정 믿는다면, 사랑은 고백되어야 한다. 그리고 고백이 진실이라면, 반드시 침례로 표현되어야 한다. 

침례는 신비롭다. 죽고 사는 경험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병든 자들이 치료받는 경우가 많다. 추운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들어가서 침례식을 행해도, 감기도 들지 않는다. 시베리아의 불꽃이라는 책을 읽어 보라. 많은 사람이 침례를 통해, 변화되었다. 
알코올 중독에 걸린 분이, 침례를 받음으로,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 지금은 목사가 되었다. 또한 몸속에 많은 암이 퍼졌는데, 침례를 통해, 하나님이 깨끗이 치료해 주셨다는 간증도, 우리는 들었다. 침례는 이처럼 주님과 연합하는 신비다. 

결론이다. 요즘 옛날에, 결혼식을 잘 못해서, 결혼도 앙코르 결혼식을 행하는 분이, 얼마나 많은가! 구원의 확신도 없이 세례를 행했거나, 침례를 받았다면, 다시 행해 보라.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주님과 함께 연합되었다는 감격을 느끼시는, 귀한 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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