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눅 9:57-62)

첨부 1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눅 9:57-62)


주중에 졸업을 앞둔 베델성서반이 여행을 갔습니다. 멀지 않은 놀이공원으로 갔습니다만 정말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혼자라면 할 수 없을 일들을 여럿이 가니까 하는 것을 보고 사람은 역시 홀로 설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50이 넘은 권사님들이 혼자 언제 놀이공원 가서 놀이기구를 타보겠습니까? 젊은이들이 부추기는 바람에 놀이기구 탔다가 비록 멀리를 하고, 토하고 해도 이야기 거리가 참 많아지더라고요. 시작부터 돌아오는 시간까지 웃음과 미소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 여간 즐거운 날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락을 준비해서 갔는데 먹을 것을 얼마나 넉넉하게 싸왔는지 서로서로 챙겨 먹이며 아름다운 분위기속에서도 다 먹지도 못하고 가지고 왔습니다. 좋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사람이란 본능적으로 사랑을 주고 싶어 하고 또한 자신도 사랑 받고 싶어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움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기에 정이라는 것이 보태져서 몇 명만 만나면 아주 즐거운 분위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기쁨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사람이란 이렇게 내가 사랑을 받고 싶은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려고 하지 하세요. 나도 상대방도 정신적, 육체적 고독 속에 빠지게 됩니다. 고독이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었습니까? 이 세상에서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 고통스러워해야 하고, 나 혼자만 슬픈 가슴을 억눌러야 하고, 나만 왕따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가족들도, 직장의 동료들도, 교회의 성도들도 모두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생각되어 밀려오는 고독을 견디지 못해 절망했던 경험이 없습니까? 얼마나 견디기 힘든 시간입니까? 

인간은 누군가를 만나야하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의 욕구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지고 싶은 욕망도, 누리고 싶은 욕망도, 심지어는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까지도 결코 혼자이지 않기에  꿈틀거리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관계 속에서 아름다워지는 것이고, 관계 속에서 행복해 질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살아야 남을 무시하거나 따돌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 된 자들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다운 가치관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삶의 목표도 제자다워야 합니다. 누구나 욕구는 가질 수 있습니다만 그 욕구충족의 방식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이지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 하고 나서는 순간 많은 손해가 따릅니다. 어떤 직장에서는 떨려 나기도합니다. 심하게는 이혼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유산을 못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손해를 보면서 예수를 믿어야 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닌 줄 알고 택한 것이 아닙니까?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제자 되었다는 말이고 거기에 따르는 모든 불이익을 다 받아들인다는 각오도 함께 한 것입니다. 즉 순교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택한 이상은 목숨을 걸고라도 그 믿음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 됨의 의미입니다. 

마11:29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멍에를 메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멍에를 같이 멘다는 것은 같은 목적을 향하여 한 방향, 한 방법, 한 마음으로 가자는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에 멍에를 메고 당장 따라나설 수 있겠습니까? 아니 오늘 당장 예수님께서 동행하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제자로서의 마땅한 응답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을 따르는데 실패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모습은 결코 낯선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도 충분히 범할 수 있는 실패의 원인들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주변에서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고백을 합니다마는 실제적인 삶의 모습에 있어서는 실패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왜 실패합니까? 

먼저는 지나치게 즉흥적이어서 실패합니다. 깊은 생각이 없이 일시적인 감정과 충동적으로 무슨 결정을 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따르는데도 그렇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인기가 높은 것과 그 능력이 대단한 것과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것을 보고 무작정 따라 나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57절에 보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하고 일시적 감정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8:19절에 의하면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일시적 감정표현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58절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우나 새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짐승으로 둘 다 일정한 자기의 집을 마련해 두고 활동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짐승이라도 자기의 집이 다 있는데 주님은 지금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고 일시적인 기분으로 따르고 기분 나쁘면 안 따르겠다는 식의 그런 시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이런 말을 들을 만큼 이 서기관은 제자가 되는 일을 안이 하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너무 막 생각해요. 우리의 요구와 주님의 기대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요구는 언제나 충동적이고 일시적인 것들뿐입니다. 내가 한 만큼 무언가 얻을 계산, 수고에 대한 보상심리로 부자 될 계산, 속사람은 썩어 문드러져도 육신의 병만은 고칠 계산, 많은 사람 가운데 혼자서 영광만 누릴 계산, 이것이 오늘 예수를 따른다는 우리들의 요구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순간순간 일시적이고 충동적으로 솟아나는 감정으로 신앙생활 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실패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신앙적인 것과 세상 사이에서 늘 갈등하며 핑계거리를 찾는 사람이 주님을 제대로 따르는데 실패하는 사람입니다. 방금 예수님은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말에 대해 거절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번에는 어떤 사람을 직접 불렀습니다. 얼떨결에 이 사람이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래놓고 나니까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곧바로 한 가지의 자기 조건을 제시합니다. 59절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라고 합니다. 부모님의 장례식을 엄숙히 수행하는 것은 자식 된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시간을 벌겠다는 심산입니다. 

교회 일을 하는 것도 보면 큰소리는 처 놓고 앞장서지는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은 청산유수처럼 잘합니다. 신앙 생활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믿음에 입각하여 그럴싸한 이론을 늘어놓습니다만 정작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때마다 핑계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이론이 이기게 되면 그때부터는 노골적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신앙을 이론화해서 합리화 해버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사람이 참 궁금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을 직접 불러서 물어보잖아요. 

지금도 이론은 박사인데 실행은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확실한 결단 없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언제나 갈등입니다. 교회냐? 세상이냐? 주일성수냐? 장사냐? 예배냐? 취미생활이냐? 십일조냐? 생활비냐? 날마다 주일마다 갈등하고 또 갈등하고 산다면 얼마나 피곤합니까? 예수님은 생각 따로, 몸 따로 부분적으로 따라가야 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전부가 따라가야 하고, 우리의 일평생이 따라가야 할 분입니다. 도대체 그 갈등과 핑계가 언제 끝날 것입니까? 이 시대에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더 이상 갈등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흔들려서 자신의 의지가 약해지는 사람이 주님을 따르는데 실패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주님을 따르겠노라하면서 가족을 작별하는 일을 꼭해야 되겠다고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실 이것마저 말릴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참 박절하다 싶을 정돕니다. 

62절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윤리가 없고, 도덕이 없는 분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의지대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늘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 남이 뭐라 한마디 하면 혹해서 그만 교회도 버리고, 의리도 버리고, 은혜도 저버리는 사람, 이런 사람은 주님께서 합당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에 내 신앙이 흔들려서는 말이 안 되는 얘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의지적으로 나아가 최선을 다하여 기도하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감사, 봉사, 희생......원래 가졌던 내 신앙의 철칙을 잘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곁눈질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어도 신앙생활에 대해서만큼은 해아래 새 것은 없으니 새로운 이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쟁기를 잡고 왜 돌아보는 것입니까? 내가 제대로 쟁기질을 했나 싶어서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내 공적(功績)을 확인해보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내가 돌아보는 그 순간에도 소는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앞을 보고 나가는 것입니다. 뒤도, 옆도 돌아보지 말고 앞을 보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아무 수고 없이 이미 만들어진 마음의 평화, 사랑, 지혜, 행복, 자유를 통째로 살려고 합니다. 마치 슈퍼마켓에서 사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신앙을 그렇게 사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적당히 필요에 따라 따르는 흉내만 내어서도 안 되고, 또 쉽게 흔들려서도 안 됩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