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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믿는다는 것(Ⅰ)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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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다는 것(Ⅰ) (눅 15:11-24)
   

최근 개봉한 영화 중 <내 아내의 모든 것>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결혼 생활에서 오는 권태기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소재들을 사용하여 코믹한 상황과 대사로 구성한 것이 재미를 줍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예수 믿는다는 것’입니다. 영화제목에서 영감을 얻어 패러디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새생명전도축제의 연장선상에서 오래전에 잡아두었던 제목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등장합니다. 잃은 양의 비유(4-7절), 드라크마의 비유(8-10절), 그리고 탕자의 비유입니다(11-32절). 이 세 비유는 내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한 주제를 담아내고 있기에 연속적인 스토리가 전개되는 연극의 제1,2,3막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세 비유를 함께 봐야 합니다. 

첫째, 비유에 등장하는 숫자입니다. 제1막에서는 99:1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와 한 마리가 동일한 가치로 언급됩니다. 아니, ‘들에 두고’, 즉 한 마리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듯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제2막에서는 9:1입니다. 주인은 잃은 한 드라크마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제3막에서는 1:1입니다. 비유의 흐름을 추적해 보면 아들이 넷 쯤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3:1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1:1입니다. 왜 그럴까요? 

둘째, 이들을 대하는 주인의 태도입니다. 제1막과 제2막에서는 주인이 적극적으로 찾아 나섭니다(눅 15:4,8). 그런데 제3막에 와서는 어떠합니까? 첫째 번, 둘째 번에 언급된 비유의 흐름으로 볼 때 아버지는 당연히 탕자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탕자를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문밖에 서서 탕자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1막과 제2막에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예수 믿기 전의 내 모습입니다. 예수 믿기 전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니,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엡 2:1,2,5,6). 그러므로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찾아 나서서,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왔으며, 비를 들고 은전(銀錢)을 찾도록 찾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가치가 99:1이든, 9:1이든 상관하지 않고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1막, 제2막에서 다시 살아난 자들이 제3막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 1:1입니다. 여기 두 사람은 예수 믿고 이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뜻합니다. 어느 날 둘째가 아버지에게 자신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더러 빨리 죽으라는 뜻입니다. 가관(可觀)인 것은 유산 분할뿐만 아니라 그 유산을 처분할 권리까지 요구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먼 지방으로 가서 허랑방탕하다가 재산을 다 날려버렸습니다. 완전히 알거지가 되었을 때, 돼지가 먹은 찌꺼기로도 배울 채울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버지와 아버지 집을 떠올립니다(눅 15:17). 그는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서 고백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아버지여!”, 입술을 열어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나 이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둘째, 자신의 죄를 아버지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눅 15:18,21). 아버지 앞에 선 사람은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와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사 6:5, 눅 5:8). 자신을 의인으로 여겼던 욥(욥 32:1-2)이 하나님을 만나자 어떻게 했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6). 이렇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탕자는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철저히 고백합니다. 많은 품꾼들 중 하나에 불과한 자라고 합니다. 당시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이 내용을 좀 더 실감 있게, 풍성하게 묘사한 작품이 있습니다. 일종의 위서(僞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책에서 형은 아주 성실한 사람으로, 아우는 망나니로 등장합니다. 이 두 형제가 여행 중에 해적에게 붙잡힙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 몸값을 만들어 달려갔습니다. 해적은 몸값을 보더니 그 중 한 명만 데려가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당연히 자기를 선택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지금까지 나쁜 짓 한 것을 뉘우치며 정신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그 아들을 본 아버지는 탕자를 받아들입니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형 대신 동생을 선택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태도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다 토설(吐說)해내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무익한 종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찬양을 통해 고백합니다. 찬양 속에는 ‘아버지,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무익한 자식입니다.’라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고백합니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 아버지가 소개되어 있고, 추악한 죄를 고백하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이 어우러진 것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려야 할 고백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하나님께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아버지는 탕자에게 왜 왔느냐, 지금까지 무엇을 했느냐 한 마디도 묻지 않고, 살진 송아지 잡고, 옷 입히고, 가락지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면서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이와 같은 예배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집에 나아와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무익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더 놀라운 사람으로 새롭게 세워주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이 무엇인지를 맛보는 은혜의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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