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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께서 집에 계시면 (막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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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집에 계시면 (막 2:1-11)

예수님은 갈릴리에 다니시며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시니 예수님이 집에 계신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따라 사람들이 문 앞에라도 용신(容身, 겨우 몸을 붙임)할 수 없도록 모였습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도를 말씀하시고 계실 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께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 소자야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Ⅰ. 예수님이 계신 집에 변화의 역사가 나타 났습니다. 

1) 소문이 나게 되었습니다.

본문 2장 1절에 『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고 했습니다. 

여기 『 집 』은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추정됩니다(막 1:29). 예수는 소문을 타고 퍼진다는 사실을 마가가 여러 곳에서 언급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2)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본문 2장 2절에 『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 들어왔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때문에 용신도 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Ⅱ. 예수님이 계신 집에 도(말씀)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본문 2장 2절에 『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 도 』(道)는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을 말합니다. 

1) 말씀의 역사가 중풍병자를 메워 오게 했습니다. 

본문 2장 3절에 『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라고 했습니다.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 가까이 있었든지 멀리 있었든지 관계없이 도를 듣게 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예수님이 친히 주도하시는 집회이기 때문입니다. 

2) 말씀의 역사가 절대성취의 가능성을 가지게 했습니다. 

본문 2장 4절에 『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주택구조는 땅에서 외벽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단층 슬라브 지붕의 집이였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쉽게 뜯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적극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들의 행동이 다소 무모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에서 해방을 시켜야겠다는 저들의 생각은 환자나 성한 사람이나 한결같은 소망이었습니다. 


Ⅲ. 예수님이 계신 집에 믿음의 역사가 나타 났습니다. 

본문 2장 5절에 『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곧 믿음은 말씀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듣지 않고는 절대로 믿음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종교 혹은 타율주의 종교라고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도(복음)를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듣는 것과 함께 이들에게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 『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고 했습니다. 

저들은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을 얻었습니다. 그 믿음이 온전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7절에 『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했습니다. 예수께서 전하시는 도(말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1) 성경에는 여러 가지 믿음의 형태가 있습니다. 

(1) 큰 믿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8절에 『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갔을 때 가나안 이방여인은 예수 앞에 절하면서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녀들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간청했을 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했습니다. 

(2) 적은 믿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31절에 『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갔을 때는 바다에 빠지지 아니했으나 바람과 성난 파도를 보는 순간에 그는 바다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떨고 있는 베드로에게 
『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라고 했습니다. 

(3) 간절하고 단순한 믿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20-22절에 『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고 했습니다. 

(4)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5)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라고 했습니다. 

(6)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1절에 『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고 했습니다. 

(7) 부활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에 『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8) 더 좋은 부활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5-38절에 『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9)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9-40절에 『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2) 예수님이 보신 믿음입니다. 

(1) 합심합력의 믿음입니다. 
본문 2장 5절에 『 저희 믿음을 보시고 』라고 했습니다. 
중풍병자와 메고 오는 네 사람, 환자까지 다섯 사람의 간절하고 동일한 믿음을 말합니다. 

(2) 예수께로만 오는 믿음입니다. 
본문 2장 3절에 『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라고 했습니다.

(3) 절대 가능성을 가진 적극적인 최상의 믿음입니다. 
본문 2장 4절에 『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라고 했습니다. 

3) 오직 예수님의 구원을 믿는 믿음입니다. 

(1) 영혼의 구원입니다. 
본문 2장 5절에 『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A. 예수님은 죄를 사해주시는 메시야입니다. 
예수님은 고쳐주시는 분이 아니라 처음보다 한 단계 더 나은 창조를 행하시는 메시야이십니다. 

B.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놓치지 아니하시는 메시야입니다. 
요한복음 5장 22절에 『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신다고 했습니다(욥 14:17). 불의를 묶어서 저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호 13:12). 죄를 금강석 위에 철필로 새길 것이라고 했습니다(렘 17: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놓치지 아니하시고 그에 따르는 일체의 보복하는 벌을 용서해 주신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4장 7-8절에 『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축복이 아니고 회개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지을 죄까지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 구원 얻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인하여 보복하지 않으시고 교정과 훈계를 하십니다. 

C. 예수님은 육신의 구원보다 영혼구원을 우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병도 죄 때문에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육신의 구원입니다. 
본문 2장 11-12절에 『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내린 사죄의 선포를 보고 어떤 서기관들이 마음에 의논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사죄 선언을 참람(僭濫), 분수에 지나치다)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그 누구도 사죄를 선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도 저들은 참람하다고 했습니다(요 10:36). 
예수님은 이렇게 의논하는 이들의 중심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2장 9-10절에 『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중풍병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지 못하는 자들 역시 중풍병자입니다. 예수 신앙의 절대성에 자리 잡지 못하는 자들은 현대판 중풍병자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는 그 수가 적습니다. 

십일조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그 수가 적습니다. 
충성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충성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자들은 그 수가 적습니다. 

주를 시인하는 자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대세 앞에서 주를 시인하는 자들은 적습니다

.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거하는 거룩한 성전, 곧 집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계시면 말씀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역사는 사죄에 대한 확신의 역사입니다. 그 다음은 영생과 영벌에 대한 미래적 가치에 민감해집니다. 

그래서 타인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쯤 되면 믿지 않는 영혼에 대해 불쌍해지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 마음의 현장화가 불신자들이나 잘못 믿는 자들을 총동원해서 들쳐 메고 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살아야겠다는 의지는 환자나 성한 사람이나 일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3절에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 했습니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올 때 저들의 혼과 혼이 통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도를 듣는 가운데 예수께 만이 소망이 있는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자신들의 온 몸을 동원해서 메고 오는 것입니다. 메고 오는데서 그치지 아니했습니다. 

사람들 때문에 길이 막히니 지붕으로 올라가서 그 곳을 뜯고 중풍병자의 상을 예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만이 고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이 더 나은 육체가 있는 줄 이들은 이미 믿고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로 오는 용사들은 강물을 건너서 대적을 물리치고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진정한 통치자를 찾아왔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런 일을 할 수 없고 말씀을 듣지 않고는 믿음이 생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자들이라면 믿지 않는 자들을 데리고 예수께로 나오는 데 우리의 온 몸과 온 마음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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