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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6.25] 통일의 주체-성령 (행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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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주체-성령 (행 2:1-13) 

금년은 한국전쟁 발발 4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결코 잊혀 질 수 없는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물질(경제)에 가리워 “잊혀진 전쟁”(forgot war)이 되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야드베쉼이란 유대인의 민족박물관이 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시 독일의 히틀러 정권이 서울 인구의 절반이 넘는 유대인 6백만 명의 귀한 생명을 처참하게 학살한 전시관이었는데, 유대인은 그 전시관에 “과거를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 말라.”는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미국에서는 휴전 42주년(1995년 7월 27일)을 기념하여 위싱톤에 <한국전쟁 기념 전시관>을 10여 년 전부터 준비하여 설립하고 있으며, 한국전쟁을 영원히 잊지않기 위해서 금년 7월 27일을 기하여 뉴저지주 287번 도로를 <한국전쟁 기념 도로>로 개명하기로 의회에서 결정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선 민족 분단을 초래한 전범(戰犯) 김일성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떻했습니까?

김일성과 호네커(구동독 공산당 서기장), 이 둘은 다 분단 체제하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최고권력을 누린 인물들이지만 말년의 인생은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에리히 호네커는 1971년 구동독 권력구조의 정상에 올라섰지만 1994년 5월 29일 81세의 나이로 남미 칠레에서 암으로 고생하던 중 외로이 죽었습니다. 자신의 유해가 고국땅에 묻히기를 원했다지만 끝내 그의 고향인 비헬즈키르헨이나 그의 여동생이 가족묘지를 갖고 있는 노인키르헨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산티아고에 묻혔습니다. 

이에 반해 김일성 장례식은 북한 주민의 오열과 대대적인 추모 속에 성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호네커가 죽었을 때 독일 언론들은 냉정했습니다. 짤막한 보도를 통해 그가 젊은 시절 반파시즘운동을 했고 감옥생활을 했으며 양독 관계개선과 긴장완화에 공헌한 점 등을 인정했습니다. 동시에 그가 소련의 지지를 업고 권력의 자리에 올라 베를린장벽 건설의 총책임을 맡았으며 비밀경찰 제도를 강화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베를린장벽 탈출자들에게 총을 쏘도록 한 점 등에 대해 과오를 지적했습니다. 김일성에 비하면 호네커는 그 만큼 피를 흘리게 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호네커 인생의 황금기는 아마도 1987년 9월 그가 정상회담차 서독을 방문한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그는 국빈대우를 받았습니다. 서독 언론도 그의 화해와 공존정책을 추켜세웠습니다. 그러나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그의 운명은 천길 아래로 굴러떨어졌습니다. 권좌에서 물러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린치위협을 피해 베를린 주재 소련군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호의로 소련군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을 탈출한 뒤 독일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러시아마저 옐친시대가 열리자 그는 고립무원(孤立無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1992년 6월 독일로 이송됐습니다. 그 뒤 그는 베를린 지방법원 법정에서 곤욕을 치렀습니다. 베를린장벽 희생자 가족들이 그를 살인혐의로 고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경찰서 유치장 신세도 졌습니다. 그는 곤혹스러운 심문에 건강을 이유로 대답을 회피하던 중 간신히 병보석을 얻어 1993년 3월 칠레로 망명의 길을 떠났으나 말년의 가혹한 시련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15개월 만에 암으로 객지에서 죽었습니다. 

호네커와 비교할 때 김일성은 절묘한 시기에 죽음으로써 남한은 물론 미국.일본 등 세계도처에 미묘한 충격과 파장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바로 그의 죽음을 못내 아쉬워하는, 당혹스럽지만 부정할 수 없는 국민정서입니다. 그의 죽음이 처음 보도됐을 때 박수치는 국민은 매우 적었습니다. 오히려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에서 이에 차질이 생긴 것을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마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면 금방이라도 통일이 이루어질 것처럼 기대했던 것입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즉각적이고 공식적인 애도와 조의 표명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김일성의 공적이 어떠하건 간에 호네커와 비교할 때 그의 과오가 더 크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일으킨 죄악은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의 돌연한 죽음이 불러온 국민정서 흐름과 이 역사적 진실 사이에 미묘한 불협화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문화국민의 전통에 따라 아무리 원수라 하더라도 망자(亡者) 앞에서는 명복을 비는 예(禮)의 문화를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무리들, 조의를 표한다고 역사적 진실에 눈을 감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므로 남북관계의 개선이라는 역사적 책무를 다 하기 위해서 조문사절을 보내야 한다는 무리들, 메카시즘(극단적 반공주의) 선풍으로 이를 극복하려는 무리들 등으로 사회는 균열되고 미묘한 불협화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도 인간적인 유화정책을 사용했던 다윗은 크게 낭패를 당하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망명길에 오를 때 아마사는 압살롬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역적(逆賊)의 무리 가운데 가담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반역의 무리들을 평정하고 환궁하게 될 때 다윗은 국민적 대화합이라는 차원에서 유다 지파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유다 지파를 회유하기 위해서 반역군 평정에 크게 공헌한 요압 군장(軍長)을 해임하고 반역군의 장수인 아마사를 임명했던 것입니다.

“(삼하19:13)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남다른 공헌을 세운 요압의 공로를 무시하고 반역의 최일선에 섰던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았던 것은 다윗의 결정적인 실수였으며, 이 실수는 훗날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하고 맙니다(삼하 20:9,10). 지나치게 인간을 의식하거나 자기 감정에 사로잡히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실수하기 쉬운 것입니다. 환부(患部)를 칼로 째고 고름을 짜 내는 것과 같은 선행조처가 없이 무조건적으로 공동체 화합을 부르짖는 것 만큼이나 위험스러 일은 없는 것입니다. 

민족 통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 상황이 아무리 변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한국전쟁(6.25)의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전쟁의 인명피해는 남한에서는 사망 638,160명, 부상. 납치. 실종된 사람이 1,499,065명에 이릅니다. 북한측에서는 사망 884,279명, 부상. 실종된 사람이 3,328,763명에 이르고 있습니다(이 수치 속에는 민간인, 군인, 유엔군, 중공군이 모두 포함되며, 북한의 실종자 가운데는 월남민이 포함됨). 또한 한국전쟁을 통해 엄청난 재산손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발발 후 1952년 3월까지 입은 재산 피해에 대한 국방부의 통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반기업체 시설피해 6,874억 원, 일반기업체 건물피해 1조 1,310억 원, 일반주택 피해 3조 5,290억 원, 토목시설 피해 3,269억 원 등만 합쳐도 5조 6,743억 원이 됩니다.

전쟁의 결과 많은 피난민이 생겨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이 618,721명, 남한내에서의 피난민이 1,714,192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산가족이 1,000만 명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은 가족의 붕괴와 전쟁고아 및 전쟁미망인의 출현을 초래하였으며 인구이동은 안정된 지역공동체를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가족이나 지역공동체와 같은 삶의 터전이 무너지는 것과 아울러 산업시설과 재산의 파괴로 인한 극심한 빈곤은 당연히 삶의 위기감을 조성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6.25전후 기독교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8.15해방의 감격도 오래지않아 사상때문에 동족상잔의 피흘리는 6.25가 발발했습니다. 스탈린의 소련팽창주의 정책에 일치되어 대 일본전쟁참가는 이미 2월 얄타협정에서 한국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한반도를 분할하고 있었습니다. 원자폭탄 투하와 함께 대일선전으로 참전한 소련은 총 한 방쏘지않고 한.소국경인 두만강을 건너와 8월 24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여 사령부를 설치하는 신속성을 보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북위 38도선까지 내려와 남북을 분할하는 일에 서슴없는 행동으로 백성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예루살렘인 평양에서는 해방으로 형무소에서 출소한 출옥성도들이 한국교회 재건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투옥된 목사들은 일제신사참배에 참여했던 한국교회의 정화를 위해 회개와 자숙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북한 사회에서는 일제 시대에서부터 교회 지도자들이 사회지도층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1945년 9월 신의주에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목사 윤하영, 한경직 등이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함으로 해방 후 최초의 정당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뒤이어 평양의 김화식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기독교유당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심각한 불안을 안겨 주었습니다. 도시마다 해방을 맞이 군중대회가 기독교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본 소련과 공산당은 북한내의 기독교 영향력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관계된 용암포사건과 신의주학생사건은 소련과 공산당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해방 후 처음맞는 3.1절은 한국교회에게는 남다른 감회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33인의 민족대표가운데 16인이 교회지도자였음을 긍지로 여기고 있는 한국교회는 거교회적으로 기념행사를 갖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묵과할 수 없는 소련당국과 공산당은 급조한 북조선인민위원회로 3.1절 행사를 주도케하여 교회중심 기념행사를 저지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는 평양, 신의주, 원산 등지의 북한 교회는 3.1절 기념행사를 예배와 함께 진행함으로 공산당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조직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수행되어갔습니다. 반공적인 교회활동을 간과할 수 없었던 공산당은 각종행사를 주일에 실시하여 교인들의 주일예배출석을 방해하였고, 정치강연을 교회당에서 강요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북한총선거일을 주일인 1946년 11월 3일로 공고하여 계획적으로 주일성수를 방해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북한 교회는 “주일선거 반대결의문”을 발표하여 교회의 생명인 주일 성수를 지켜냄으로 종교탄압에 대한 교회의 의지를 천명하였습니다. 

신앙수호를 위한 교회의지를 쉽게 꺾을 수 없음을 안 공산당은 목사였던 강량욱을 앞세워 기독교도 연맹을 만들고 교역자들을 회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감언이설과 위협으로 목사들을 가입시켜 기독교도연맹은 김일성 지지와 주일선거 자진참여 등을 결의하여 기독교를 무력화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북한 교회는 선거에 불참함으로 교회의 참 모습을 보여주며 지켜나갔습니다. 

기독교도연맹은 기독교도연맹총회로 이름을 바꾸어 세력을 강화시켜 끝까지 가입하지 않고 버티는 교역자들을 파면, 제명하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였습니다. 이에 공산당은 그들을 교회에서 추방과 투옥으로 괴롭혔으며 그들이 사역하였던 교회당은 정치학습장으로 강제징발하였습니다. 

갈수록 거세어지는 탄압을 견딜 수 없었던 많은 교역자들과 신도들은 월남하거나 기회를 놓친 이들은 6.25후퇴때까지 지하교회로 숨어들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교회만이 살아남을 수 있지만 아직도 전 지역 공산당의 손이 미치지 못한 때이기에 신자들의 보살핌 속에서 목회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일제에서 해방된 후 남한이 좌우익사상의 혼란과 서구문물 유입으로인한 가치관의 혼란 등을 겪고 있을 동안 북한은 토지개혁과 사상정리를 마치고 “남조선해방”이란 기치아래 강력한 군대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침에 앞서 그 때까지 남아있던 교회지도자들을 총검거하였으며 대부분의 교회를 폐쇄하였습니다. 

오랜 준비와 훈련으로 강화된 공산군은 소련군 탱크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8월 15일까지 한반도 적화통일이라는 목표아래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끝없는 공방전이 계속되다가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하루아침에 돌변하였습니다. 승승장구하던 공산군은 9.28수복 후 허리가 잘린채 패퇴를 거듭하였습니다. 

후퇴하던 그들은 교회지도자들과 신도들을 강제로 끌고 가다가 곳곳에서 생매장, 총살, 타살, 자살 등으로 집단살해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신도밀도가 가장 높은 평북, 용천, 의주 등은 연합군이 진주하지 못하여 어느 곳보다 많은 신자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통일을 눈 앞에 두고 기뻐하고 있을 때 중공군의 참전은 민족에게 또 한번 뼈아픈 비극이었습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혹독한 추위로 후퇴하던 군대들을 따라 남하하는 피난민들 속에 신자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4후퇴 때 피난의 기회를 놓친 신자들은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다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은 북한내 교회당을 거의 불태워 교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북한에서 순교한 이들을 우리들은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나 그들 순교자의 피는 깊은 광맥처럼 북한 교회에 흐르고 있어 반드시 되살아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남한교회는 북한교회에서 출옥성도들의 교회재건운동처럼 적극적이지 못했습니다. 총독의 종교정책에 의해 조직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간부였던 지도자들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교권을 쥐고 있었기에 교회정화를 위한 회개운동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일제 때 통합된 교단지도자들로서 교단 존속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각 교단들은 교단전통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남북대회는 무산되고 교단별로 교회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북한교회와같이 회개운동도 없었고, 해방후 정치세력에 의한 핍박도 없는 가운데 재건되었습니다. 

북한교회와는 달리 남한교회는 교권장악에 힘썼던 소수의 교권주의자들로 시달리고 있었고 월남한 목회자와 관계, 신학교문제 등으로 어수선했습니다. 1948년 10월 여수, 순천에서 일어난 반란은 남한에서의 교회수난의 시초였습니다. 호남지역에서도 교세가 강했던 이 지역에서의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출옥성도인 손양원목사 아들 동인, 동신 형제의 순교와 아버지 손목사의 원수사랑의 실천, 그리고 6.25때 손양원 목사의 순교 일화는 한국교회 순교사의 꽃이기도 합니다. 

파죽지세로 몰아닥친 공산군의 침략으로 공산당의 탄압을 경험해보지 못한 남한 교역자들은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3개월 동안의 공산치하에서 다행히도 견디어왔던 교역자들은 후퇴하는 공산군에게 더 많은 희생을 당했던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당한 영.호남지역의 공산군들은 10월 중순 수복될 때까지 우익인사, 교회지도자과 신자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하였습니다. 특히 전남의 도서지역에서의 집단학살은 인간임을 거부하는 악독함이었습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던 교회지도자들의 고생은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없이 후퇴하던 공산군은 목사와 우익인사들을 색출하여 북으로 끌고갔습니다. 허약하거나 병들고 지친 사람들은 가다가 아무곳에서나 집단생매장, 총살, 찔러죽이는 등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순교, 납치 등의 인명손실뿐 아니라 교회당의 소실, 파괴 등도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 숫자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으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동족간의 전쟁을 치른지 45년이 지났습니다. 빈번한 남북한의 접촉과 대화로 한반도의 통일이 성큼 다가선듯한 착각으로 지난 날의 비극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비판과 평가가 소흘히 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의 책임자는 분명하게 밝혀져야되고 신앙의 자유와  종교를 말살하려고 수 많은 목사, 전도사, 장로와 일반신자들의 생명을 빼았었던 공산정권의 죄악은 남김없이 기록되어져야 합니다. 

삼천리 화려한 금수강산 방방곡곡에 흘려졌던 순교의 피는 오늘도 쉬지 않은 채 한국교회를 지켜보고 있음을 믿음의 후손된 우리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옷깃을 여며야 할 것입니다.

3.1운동 이후 공산주의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종교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이고, 

둘째, 그 당시 기독교회에 많이 등장한 내세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신앙운동에 대한 불만이었고, 

셋째, 사회문제나 민족문제에 대한 두 진영 사이의 노선 차이 등이 그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첫째, 무신론적이고 유물사관적인 공산주의 이념, 

둘째, 폭력적인 방법에 의한 공산주의 사회건설 방법 등을 이유로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태도를 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방후 북한에서는 기독교와 공산정권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었고, 한국전쟁 결과 기독교회는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매우 심한 박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북한교회에서 순교하거나 실종된 성직자 혹은 교회지도자의 명단이 밝혀진 경우만 해도 162명에 이르며, 남한교회의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인물의 수도 15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948개 처소의 교회당이나 기독교 기관건물이 전소되거나(243처소) 반소되는(705처소)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북한정권이 취한 정책을 보면, “반동적 장로, 목사들은 땅을 안 가졌던 자가 거의 없고 놀고 먹지 않는 자가 없는” 부르주아계급으로 규정하였으며, 따라서 ‘악질적. 반동적’ 종교인들은 처형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미제국주의자들과 연계’되었다는 누명을 씌워 체포하고 학살하는 정책을 계속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탄압단계는 전쟁 때문에 더욱 가속되었는데 그 이유는 종교인들이 공산정권에 가장 세찬 반대운동을 했고 유엔군의 북진을 가장 환영하고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하철의 책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는가?>에 보면 다음의 글이 있습니다. 

“지난 3년간의 조선전쟁과 오늘 남조선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미제가 감행한 무고한 인민에 대한 학살, 약탈, 방화 등 비인간적이고 야수적인 만행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약탈에 이용되는 종교의 추악하고 반동적인 본질을 말하여 주고 남음이 있다.” 

기독교국가의 군대인 미군에 의해 혹독한 피해를 당했던 북한당국자들은 미국과 기독교를 동일시하여 그와같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북한교회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도자와 신도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었고, 전쟁을 통해 강화된 북한당국의 경직된 태도에서 나온 종교탄압정책에 눌려 거의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변화된 국제적 환경 속에서 북한당국은 필요에 의해 1988년 10월 평양 봉수동교회가 세워질 때까지 교회는 존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북한 기독교의 실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1946년 11월 28일 창립된 북조선 기독교도연맹이 모체로서, 1960년에 잠적했다가 1974년 다시 등장했습니다. 현재 위원장은 강영섭이고 서기장은 고기준이었으나, 고기준은 최근에 사망했습니다. 

1993년 말 현재 2개의 교회와 500여 개의 가정교회가 있으며, 20여 명의 목사와 130여 명의 전도사(책임지도원)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신도 수는 약 1만 명 정도입니다. 정식 교회당으로는 1988년 건립된 봉수교회와 1990년에 건립된 칠골교회가 있습니다. 

평양시 만경대 구역 건국동(옛 봉수동)에 있는 봉수교회의 신도 수는 300여 명인데 여성이 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칠골교회(평양시 만경대 구역 칠골동)는 1992년 증축하여 규모를 늘렸으며, 김일성의 생모인 강반석의 이름을 따 반석교회로 불리고 있습니다. 

북한의 예배의식은 남한과 같습니다. 정면에 십자가가 걸려 있고, 기도를 드리며, 성가대도 운영하고 가끔 특별 찬송도 부릅니다. 성경은 1990년에 만들어진 신구약 합본(1만부 발행)을, 찬송가의 경우도 그 해 4월에 만든 찬송가(401곡 수록)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헌금시 <잠자리 채> 헌금함을 사용하고 있어 남한교회의 과거를 회상케 합니다. 

세계 선교문화원장 임성기 목사에 의하면 세 종류의 교회가 북한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공식적인 교회로서, 정부에 의해서 일정하게 예배를 드리는 교회입니다.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 교회에는 교인들이 번갈아 가면서 참석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1년에 한 번씩 교회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교회는 가정교회입니다. 북한 당국은 외국 사람들과 세계의 여론을 의식하여 1970년대 중반부터 가정교회를 허락했습니다. 지금은 약 500-1000개에 이르는 가정교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기도회와 성경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교회는 지하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철저히 비밀리에 활동하기 때문에 결코 그 정체가 아무에게도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교인 한 사람을 만들려면 매우 신중을 기해 전도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가정에서 쌀이 떨어지면(어느 가정이나 정부에서 주는 배급쌀이 정한 기한까지 가지 못하고 떨어집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쌀을 보내 줍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몇 차례 쌀을 받아 먹은 후, 지하교회는 <쪽복음> 성경을 쌀과 함께 넣어서 보냅니다. 이 전도 방법에 의해 믿음을 갖게 되면 지하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게 됩니다. 

세례는 예배에 몇 차례 참석한 후, 지하 교인들이 안전원을 가장하여 그들을 데려다가 위협과 협박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무사히 통과된 사람들이 세례를 받게 됩니다. 

북한 정권이 종교를 용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아직은 속단하기 어렵습니다. 북한의 종교단체들이나 종교인들의 활동을 보면, 주로 북한의 정책이나 입장을 지지하고 대남 비방 성명서를 발표하는데 그치고 있으며, 순수한 종교 활동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시인 키플링(R. Kipling 1865--1936)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오, 동(東)은 동(東), 서(西)는 서(西), 이 둘은 결코 만나지 않으리라. 땅과 하늘이 신의 위대한 심판석상에 설 때까지.” 키플링이 동은 동, 서는 서, 결코 만날 수 없다고 한 것처럼 분단된 한민족은 남(南)은 남(南), 북(北)은 북(北), 결코 만나 통일을 이룰 수 없는 것인가.

1995년은 우리 민족이 잔혹한 일본제국주의의 36년 간의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50주년을 맞게 되는 해입니다. 동시에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된 지 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이 뿐 아니라 6월은 같은 민족으로서 동족에게 총뿌리를 겨누고 죽인 6.25전쟁 4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역사의 주체가 되는 교회의 탄생을 가져 온 성령강림절이 있기도 뜻 깊은 달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통일의 주체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진정한 나라 민족의 통일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교회 탄생을 가져왔으며 교회는 그 통일 과업을 수행하는 역사의 유일한 기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통일성 또는 합일성)과 다른 영(靈)들의 어지럽게 함을 대조시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14: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고전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인간의 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열 사람은 함께 아수라장을 벌이고 말 테지만,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열 사람은 함께 하나를 이룰 것입니다.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려 흩어졌던 형제들이 한 마음 한 뜻, 참된 연합이 이루어졌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분쟁과 다툼과 불일치가 있는 곳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은 인간을 높이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진정한 통일은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의 강림으로 탄생한 교회를 통해서 인류는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통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인 것입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2:15)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롬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골로새서의 중심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입니다(3:3,1:19,2:9,1:14). 에베소서의 중심 사상은 그러한 사상을 발전시킨것이다. 교회를 통한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되어질 때 나라 민족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의 전체 사상은 제 1장에 나오는 두 개의 구절에서 요약되고 있고 있습니다(1:9-10).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핵심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을 하나로 모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부조화와 분리와 분열이 가장 불행한 사실이며, 여기서 나와 너(ich und du)그리고 나와 그것(ich und es)과의 분리,  분열, 부조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분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에베소서의 중심 사상은 자연계의 분리와 인간의 분리와 시간의 분리와 영원의 분리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러한 모든 분리는 다만 모든 인간과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될 때만이 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의 근원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입니다. 당시 로마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하나로 묶이는 것을 바라보고, 세상 모든 것이 로마 보다 완벽한 충만성을 가진 그리스도 안에 집중되여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상징과 비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통일의 개념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먼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한 손, 발 등 도구와 지체가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화해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세째, 통일의 주체가 되는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통일된다는 사실을 전파해야 합니다.  

“인생의 모든 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환상보다도 더 위대한 그리스도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일찌기 없었다. 교회는 전 세계적이며 전 우주적인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이라는 환상보다도 더 위대한 교회의 환상을 가진 사람은 일찌기 없었다(E.F.Scott).” 

1989년 냉전 시대의 대표적 상징을 뜻하던 베를린 장벽이 헐리고 이듬해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되었습니다. 동구권의 사회주의 체제가 해체되고 1991년 8월 28일 ‘현존 사회주의’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이 붕괴되었습니다. 1917년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 이래 74년 간이나 통치하여 온 소련 공산당이 그의 붉은 깃발을 내리고 종언을 고하였습니다. 

그 후 세계 질서는 재편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대결인 동서의 대결에서 경제적 문제인 남북의 대결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경제 문제도 블럭화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민족과 인종을 앞세운 민족주의 고양과 인종에 의한 지역 분쟁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적 이기주의를 꾀하고 있습니다. 

세계에는 사회주의를 체제를 이념으로 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중국, 베트남, 쿠바, 북한이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한반도에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는 지구상 분단의 마지막 국가로 남아 탈냉전 시대에 냉전 지역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분단된 국가는 4개국입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1949년 10월 1일 중국이 중공과 대만으로, 1954년 7월 21일 베트남이 월맹과 월남으로 분단되었습니다. 

이들 분단 국가들은 차례로 통일을 실현하였습니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은 적화 통일되었고, 1990년 10월3일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통일’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대만의 분단 문제는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분단국 문제로 취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면 1971년 유엔에서 대만이 추방된 후 세계의 여러 국가는 중공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고 대만은 중국 내 영토의 일부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분단 국가는 ‘우리 한반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의 주범이 김일성이었다는 사실은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년 6월 러시아 정부가 제공한 구소련 6.25관계 문서와 그 전후부터 최근까지 러시아에서 발견된 새 자료들은 김일성이 북한 정권 수립 직후부터 남침을 계획하고 스탈린과 모택동을 끈질지게 설득하여 무력남침을 감행한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6.25전쟁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끝났으나 전쟁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데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공산당의 몰락과 냉전종식에도 불구하고 6.25는 민족해방전쟁으로서 북침이냐, 남침이냐를 가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이른바 신수정주의학파의 주장이 여전히 소모적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 논쟁의 장을 만들고 있는 한 6.25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혹 전쟁 미체험 세대들에게 위험하고 낭만적인 6.25전쟁관을 전파시키는 이론이 된다면 비극은 더욱 증폭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탈냉전 이후 세계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 유일의 폐쇄사회인 북한은 6.25 그 날 이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상은 철저히 통제되고 주민들은 고립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억압과 동원체제에서 조금도 풀려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금 북한은 남한으로부터 쌀을 무상으로 제공받고 있으면서도 정전협정 파기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쟁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모두 풀고 하시(何時)라도 전쟁재발 명분을 얻어 가지고 전쟁을 재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들이 먼저 중립국 감시단과 중국 감독관을 무조건 일방적으로 철수시킨 것은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3년 1개월 간의 6.25(1950.6.25--1953.7.27) 6.25라는 전쟁(한국전쟁)은 약 450만 명의 인명 피해와 산업시설의 43% 파괴, 주택 33% 완전 파괴 등의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남북한의 극심한 냉전적 대결 구도 속에서 서로 이질화된 삶의 양식과 가치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념 지향적인 가치관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집단주의적이고 조직 지향적인 가치관이 만연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유교 문화와 가치관이 온존하고 있습니다. 강한 통치 방식인 중앙집권력은 김일성 개인 숭배를 가져왔고, 김일성을 ‘어버이’로 호칭하는 ‘국가가족주의’ 내지 ‘가족주의적 국가’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체 사상의 유일 사상적 가치관과 시혜적 가치관이 국가에서 배급하는 배급제 방식 때문에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런가하면 남한에서는 가치관이 전도(顚倒)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즉 본래적 가치가 도구적 가치로, 수단적 도구적 가치가 본래적 가치로 뒤바뀌는 사회를 말합니다. 돈이나 권력 등 외면적 가치를 중시하고, 인격. 학문. 사랑. 평화 등 내면적 가치를 경시하는 풍조입니다. 금전과 권력 지향적이며 관능적, 감각적 쾌락의 추구,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적인 경향, 연고주의 내지 정실주의, 외관을 중시하는 경향, 노동 천시, 인명 경시, 주체성이 빈곤한 순응주의, 정신적 빈곤에서 오는 반지성주의, 사고력의 열악성에서 오는 인정 편중 경향성 등입니다. 

남한에서는 천민 자본주의로 물질화된 물질 위주의 가치관이 지양되고 정신적 가치가 중시되는 바른 가치관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독일의 경우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완전히 통일이 되었지만 1등 국민(서독)과 2등 국민(동독) 사이에 마음의 장벽과 사회적 장벽은 아직도 높이 쌓여 있고, 과거에는 1민족 2국가였지만 이제는 1국가 2사회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라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운동은 다음과 같은 유형들이 있었습니다.  

민족운동의 방법적인 유형을 분류하면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내 목숨을 걸고 원수의 목숨을 강요하는 피의 항쟁입니다. 갑신정변의 쿠데타, 갑오 동학란의 민중봉기나 을미의 의병, 을사의 시위연대 항쟁이나 병오. 정미의 의병, 1920년대의 만주 방면에서의 독립군 전투, 1940년대의 광복군의 대일참전 같은 무력항쟁이 그 한 갈래요, 광복회.의열단.파괴단 같은 폭격 암살단과 무수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의사. 열사에게서 보는 폭력항쟁이 다른 한 갈래며, 을사보호조약, 또는 경술국치 직후의 수 많은 순국에서 보는 자결이 또 한 갈래가 됩니다.

둘째, 민족의 요구를 절규하며, 국제여론에 호소 청원하는 조직적 시위의 항쟁입니다. 3.1만세. 6.10만세. 학생만세 같은 비폭력 시위운동이 그 한 갈래요, 헤이그평화회의. 파리강화회의. 국제연맹 등에 대표를 보내고 스톡홀름의 만국사회당대회. 뉴욕의 25약소국회의.모스크바의 극동피압박민족대회 등에 대표를 보내어, 한국 독립문제의 후원을 호소하는 등의 외교항쟁이 다른 한 갈래며, 독립협회. 독립청년단. 대한외교청년단. 애국부인회나 흑우회. 공산당. 신간회. 근우회 등 무수한 비밀결사, 또한 합법적 조직운동의 항쟁이 그 또 다른 한 갈래입니다. 

셋째, 민중을 계발하고, 민의를 대변하며, 민족의 요구와 이념을 구현하는 문화항쟁입니다.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와 개벽. 조선지광 등 신문. 잡지의 언론항쟁이 그 한 갈래요, 문학.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의 예술운동과 사학. 어학. 민속학 등 국학연구운동과 각종 체육경기운동. 종교운동. 여성운동. 소년운동. 형평운동. 물산장려운동. 협동조합운동 등 사회운동으로 표현된 문화항쟁이 그 다른 한 갈래이며, 미션계의 배재학당. 이화학당의 뒤를 이어 서우학회. 기호흥학회. 호남학회. 관동학회 등이 일어나, 사립학교 설립운동과 민립대학운동 등으로 나타난 교육항쟁이 그 또 하나의 갈래였습니다. 

이제 참된 민족 구국 운동은 요한 웨슬레를 통하여 보여 주듯이 성령운동을 통한 인간성 회복과 교회의 갱신과 회복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인간성 회복과 교회 갱신과 회복을 위한 성령의 역사가 이 나라 민족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을 통한 나라 민족의 진정한 통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이동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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