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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전 인생을 위한 5대 요소 (시 118: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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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 인생을 위한 5대 요소 (시 118:19-29)  

< 패배를 지켜만 보지 마십시오 >   

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요즘 아빠와 함께 산을 오릅니다. 산을 오르면서 아빠는 끊임없이 용기를 불어 넣어주지만 아들은 수시로 죽고 싶다고 합니다. 과거 6년간의 학교 폭력과 왕따로 인한 정신적 상처로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행복은 중1 때 대전에서 친구들과 놀던 때였습니다. 중2 때 직업군인인 아빠를 따라 서울로 전학한 후부터 그는 망가졌습니다. 학생들은 지방에서 온 내성적인 그를 놀렸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거나 덩치가 크다고 ‘호빵맨’이라고 불렀습니다. 가해 학생들은 커터 칼로 교복 칼라를 긋고, 담뱃불로 지지고,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는 늘 혼자 밥을 먹었고 반 친구에게 맞아 기절도 했습니다.

결국 다른 중학교로 전학했지만 한 번 붙은 왕따 꼬리표는 떼기 힘들었습니다. 그는 가해 학생들을 피해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는 화장실에만 숨어 있었습니다. 결국 엄마는 근무하는 남편을 남겨둔 채 지방으로 이사 갔습니다. 지방 아이들은 순진해서 아들을 감싸줄 것이라 믿었지만 그곳에서도 친구에게 맞아 안경이 부서진 후 등교를 포기했습니다. 다시 서울의 고등학교로 한 학년 낮춰 전학했는데 한 살 어린 급우들조차 그를 또라이라고 놀렸습니다.   

그 후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아들이 단 한 명의 친구도 없는 외로움 속에서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졸업장을 받을 때 온 가족은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학창시절의 정신적 상처로 가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정신병원을 다닙니다. 그는 요즘 부모님께 수시로 자신은 자식을 낳으면 아예 학교를 안 보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에게 고교 졸업장이 꼭 필요했을까요? 그 경우에 부모는 그를 자퇴시켰어야 합니다. 한 길이 막히면 다른 길로 가면 됩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할 때도 있지만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자기 길은 포기하지 말되 자기 길이 아니면 그 길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새 길을 찾기 위한 포기는 진짜 포기가 아닙니다. 새로운 길을 찾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결단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한 구세군 사관님(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어렸을 때 가정형편이 어려워 7년 동안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생활능력은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생활능력은 보지 않고 공부 능력만 봤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공부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선생님은 성적이 나쁘다고 사람 취급도 안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공부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공부가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지금 얼마나 인격도 좋고 성격도 밝고 사역도 멋지게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 사관님에게는 3자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가치관이 바르다면 홈스쿨링도 좋다고 확신해서 자녀들이 학교를 안 다녔으면 하는 마음으로 수시로 말합니다. “애들아! 공부하기 싫지? 왜 굳이 학교를 가려고 해! 놀면서 네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집중해서 공부해라! 검정고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어.” 

그렇게 계속 자퇴를 권고해도 첫째와 둘째는 그냥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갔습니다. 그러나 사관님의 노력이 마침내 성공해서 지금 셋째는 학교를 다니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따라 하고 싶은 것 하고 놀고 싶은 것도 놀면서 즐겁게 홈스쿨링을 통해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기 주 종목이 아닌 종목에서의 패배를 지켜만 보지 마십시오. 새로운 길을 찾으십시오. 그 길에서도 얼마든지 멋진 작품 인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졸업장에 목을 매면 진짜 목을 매는 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착된 길로만 가야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길로 가십시오. 자기 길로 가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고 한 순간에 모든 쌓았던 것이 무너집니다. 특별한 사람은 특별한 코스로 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 역전 인생을 위한 5대 요소 >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하나님은 버린 돌로 머릿돌을 만드는 일을 매우 즐겨하십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기이한 역사를 보면서 신앙심이 생깁니다. 그처럼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 구절에서 의의 문을 연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는 굳게 닫혀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며 지성소로 들어가는 의의 문이 열렸습니다(마 27:50-51).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것은 모든 축복의 토대입니다.  

인간이 원죄로 에덴을 상실하자 세상은 저주받아 탄식과 수고와 죽음의 기운이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다 그게 그겁니다. 소유가 많아도 여전히 공허합니다. 영혼이 좋은 분을 만날 때까지는 어떤 좋은 것도 진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지상 최대의 부자였던 솔로몬은 전도서 1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솔로몬은 만족을 위해 궁녀들의 치맛자락 속에서 향락에 빠져 보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허무해졌습니다. 그처럼 주님도 없이 해 아래서 수고하며 살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수고해도 주님 안에서 수고해야 의미도 있고 유익도 있습니다.   

모세는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간다고 고백했습니다(시 90:9). 예수님이 없으면 모든 날들은 헛된 날들이고 단지 심판을 준비하는 세월들이 됩니다. 그런 비참한 상황에서 축복 받고 의미 있게 사는 길을 예수님이 열어주셨습니다. 또한 기도응답과 문제해결의 길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이 건축자가 버린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듯이 버린 돌 인생이 머릿돌 인생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주일을 지키십시오   

본문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정하신 날은 구약에서는 안식일이고 신약에서는 주일입니다. 그 날을 지키면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고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고 형통한 축복도 있습니다. 결국 주일은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날이고 축복과 저주가 갈라지는 날입니다.

가끔 경축일에 청와대 문을 개방하면 보통 때는 배경과 권세가 있는 사람들만 드나들던 그 문으로 누구나 들어갑니다. 주일은 바로 그런 영적인 경축일입니다. 주일에 하나님을 찬송하면 하늘에서 신령한 양식이 내리고 그 신령한 양식으로 맘이 시원해집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지키며 즐겁게 사는 것처럼 복된 삶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7일째에 안식했기에 사람들은 6일 동안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고 7일째 지친 몸으로 교회에 와서 안식하고 재충전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먼저 6일 동안 일하고 7일째 안식할 수 있지만 연약한 사람은 먼저 6일 동안 일할 수 있는 사전 에너지가 없습니다. 연료 없이 자동차가 6일 동안 열심히 다녀서 수고했다고 연료를 넣어줍니까? 아닙니다. 연료를 먼저 넣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안식일은 7일의 마지막 날이지만 인간에게 안식일은 7일의 첫째 날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인간은 6일째 창조되었기에 하나님께 7일째 날인 안식일이 인간에게는 첫째 날입니다. 즉 사람은 주일에 신령한 사전 에너지를 먼저 공급받아야 세상에 나가서 6일 동안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복된 날입니까?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6일간 천지를 만드실 때 매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몇째 날이니라.”란 구절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 1-3절에는 “하나님이 그 지으신 일을 끝내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니라.”란 말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구별하신 거룩한 날로서 찬란한 빛만 있고 저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선악과 사건이 없었다면 그 일곱째 날이 영원히 지속되며 영원한 빛과 평화가 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타락함으로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추방되었고 그 후 그들에게 처음 다가온 무서운 현실은 저녁이 다가오는 현실이었습니다. 타락 후 처음 맞는 저녁을 보면서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참된 안식을 잃은 사실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그처럼 안식일은 영적인 의미에서 밤이 없고 오직 찬란한 빛과 평화만이 있는 날이고 이 땅에서 에덴이 잠깐 회복되는 날입니다.  

결국 주일을 지키는 삶은 가장 복된 삶입니다. 또한 주일을 지킬 때 모든 방탕과 불행을 이겨낼 수 있고 나머지 6일도 복된 날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최선을 다해 지키고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매일을 복된 날로 만드십시오. 그러면 조만간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역사도 반드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3.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본문 26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하나님은 축복하실 때 대개 교회를 통해서 축복을 내리십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교회를 애틋하게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교회를 애틋하게 사랑하면 결코 축복의 대열에서 이탈되지 않습니다.  

1992년 12월 12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설악산 신혼여행 비용으로 오직 27만원만 사용한 후에 남은 돈으로 10일간 개척교회 비품을 준비하면서 인테리어도 안 된 황량한 지하에서 추위에 떨며 혼자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12월 27일에 몇몇 사람들을 초청해 첫 개척예배를 드릴 때 난방 시스템 이상으로 참석한 약 20명의 사람들이 모두 덜덜 떨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초라한 교회를 그때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성도에게 사랑의 제일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사랑의 문이 열릴 때 축복의 문도 열리고 교회 사랑의 문이 닫힐 때 축복의 문도 닫힙니다.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직보다도 주일학교 교사직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교회가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곳입니까? 교회는 힘든 사람과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곳이고, 멋진 여성이 겸손하게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를 하는 곳이고, 엄청난 한과 상처와 슬픔에도 넉넉한 미소가 생기게 하는 곳입니다. 또한 화해의 대 역사를 만들어 내는 곳이고, 소외된 이웃에게 천상의 축제를 열어주는 곳입니다. 요새 왜 한국 교회가 많이 욕을 먹습니까?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될 때 교회는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샘물 근원이 됩니다. 우리 분당샛별교회는 그런 모델 교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4. 좋은 일에 매이십시오

본문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구약에서는 사죄 의식으로 희생 제물을 제단 뿔에 매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여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산 제물로 삼아 제단에 매십시오. 물질을 제단에 매면 하늘 보화가 되고, 시간을 제단에 매면 지경이 넓혀지고, 재능을 제단에 매면 기발한 창조성을 얻고, 몸을 제단에 매면 건강의 축복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 매여 인류의 구원문제를 해결했고 이삭이 모리아산상에서 제단에 매여 100배의 축복을 얻는 족장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성도가 교회와 거룩한 일에 매일 때 영혼도 지킬 수 있고 축복의 지경도 넓혀집니다. 반면에 교회에 매인 기도생활과 말씀생활과 봉사생활이 풀리면 축복의 맥도 풀어집니다.  

서울에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봉사하는 한 신실한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그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졸업준비에 바쁘니 금년만 쉬게 해주세요.” 목사님은 그 사정을 들어주어서 교사와 성가대에 매인 줄을 풀어주었습니다.  

그 후 그는 주일마다 간단히 예배만 드리고 가더니 얼마 후에는 뒷자리에 앉았고, 얼마 후에는 졸았고, 얼마 후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전화하면 처음에는 일이 있어서 교회에 나오지 못했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전화도 안 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계속 세상에 빠졌습니다. 토요일이면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취해서 주일날에 일어나지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화재로 수십 명의 청년들과 함께 타 죽었습니다. 너무 타서 신원파악이 힘든 상태에서 목사님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가 교사로 5년 동안 충성스럽게 봉사해서 교회로부터 5년 근속 메달을 받았는데 그 메달을 보고 경찰이 전화한 것입니다. 목사님이 급히 달려가 보니까 얼굴은 다 타서 알 수 없었지만 그 메달을 보고 금방 그 청년임을 알았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한 동안 그 시신을 부둥켜안고 교회에 매인 줄을 풀어준 것을 통곡했습니다.  

교회봉사에 매이면 부담도 되지만 그래야 신앙도 성장하고 천국 상급도 커지고 축복의 지경도 넓혀집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종들에게 화인을 찍어 주인 것으로 구별했듯이 자신을 주님께 묶으십시오. 그래서 손과 발은 주님의 손과 발이 되고, 생각도 주님께 매이고, 꿈과 비전도 주님께 매이고, 인생 전체가 주님께 매여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사십시오. 진정한 쉼은 거룩한 짐을 질 때 옵니다. 인생의 짐에 거룩한 짐을 더 얹으면 신기하게도 삶의 무게는 오히려 가벼워지고 그때 진짜 안식과 평화가 찾아옵니다.

5.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본문 28-29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본문 시편의 전체적인 주제는 바로 감사입니다. 그처럼 다윗은 끊임없이 감사 고백을 통해 축복을 예비했습니다.

감사생활은 축복을 담는 그릇을 준비하는 가장 신령한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감사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바랍니까? “고맙습니다.”란 진실한 말 한마디면 부모는 최고로 만족합니다. 더 나아가서 감사한 마음을 담아 부모님께 정성껏 선물을 드리면 부모는 그 감사를 기쁘게 받고 최고의 것을 자녀에게 유업으로 물려줍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최고의 축복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누가 그 축복을 얻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란 말이 있습니다. "맹자 어머니가 세 번을 이사해서 교육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교육환경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학원이 많은 서울 강남으로 이사 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서울 강남에는 술집도 많습니다. 그러면 이민을 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적인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사해서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감사하는 부모가 되어 좋은 가정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부모가 불평 체질이면 자녀도 불평 체질이 되고 결국 불행해집니다. 반면에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모가 범사에 감사하면 자녀도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은 그런 자녀에게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사나 이민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는 훈련부터 하십시오.  

어떤 분은 "내 십자가가 이렇게 무거운데 어떻게 감사하느냐?"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십자가만 제일 무거운 줄 압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자신의 성격과 환경과 여건을 볼 때 자신의 십자가가 자신이 제일 무난하게 질만한 십자가이기에 하나님이 그 십자가를 지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만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말고 그때도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축복의 역사도 가속될 것입니다.  


< 시련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   

살면서 힘든 일을 만나도 감사하십시오.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 기도 응답이 없어도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응답은 자기가 원하는 모양과 전혀 다른 모양으로 주어질 때도 많습니다. 살면서 그런 상황을 체험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 전에 이발하는데 저의 머리가 조금씩 빠지는 것을 보고 이발사가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으려면 병원의 처방을 받아 전립선 약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그냥 듣고 지나쳤는데 며칠 전에 실제로 가까운 사람이 전립선 약을 먹고 머리카락이 다시 수북이 생긴 얘기를 들었습니다. 전립선 약의 부작용이 전혀 다른 분야에서 머리카락을 소생시키는 긍정 작용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부작용까지 긍정 작용으로 만듭니다.   

최근에 약국에서 시판되는 에이티알파란 로션도 처음에는 간염 치료제로 개발되었고 지금도 러시아에서는 간염 치료제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피부 강화 및 재생에 탁월한 효능을 보이면서 요새는 오히려 각종 피부질환과 무좀과 화상과 아토피 치료에 탁월성을 보인다고 합니다. 저도 30년 무좀 고질병이 지금은 거의 없어졌고 동료 목사님은 40년 고질적인 아토피가 치료되고 있다고 합니다. 비타민 박사로 유명한 서울대 의대 이왕재 박사도 20세기의 최대 발견인 페니실린 이후 최고의 효능을 가진 물질이라고 극찬할 정도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은 사람의 생각과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다른 모양으로 더욱 효율적으로 주어질 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조차 축복이 변장된 모습이라고 믿고 축복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우리말에서 사물의 핵심 문제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으면 “속알머리(소갈머리)가 없다.”고 하고 주변 상황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으면 “주변머리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농담으로 머리카락이 머리 주변부터 빠지면 “주변머리가 없다.”고 하고 이마와 정수리부터 빠지면 “속알머리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머리 빠지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주변머리는 잘 빠지지 않고 속알머리만 빠집니다. 왜 그럴까요?   

항상 그 문제로 궁금했었는데 며칠 전에 갑자기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자세히 보면 잠잘 때 베개가 닿아 머리카락이 끊임없이 압력을 받고 짓밟히고 괴롭힘을 당하는 주변머리 부분은 오히려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고 두껍게 잘 자랍니다. 반면에 잠잘 때 베개가 전혀 닿지 않아서 압력도 없고 짓밟힘도 없고 괴롭힘도 당하지 않는 속알머리 부분은 모근이 약해지고 머리카락이 가늘어지면서 결국 쉽게 머리가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살면서 시련과 압박과 짓밟힘의 고난도 필요합니다. 그 고난을 잘 활용하면 뿌리 깊은 인생이 되지만 너무 삶이 편하면 뿌리 뽑힌 볼품없는 인생이 됩니다. 이제 시련과 고난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고난을 믿음으로 승화시키면 그 고난을 통해 매장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뿌리 깊은 나무가 됩니다. 자기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을 찾고 패배감에 젖어 살지 마십시오. 항상 예수님 안에서 교회를 사랑하고 거룩한 일에 매이며 특히 범사에 감사함으로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역전 인생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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