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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경주자들 (히 11:29 - 히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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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경주자들 (히 11:29 - 히 12:3)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던 6.25, 그 참혹한 동란이 일어난 지 벌써 62년째 되는 해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연세 드신 분들에게는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참담했던 전쟁의 상흔(傷痕)은 아직도 남북분단의 현실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국가란 무엇입니까? 나라가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우리는 나라에 대해 어떤 의무를 갖습니까? 우리의 나라를 다시는 질곡(桎梏) 속으로 빠뜨리지 않고 찬란한 영광의 미래로 이끌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호국의 달 6월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칼빈은 정부와 그 통치자의 권세에 제한이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즉 하나님께 복종하는 한 통치자는 정당한 위정자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한 그는 백성의 지탄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원리를 <복종과 저항>의 논리에 적응시킨다면 국가의 시책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한, 교회는 위정자에게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나라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만큼 살게 된 것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이렇게 많아지게 된 것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아니고는 설명될 길이 없습니다.

전쟁이 계속되던 3년여 동안에 한국교회는 공산주의자들의 잔인한 핍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순교의 피를 뿌렸고, 그들은 오늘 우리에게 영원한 신앙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공산 정권은 아직도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최악의 박해를 가해오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처럼 자랑스런 믿음의 선진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번성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헛되게 하지 않으시고 열매 맺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이 시대 성도들의 모델로서, 하나님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달려가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1. 믿음의 역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일으킨다.

오늘 본문이 나오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사람들의 산맥을 이루고 있습니다. 본장은 믿음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여러 인물들은 구약의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을 믿음이라고 하는 렌즈를 통하여 투영(投影)하고 있습니다.  

본장은 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고, 어떻게 믿음의 역사를 이루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은 환경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어려운 조건 속에서 위기와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기고 마침내 놀라운 승리를 거둔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을 읽어가며 그들의 믿음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29절=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거대한 바다의 물 절벽 사이를 거침없이 건넌 것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도전이었습니다.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주님이 무엇을 지시하시든지 그대로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장애물의 크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의 뜻과 능력과 신실하심에 대하여 온전히 신뢰하는가의 여부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아무리 거대한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아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눈을 장애물에게로가 아니라 그것들을 임의로 주장하시는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30절=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맞딱뜨린 장애물인 여리고 성은 전차가 그 위에서 달릴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이중 성벽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대로 훈련된 군사를 갖지 못한 이스라엘에게 여리고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본절에 여호수아의 이름이 거명되지 않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믿음이 여리고 성 함락에 결정적인 요소였음을 보여줍니다. 성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단순히 성 주위를 돌도록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상식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지만 모든 백성들은 믿고 따랐던 것입니다.

31절=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라합은 이방 여인이었고 기생이었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올라가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당시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함락시킬 확률이 순수한 군사력으로만 보았을 때 100만분의 1이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라합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었던 것입니다.

32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여기 언급된 인물들은 신정시대의 인물들과 왕정시대의 인물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익숙한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는 이들이 어떤 믿음을 가졌고 또 믿음으로 어떤 활약상을 보여주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필요 없을 정도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와같이 믿음의 역사는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런 역사를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이 땅에서 승리의 삶을 살았던 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33-34절=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에 쓰신 사람들이 지닌 공통점과 특징은 믿음을 삶의 수단과 행동의 매개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서 믿음을 빼버리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전쟁의 영웅들인 기드온, 입다, 삼손, 다윗을 보십시오. 그들은 싸움터에 나갈 때에 칼이나 창보다 믿음이라는 무기를 더욱 중히 여겼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사용해야 할 병기는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만이 이 세상을 이깁니다.

그렇다고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허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지도자로서 자기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언제든지 의로우신 하나님 편에 서고자 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사자들의 입을 막은 다니엘이나 삼손, 다윗을 보십시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의 행위가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생생하게 교훈하는 대목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풀무불의 능력을 믿음으로 소멸시킨 젊은이들입니다. 하나님은 견고한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과학이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셔서 구원하심으로써, 주변의 불신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 기자가 이처럼 독자들에게 믿음의 영웅들에 관한 일들을 상세하게 회상시키는 것은 시험과 핍박 가운데서 흔들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믿음을 북돋아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인한 견고함과 불굴의 정신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아니 그때 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크게 필요한 것입니다. 

본문 38절은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믿음의 경주를 능력있게 성공적으로 감당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에서 영광스럽게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교회를 세웠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믿음의 모델로 세우셔서 오고오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내세워 보이고 계십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 또한 이런 사람들의 반열에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믿음의 사람들은 증인이 되어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 

1절=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서 있는 이렇게 많은 증인들의 구름을 가지고 있다’ 가 됩니다. ‘증인들의 구름’ 이란 경주가 펼쳐지고 있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스탠드를 가득 메우고 있는 관중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경주를 하고 있는 이 시대 성도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응원하는 관중에 대해 좀더 살펴봅시다. 그들 가운데는 영원한 삶을 위하여 이 땅의 삶을 희생한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본문 35~38절을 받읍시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하나님은 믿음의 종들이라고 하여서 모든 경우에 어려움에서 건져내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받은 악형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북을 치는 사람이 힘껏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대적자들은 믿음의 사람들을 북 모양으로 생긴 형틀 위에 뉘어 고정시키고, 먼저 쇠창살로 어깨와 팔, 엉덩이, 다리 등의 관절을 찔러 탈골시킨 뒤 죄수의 앞가슴을 분쇄하듯이 쳐서 죽였는데, 이를 ‘튐파논’이라 불렀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우상을 섬기던 백성들 앞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책망하다가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므낫세 왕이 보는 앞에서 톱으로 켜져 두 동강이 나 죽었는데, 이때 이사야는 ‘큰소리로 울부짖거나 울지 않았으며, 그의 몸이 두 조각으로 잘릴 때까지 그의 입술이 성령으로 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B.C. 170년경 안티오커스가 대 박해를 일으켰을 때, 일곱 형제가 순교한 이야기는 너무도 감동적입니다. 7형제를 목전에서 차례차례 차바퀴에 매달아 돌려 쇠못에 찢겨 죽이고, 철못 손으로 찢어서 죽이고, 달군 가마에 볶아 죽이고, 쇠갈구리로 가슴통을 꿰어 매달아 죽이고, 점점이 자르고, 돌방아로 깨고, 끓는 가마에 끓여 죽여도 그들은 오히려 여호와를 찬송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 때 안디옥 교회 감독인 이그나티우스는 짐승에 물려 몸이 찢기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로마로 잡혀가면서 소아시아 여러 교회와 서머나 교회 감독인 친구 폴리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놓이기를 바라지 말라. 나는 한 알의 밀알이 되고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벌 당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십자가에서 짐승의 이빨에 뼈가 가루 되고 손과 발이 잘리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 고 말하였습니다.

터키에 가면 갑바도기아라는 지방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후 초대교인들이 이곳으로 피난 와서 1,000개의 가정교회를 만들고 신앙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 당시 100만 명 정도가 그 곳에 모여 20미터 바위산과 절벽에 구멍을 뚫고 살면서 고행과 수도와 기도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하 86미터 깊이(20층 깊이)까지 파고 들어가 지하도시를 만들고 지하에 교회와 신학교를 만들어 신앙을 사수했습니다. 

우리 일행 36명은 지하 8층 깊이에 있는 교회 터에 서서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생각하며 경건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현지 선교사님이 준비해 온 빵과 포도주로 눈물의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땅굴 속에서 기도했는데 나는 너무나 세속에 물들어 있구나 하는 강한 자책감이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참으로 영광스럽게 믿음을 지키며 승리의 경주를 감당했던 그들은 이제 바통을 우리에게 넘겨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경주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경주이고, 끝까지 믿음으로 완주해야 하는 달음질입니다.

우리의 경주는 어려움과 환난이 덮쳐와도 변함없이 믿음으로 달려가야 하는 경주입니다. 마치 지난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온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진행되던 축구 경기장의 선수들처럼, 우리 모두는 숨을 헐떡이며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기어코 이겨야 하는 경기자들입니다.

4천년 전 아브라함이 쥐고 달렸던 바통,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차례로 받아서 힘껏 쥐고 달렸던 그 바통, 모세가 가지고 달렸던 그 바통, 앞서간 수많은 순교자들이 가지고 달렸던 그 바통을 이제 우리가 받아 쥐고 있습니다.

이것이 혹심한 신앙 박해의 시대를 살았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자기 정체성’(Self Identity)이었습니다. 이 소중한 바통을 물려받았다는 것, 이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감격이었고 희열이었으며 축복이었습니다.  

그러한 자기 정체성의 확인은 박해와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사랑하는 부모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치고 난 후에도 슬픔과 아픔을 이기고 그들은 바통을 쥐고 달렸던 것입니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에 프랑스 의회는 모든 종교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주일은 사라졌고 성직자들은 숲속으로 추방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들은 예배하기를 중단하지 아니했습니다. 전령꾼들이 집집을 돌면서 이야기 합니다. “오늘밤 자정이 넘은 후에 동네 습지 공터에서 모이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인적이 끊긴 깊은 밤중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검은 옷을 입고 빛을 차단한 등잔을 들고, 지정된 장소로 모여듭니다. 추방된 목사님이 나타나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성만찬을 행합니다.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사실 그것은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언제 무장한 군인들이 달려들어서 그들을 색출해 갈지 모르는 때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담대하게 성만찬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그들의 육체는 죽임을 당할지라도 주님이 재림하실 때 다시 살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들은 경주를 위하여 모든 거추장스런 것들을 벗어던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모든 경주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자들이 벗어버려야 할 것들에는 의심, 교만, 나태 등이 포함될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에 방해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단호히 제거해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이 영광스러운 바통이 넘어 왔고, 이제 우리가 달릴 차례입니다. 다 달리고 나면 우리도 그것을 다음 주자(走者)에게 넘겨주어야 할 것입니다.


3. 신앙의 경주자인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경주에 참여한 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감당하심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시작점이 되셨고, 장차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의 경주자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시선을 우리 구주 예수님에게로 계속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육상경기에 출전하는 자들이 결승점만을 바라보고 달리듯이, 우리는 신앙의 궁극적 대상인 예수님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눈을 떼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주목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달리는 사람은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환란과 핍박이 닥쳐올 때, 자기에게 손해가 덮여올 때, 자기 힘만 의지하는 사람은 끝까지 달릴 수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환경과 조건을 넘어서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모범을 보이셨으며, 장래의 영광을 위해 눈앞의 고난과 모욕과 조롱과 십자가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신 분이십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경주장에 선 우리에게는 이처럼 훌륭한 신앙의 선진들로 구성된 응원단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증인이 되어 박수를 보내며 응원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불과 130년의 짧은 역사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승리의 경주를 수행하였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도 예수님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이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바통을 쥐고 달리고 있는 신앙의 경주자로서의 자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경주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겉옷들과 얽매이기 쉬운 죄들을 던져버렸습니까? 그리고 우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날마다 바라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그동안의 경주의 기록은 어떠했으며, 지금은 어떤 목표를 갖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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