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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건강한 사랑, 고장 난 사랑 (마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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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사랑, 고장 난 사랑 (마 5:43-48)

평생 사기를 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반평생을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사기 칠 기운조차 없을 정도로 늙어버렸습니다. 감옥에서 출감하면서 그는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이번에 출감하면 다시는 들어오지 않으리라.’ 그는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습니다. 
  
교도소 문을 나서는 날, 그를 맞이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가족은 물론 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곤 평생 사기 치는 것뿐이었으니, 그 누가 그의 출감을 반겨주겠습니까? 그런데, 꼬마아이 하나가 달려와 “할아버지!”하고 부르면서 그의 품에 안겨왔습니다. 할아버지는 꼬마에게 “얘야, 난 너 같은 손자가 없단다.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로구나!”하고, 그 품에 안겼던 아이를 놓아주었습니다. 
  
그 때, 젊은 부부가 다가와서는 “아버지, 고생 많으셨지요?”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젊은 부부에게 “누구십니까?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난 가족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젊은 남자가 묻습니다. “김순임 씨를 아시지요?”
  
김순임 씨는 할아버지가 30년 전에 1년 간 동거했던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와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까지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그 아들이 자라서 손자를 낳아 교도소를 나서는 아버지를 맞이하러 왔던 것입니다. 
  
그 아들이 말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교도소에서 나오기만 해봐라. 그 즉시 죽여버리겠다.’고 굳게 결심하고서 칼도 준비해놨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아이를 키워보니, 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따뜻하고 행복한 가정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아버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동안 고민을 하다가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서, 이렇게 아버지를 마중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평생 맛보지 못한 가정의 소중함을 아버지도 느낄 수 있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그 할아버지를 자기 집에 모시고 갔습니다.

여러분, 30년 전에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서 원망스러운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과 그 원망을 풀고 사랑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 어느 것이 더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미운 감정을 가지고 살면 그 미운 마음이 평생 자신을 괴롭히는 칼날과 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미운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미운 마음을 갖고 있는 자기 자신이 더 큰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죄악에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감정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그런 미움과 원망을 풀지 못하도록 우리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빨리 풀어내야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데, 우리의 감정은 그것을 풀어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죄악에 종노릇하는 우리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읽는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또 실천할 수도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이웃만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세리나 이방인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그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 자연인의 감정의 지배 아래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 자연인처럼, 자연인의 감정에 지배받는 사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해야 합니까?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도 복을 비는 기도를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축복해주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축복의 기도를 해주는 사랑을 우리는 ‘아가페의 사랑’ 또는 ‘신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과 같은 사랑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고, 감정에 따라 좌우되는 사랑이 아니고, 어떤 형편이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사랑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흔히 사랑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가 ‘만약에의 사랑’입니다. ‘네가 만일 나를 사랑한다면 나도 너를 사랑하마.’ ‘네가 만일 나를 용서해 준다면 나도 너를 용서해 주마.’ 하는 식의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내가 먼저 사랑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신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누구나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그런 사랑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랑을 가장 저급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아무도 사랑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부가 길을 가다가 할머니가 다리가 아파지자 할아버지에게 업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할머니를 업어 주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등에 업힌 할머니가 미안한 생각이 들어 “영감, 내가 좀 무겁지요?”라고 말하자,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대가리지, 얼굴은 철면피지, 심장은 강심장이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조금 가다가 할머니가 할아버지 등에서 내려 다시 걷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다리가 아파지자 할머니에게 “이봐 할멈! 조금 전에 내가 할멈을 업어 주었으니 이제 나도 좀 업어줘”라고 말했습니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업어주었습니다. 할머니의 등에 업히자 할아버지도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할멈, 그래도 내가 생각보다는 가볍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합니다. “그럼요, 가벼울 수밖에요. 머리에 든 것이 없지, 허파에는 바람만 들었지, 속은 비었지, 양심도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요.”
  
이게 ‘만약에의 사랑’입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창피를 주었으니, 나도 당신에게 창피를 주어야 속이 풀립니다.
  
사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신앙인들조차도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못한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받은 것만큼도 사랑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때문에의 사랑’입니다. 예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때문에의 사랑’입니다. 비록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지는 못했더라도 내가 사랑할만한 어떤 모습이 있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내 입맛대로 하는 사랑입니다. 이건 대상에 따라서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신 그런 사랑입니다. 형제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형제가 아니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랑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나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만약에의 사랑’이나 ‘때문에의 사랑’을 뛰어넘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바로 세 번째 사랑입니다. 그 세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대상을 구별하지도 않고, 조건을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심지어는 나를 미워한다 하더라도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내가 먼저 다가서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든, 나를 어떻게 대하든 그런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서서 사랑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는 사랑, 그 사랑은 어떤 조건 때문에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받을만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우리는 ‘아가페’라고 합니다. ‘신적인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건 우리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사랑받을만한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셔야 할 정도로 하나님과 원수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한일서 4:10-1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랑에 대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바로 그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옳고 그름을 따져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한량없는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자비하심이 우리를 죄에서도 사랑받은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였고, 그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자비하심으로 사랑을 받았는데, 우리는 우리의 이웃과 형제를 사랑함에 있어서 자비보다는 공의의 잣대를 사용하고 있지 않나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너무 자주 자비가 아닌 공의의 잣대로 판단하고 사랑하려 합니다. 그런데 공의의 잣대로 판단하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공의는 우리를 죄인으로 판결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길을 지나갈 때 한 소녀가 달려와 무릎을 꿇고 울먹이며 탄원합니다. “폐하, 제 아버지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폴레옹이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묻자 소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법을 어겼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그러자 소녀가 흐느끼며 호소합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탄원하는 것입니다.” 침묵을 지키던 나폴레옹이 말했습니다. “네 말에 아버지를 용서하니 돌아가거라.” 
  
그렇습니다. 공의로 본다면 분명 죄인입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며 오늘의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어준 것처럼, 우리 역시 공의가 아닌 자비의 눈으로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자비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지 않고 공의의 눈으로 이웃과 형제를 바라봅니다. 특별히 우리를 괴롭히는 원수나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 앞에서는 더욱 정의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그 정의가 오늘 우리에게 적용된다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정의 앞에 자유로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이 땅에서 정직하게 산다 해도 하나님의 정의 앞에 서면 우리는 수 백 번 죽어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죄를 짓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정의와 공의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데 있어서는 공의나 정의가 앞서서는 절대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처럼 우리는 언제나 자비를 앞세워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원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의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는 말씀에서 “마땅하다”는 말은 ‘진 빚을 갚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며,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진 빚을 갚는 것처럼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빚을 지고서 마음 편안하게 살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빚을 다 갚기까지는 빚에 대한 강박감 때문에 때론 잠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빚을 안고 있는 사람은 그 빚을 갚기 전까지는 그렇게 빚에 대한 부담을 안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랑에 빚진 자들이기에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서 사랑에 부담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사랑에 빚진 자라고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는 말씀은 우리가 사랑에 빚진 자라는 것을 선언한 말씀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붙어있는 한 그 사랑의 빚을 계속해서 갚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할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예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 명령을 제자인 우리가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는 원수까지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정 사랑의 사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성숙한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원수까지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가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한 교회의 지체로 부르심을 교우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가정은 사랑의 체험장이요 연습장입니다. 우리는 가정이라는 사랑의 체험장에서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장 쉽게 사랑을 배울 수 있고,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랑의 훈련소입니다. 가정에서 연습한 사랑에 깊이를 더해 가고 넓이를 넓혀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라는 사랑의 훈련소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사랑의 본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사랑의 구체적인 실습장이요 실천의 장소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메말라 가는 세상에 우리가 체험하고 우리가 느낀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원수까지 사랑하는 성숙한 사랑을 위해서는 가정과 교회라는 사랑의 체험장과 훈련소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연습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성숙한 사랑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사랑은 내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사랑을 받았고, 또 그 사랑을 연습을 했다 하더라도 사랑이 우리의 마음과 삶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체험과 연습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내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 안에 우리를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을 의지해야 합니다.

네덜란드의 부흥 전도자 코리텐 붐(Corrie Ten Boom, 1892-1978) 여사의 간증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코리텐 붐 여사는 2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군에게 쫓기는 유대인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모두 나찌 수용소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수용소에서 끔찍한 고문으로 그녀의 사랑하는 가족은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오직 그녀만이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코리텐 붐 여사는 복음 전도자가 되어 온 세계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독일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고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때 그녀는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하겠으니 그 명령만은 거두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코리 여사를 보내기 원하셨고, 결국 그녀는 독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코리 여사는 가는 곳마다에서 ‘하나님은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설파했고,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지난날 자신의 가족들도 나찌 수용소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고, 자신 또한 비참한 고문과 수모를 당했지만 이제는 독일을 용서하겠노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예배당 문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한 건장한 사람이 그녀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저를 용서해 주시는 거지요?” 코리 여사는 눈을 들어 그 청년의 얼굴을 보고는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수용소에서 자기 가족을 고문하여 죽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옷을 벗겨 말할 수 없는 수치를 주면서 고문을 가했던 간수였기 때문입니다.
  
그 간수를 본 순간 코리 여사는 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고, 도저히 ‘용서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 주위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은 긴장했습니다. 그 때 코리 여사가 조용히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나는 당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에게 당신을 용서하고 사랑하라 하시니 나도 당신을 용서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못 박던 원수를 사랑하셨던 바로 그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실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그 사랑을 늘 가슴 속에 새기며 사십시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실 때 우리는 세상 속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독일의 여성신학자인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 1929-2003)는 ‘형제를 향하여 사랑의 손을 내어밀지 못한 사람은 고장 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혹 지금까지 우리는 고장 난 사람으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사랑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의 애타는 눈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온 적도 많지 않았습니까? 진정으로 건강한 사랑은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언제든지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가 내 사랑하는 형제이든,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든, 아니면 나를 미워하는 원수이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그가 사랑을 필요로 한다면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사랑은 고장 난 사랑입니다. 우리를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 기꺼이 다가가 사랑을 베푸는 건강한 사랑의 사도들로 사십시다. 
  
아직도 미움의 끈에 묶어 사랑의 손길로 다가가지 못한 형제나 이웃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우리를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미움의 끈이 풀려지고, 고장 난 손이 고침을 받아 사랑으로 손을 내미는 사랑의 사도들이 되십시다. 그러면 그런 사랑을 베푼 우리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가 베푼 사랑의 현장에 작은 천국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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