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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내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요 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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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요 4:3-9)


예수님께서 유대 땅을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시던 중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시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이 있는데 주님은 피곤하셔서 그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때는 여섯 시쯤 되었습니다. 요즘 시각으로 낮 열두 시쯤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한 여자가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주님이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그녀가 그렇게 물은 까닭은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예배와 진리에 관한 이야기로 발전하고 마침내 주님이 자신이 바로 그들이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밝히시면서 그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그 이야기의 서론과 같은 부분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바로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기부터 알아야 합니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나중에 기록된 책이 요한복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후 90년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실제로 사마리아를 방문하셨던 때와 그 사실이 기록되었던 때 사이에는 적어도 시간적으로 60년 이상 간격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을 부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북쪽 나라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망한 후 그들은 이방인들과 섞여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면서 멸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후 70년 유대 나라는 또 다시 로마의 공격을 받고 철저히 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아무도 성전에서 제대로 기도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구분이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율법의 요구 조건에 의하면 유대인들도 부정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그토록 경멸하는 사마리아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누가 누구를 향해서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우리 옛말처럼 유대인들도 사마리아인들과 마찬가지로 부정한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이야기를 살펴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성경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로 말미암아 주님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셨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그 후 사도들을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에 의해서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승천하신 그 주님이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제자들은 점점 사라져 가는데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자 교회는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교회를 이탈하는 사람들도 늘어갔습니다. 그 틈을 타서 각종 이단이 교회 안에 침투하게 되었고 교회는 더욱 심한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당국의 핍박과 박해도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오실까?”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실까?” “옛날에 예수님은 병자도 고치셨고 물위도 걸으셨다는데 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우리를 돕지 않으실까?” 자꾸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정말 잘못 믿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에 진짜 심각한 위기가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믿음을 굳게 잡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그 사람들을 가리켜서 요한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막연히 주님의 재림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성령으로 이미 그들과 함께 계시며 친히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이 요한 공동체였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행적을 되새기면서 그 때 그 사건들을 지금의 상황에서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시각과 관점에서 주님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인에 대한 편견을 버렸습니다. 물론 여자 특히 부정한 여자에 대한 편견도 버렸습니다. 요한 공동체에게 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요 또한 천국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여간 예수님께서 수가라는 동네에 있는 우물 곁에 앉으셨습니다. 우물이 어떤 곳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물은 물이 솟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우물 곁에 진짜 생수를 주시는 주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은 목이 마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주님은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셨고 그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받아 마실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받아 누릴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좋은 것을 좀 더 많이 주려는 스승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정오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한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아마 그 동네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물을 길으러 오지 않는 때에 혼자서 물을 길으러 왔다는 것은 그녀가 사마리아인들 중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는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물으셨을 때에 함께 동거하는 남자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없다고 대답한 것만 봐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나치게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도 그녀를 비난하시거나 고발하실 생각은 추호도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이미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도 남편이라고 부를 수 없는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그녀야말로 지극히 불쌍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대꾸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달라고 하는 물은 주지 않고 말대꾸나 하고 있는 시건방진 여자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녀가 말대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 특히 그 눈빛 때문에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사는 동안 그 누구도 그녀에게 그런 눈빛을 보여 준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사마리아인을 경멸하는 유대인들에게서는 더욱 그런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시는 주님에게서 그녀는 우월 의식에 사로잡힌 비판의 눈초리 대신에 진실한 친구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는 사랑의 눈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단순히 말대꾸를 한 것이 아니라 그 주님과 함께 마음을 연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는 주님과의 마음을 연 대화를 통해서 그녀는 참 빛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불행한 삶을 살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게 된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의 만남과 사귐을 통해서 그녀를 가두고 있던 모든 담이 완전히 허물어졌습니다. 그녀는 비로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자기를 따돌리던 동네 사람들에게 자기가 만난 메시야를 빨리 전하고 싶었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달려가서 전했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서 유대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 하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가신 것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을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참 빛을 찾고 거듭난 사람은 먼저 하나님과 더불어 화해해야 할 뿐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화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 옛날 수가 성 우물 곁에서 주님을 만났던 여자처럼 스스로 막힌 담을 헐고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목하고 또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한국 전쟁 발발 62주년을 맞으면서 남과 북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과 북은 당연히 화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됩니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으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아니 내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 화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북에 대해서 우월 의식을 가진 채 뭘 좀 주니 안 주니 하는 것은 장차 통일이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가장 큰 부끄러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북에서 숨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적은 수의 성도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더 깊은 교제를 주님과 더불어 나누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은 의외로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주님은 지친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물 한 잔을 달라고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과연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돌리고 모른 척 하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먼저 마음을 열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문제의 근본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주님께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이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하나 되게 하시는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온전히 변화되어 이 땅 위에 사랑과 평화와 공의가 넘쳐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복되고 충성스러운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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