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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요청 (신 1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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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요청 (신 10:12-13)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걸쳐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증언합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하셨는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 인생들이 불행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행복을 소원하고 실제로 행복을 얻기 위해서 힘씁니다. 그러나 정작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무지개에 비유합니다. 무지개는 비가 갠 뒤에 태양의 맞은 편 허공에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냅니다. 누구나 한번쯤 무지개를 손으로 잡아 보고픈 욕망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개를 만져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지개에 한발 다가서면 무지개 역시 그만큼 한발 물러섭니다. 사람들은 행복이 마치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만약 이 말이 진실이라면, 행복을 얻기란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면에서는 맞습니다. 만약에 행복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또는 외부의 무언가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참 행복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행복은 우리에게 무지개와 같이 막연한 동경의 대상으로 머물고 말 것입니다.

진실한 행복은 내면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형편이나, 사회적인 성공이나,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호화 저택에서 살면서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사글세방에서 살면서도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처럼 행복은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내면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에 근거해서 행복의 비결을 말씀해 드림으로써 성도님들과 더불어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첫 번째로, 행복은 하나님과 화해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본문에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사람은 곧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사람의 본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본분을 지킬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 명령을 불순종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고도 행복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그 원인이 다른 데 있지 않고 죄에 있습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입니다. 우리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내 뜻대로 행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이것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죄악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에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곳은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으며, 생명나무를 비롯해서 먹기에도 좋고 보기에도 아름다운 과목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사자와 어린양이 장난치며 함께 뒹구는 낙원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때에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친밀한 교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뵙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덴의 행복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함으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담에게 명하시기를 “16)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으나, 아담과 하와는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말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나자 그만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고서 하나님 뵙기를 두려워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에덴동산에 살면서도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행복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에덴도 더 이상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불화하게 만들고 우리 삶속에서 행복을 빼앗아 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살인과 분쟁이 어디서 생겨난 것입니까? 대체로 사람들은 불행의 원인을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기를 좋아합니다. 법을 어기고 감옥에 가게 되면 이 사회의 부조리가 나를 범죄로 내몰았다고 말합니다. 또는 성장기의 환경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말이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원인이 되지는 못합니다. 모든 불행의 일차적인 원인은 하나님께 대한 나의 영적 상태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해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더불어 화해를 할 수 있을까요?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과 불화하게 된 원인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곁을 떠났기 때문임을 알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우리에게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며 불화한 관계를 청산하시고 화목한 관계가 되게 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며칠 뒤에 둘째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나라로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면서 그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그러고 나자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서 이 아들은 극도로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들에서 돼지치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보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나누어 먹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나마 배불리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제야 이 아들은 정신이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도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기를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노라”고 했습니다. 

이 아들의 불행은 아버지의 집을 떠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아들은 자기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했지만, 그 결과는 행복과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가 도착한 종착역은 굶주림과 헐벗음과 멸시와 돼지만도 못한 생활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 아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삶은 돼지와 더불어 쥐엄 열매를 다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이 허기를 면치 못했듯이, 하나님을 떠난 심령은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을 싫어해서 집을 떠났으나 그 대신 인정도 눈물도 없는 주인을 만났습니다. 그를 고용한 돼지 농장의 주인은 마귀를 의미합니다. 마귀는 이 죄악 세상의 임금으로서 그가 사로잡은 자들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와 같이 기꺼이 죄인을 영접해 주십니다. 

이사야서 1장 18절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항상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살 때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마치 그릇과 같습니다. 그릇에 무엇이 가득 담겨 있으면 다른 것을 담을 수 없습니다. 먼저 담겨 있던 것을 비워야 새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비우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비웠으면,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실 수 있을까요? 에베소서 3장 17절에 이르기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고 하였고, 요한복음 1장 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곧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죄를 뉘우치지만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겠는데, 그러면 세상 재미를 포기해야 한다고 하니 망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하면 머지않아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눅 11:24-26)고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까지나 빈 상태로 남겨둘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든지, 아니면 마귀를 주인으로 삼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것은 곧 마귀에게 마음의 보좌를 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마귀가 마음을 점령하면 어떻게 될까요? 로마서 1장 29절로 31절에 보면, 하나님을 모시기를 싫어하는 자들의 상실한 마음 상태를 이같이 말씀합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여기 언급한 온갖 추악한 생각들이 마음에 가득하고서도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57장 21절에 이르기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지 아니한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는데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원 둥지에서 잘려나간 가지도 얼마 동안은 꽃을 피웁니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는 오래 못가서 시들어 죽고 맙니다. 

그 이유는 계속해서 진액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셔 들인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을 때 주님의 풍성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한 때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귀신들을 내쫓아 온전케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온전히 주님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복스런 결과가 생겨났습니까? 인생의 밑바닥까지 타락했던 막달라 마리아가 시대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존경받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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