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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 훈련 (롬 12: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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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훈련 (롬 12:17-21)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원수 갚은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 평화 없는 세상

교우 여러분,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평화 없는 세상, 안식 없는 세상에 사느라 얼마나 힘겨우십니까? 단 하루만이라도 세상 걱정 다 내려놓고 지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가끔 근심걱정 없어 보이는 아기의 얼굴을 보면 참 예쁩니다. 그 적당히 권태롭고 무심한 얼굴을 보노라면 ‘넌 참 좋겠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세상 소식을 접할 때마다 제 귀에 이명증처럼 들려오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괴로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경쟁과 갈등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우리는 잔뜩 긴장한 채 살아갑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이 다 화가 난 것 같습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항상 화를 낼 준비태세를 갖추고 살아가는 이들을 대할 때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완강하게 소통을 거부하는 그들의 표정과 몸짓을 대할 때면 벽 앞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도시는 사람들의 마음을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기타줄처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언제 ‘탱’ 소리와 함께 끊어질지 모릅니다. 말도 참 모질고 거칠어졌습니다. 비난하고, 빈정거리고, 냉소하고, 모욕하고, 폭언을 퍼붓고…. 그 속에 살면서 우리는 지쳤습니다.

마음이 좀 느긋한 사람, 어떤 상황이든 수굿하게 대처하는 사람, 정 깊은 사람과 만나고 싶습니다.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치유받은 느낌이 들지 않던가요? 주님은 우리를 그런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하지만 삶이 각박해질수록 우리 마음은 악에게 끌립니다. 상처를 받은 만큼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하얀 접시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그것을 깨뜨리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꿈을 꾸었습니다. 내 속에도 풀리지 않는 괴로움이 있었던가 봅니다. 자기 속에 화가 잔뜩 쌓일 때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 욕을 내뱉기도 합니다. 그러면 조금은 후련해진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게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말합니다. ‘惡’이라는 글자는 亞와 心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亞는 무덤의 외형을 그린 그림 글자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악이란 결국 남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인 셈입니다. ‘惡’이라는 글자는 또 흉한 일, 재난, 더러움, 병 등의 뜻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것은 모두 사람들이 회피하고 싶어하는 것들(우석영, <<낱말의 우주>>, 292쪽)입니다.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는 일을 누군가에게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 곧 악입니다. 하지만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남도 파괴하지만 자기도 파괴하는 일입니다. 

• 성도의 지향

바울 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보기에 선한 일을 하려고 애쓰라고 권합니다(17).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만 잘 다스려도 우리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여기에 선한 일을 하려고 애쓰려는 마음의 지향이 있다면 더 좋겠지요. 존 웨슬리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감리교도들에게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장소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시간에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오래 오래.

물론 늘 이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그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지향만 분명하다면 너무 자책할 것 없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성도들에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고 말합니다.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살다보면 우리 비위에 맞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 용서해도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마음으로 제쳐놓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용서는 현실이지 관념이 아닙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참회가 전제되지 않는 용서의 선언은 자칫 자기 속에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는 바울 사도의 권면을 심상히 여길 수 없습니다. 바울은 왜 이런 어려운 주문을 해서 우리를 당황시키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자유를 누리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나 불편하게 여기는 마음을 극복하지 못하면 그 마음은 우리에게 짙은 그림자로 남고, 그 그림자는 반드시 우리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화는 어떤 것일까요? 평화 노래꾼인 홍순관 집사가 여러 사람들에게 평화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보내온 답이 참 재미있습니다. (홍순관, <<춤추는 평화>>)

-“불화와 싸워 이긴 전리품.”(만화가 박재동)
-“누구도 제 빛깔 잃지 않고 조화롭게 하나 되는 조각보 같은 것.”(판화가 이철수)
-“평화는 나눔(share)이고, 안아줌(hug)이다.”(가수 윤복희)
-“평화는 흔쾌하게 손 내밀고 기분 좋게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마음을 여는 것.”(도법 스님)
-“평화는 기도이고 몸과 마음의 담을 허무는 것.”(북일리노이주 감독 정희수)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게 평화다. 그러나 저절로 오는 평화는 없다.”(강정마을 지킴이 문정현 신부)
-“평화는 비싸다.”(영화감독 최동훈)

모든 답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타자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수용하는 것, 그리고 그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곧 평화의 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마음을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마음 깊이 자각할 때 우리 속에 이웃들을 위한 여백이 커집니다. 

• 예수의 평화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로마의 평화와는 다릅니다. 로마라는 절대 강자가 지중해 세계를 다 장악하고 있던 그때 로마의 귀족들과 시민들은 식민지에서 거둔 막대한 세금과 노예노동을 통해 호사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구조를 떠받치기 위해 동원되는 사람들의 삶은 곤고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이었습니다. 고통이 누적되면 무감각해지거나 내면에 분노가 쌓이게 마련입니다. 

예수 시대의 민중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았고 또 어떤 이들은 무력항쟁을 통해서라도 로마를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진정한 해결책일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운동은 제3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는 병든 이들을 고치고, 낙심한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음으로써 삶을 경축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무기력에서 벗어나 벗들과 함께 하는 가슴 벅찬 삶으로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평화는 그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예수님은 로마에 대한 무력항쟁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그는 열심당원 출신 제자들에게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지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이브한 평화주의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삶과 세상의 근본을 바로 보도록 도왔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권력을 교체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자기 힘과 능력을 알아차리는 데서 오는 것임을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증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적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의 길, 그 길은 어리석은 길입니다. 자기를 희생할 각오가 없이는 가기 어려운 길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의 길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조롱하는 무리를 보며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예수님, 폭력의 고리를 사랑으로 끊어내신 분을 보고 백부장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이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었다’(눅23:47) 하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는 최후의 순간에도 자기다움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게 진정한 혁명이 아니겠습니까?

• 원수를 없애는 길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꼭 붙들어야 할 삶의 지침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21)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마음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이를 데려오십시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솔직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아뢰십시오. 왜 그를 용납하기 어려운지를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내려놓는 순간 치유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오래도록 귀를 기울이십시오.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은 자기 속에 어떤 힘이 불어넣어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 다음에 할 일은 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돕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율법의 가르침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사실에 놀랍니다. 율법은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거든, 반드시 그것을 임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눌려서 쓰러진 것을 보거든,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 주어야 한다.”(출23:4-5)

이게 참 재미있습니다. 삶의 곤경은 원수와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합니다. 어려움을 함께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은 곧 그 사람의 머리 이에 숯불을 쌓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상황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떼제 찬양이 있습니다. 간결하지만 핵심을 꿰뚫고 있습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하나님께서 계시도다”. 교회는 평화를 배우고 익히는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고 마시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으로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는 분열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주님은 자기희생 없이는 평화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의 산 증거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평화 나누기>를 되새겨봅니다.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 

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일을 더 잘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좀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는 것 
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

남과 북, 노동자와 사용자, 여당과 야당, 부자와 가난한 사람,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갈등이 날로 깊어가고 있습니다. 평화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낯선 시대입니다. 하지만 평화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 이들은 이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사랑에 근거한 삶이 가능함을 실증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 바로 그곳이 우리가 평화의 씨앗을 파종하라고 보냄을 받은 자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속에 먼저 평화가 깃들고, 또 우리 주변으로 평화의 기운이 번져갈 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2주년을 맞이하는 이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그런 바람의 대언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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