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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라 (마 26: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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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라 (마 26:14-25)

먼저 옆 사람과 인사합시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젊은 연인들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라고 “아인슈타인” 우유를 먹여 키웠습니다. 

근데 이놈이 초등학교 다니는데 영~ 세계적 인물은 못될 것 같아서 우유를 바꿨습니다. 
서울대학이라도 가라고 “서울 우유” 로 바꾸었습니다. 

근데 이놈이 중학교를 가니 서울대도 가기 힘들듯 합니다. 
아쉽지만 한 단계 낮춰야 할 것 같아 우유를 바꿨습니다. 연세대는 가야해서 “연세우유”로요.

근데 아무리 봐도 실력이 택도 없어 마음을 더 비우고 더 낮춰서 건국대학이라도 가라고 "건국 우유"를 먹였습니다.

그런데 이놈이 고등학생이 되니 건국대 근처도 못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유를 바꿨습니다. 
어떤 유유일까요? “저지방 우유” 랍니다. 

저어~~쪽 지방에 있는 대학이라도 붙어주길 간절히 기원하면서~~~

이것은 그저 유머입니다. 특정대학을 비하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유머일 뿐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늘 깊이 살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는 몇일을 말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신 말씀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우리 하나님은 한번 실패하고 잘못했다고 포기하시거나 폐기처분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연약합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하나님이 우리가 잘못할 때 즉각 심판하시고 버리신다면 우리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봉독한 본문을 통해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길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비록 실수를 하고, 죄를 지었어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회복하여 사용하길 원하십니다. 한마디로 다시 돌아 설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할렐루야!  

우리는 흔히 가롯 유다는 나쁜 놈이고 베드로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두 사람은 똑같이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의 배반이 가롯 유다의 배반보다 가벼운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마26:71절 이하를 보세요.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이런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렇지만 굳이 구별해 본다면 가롯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배신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가롯 유다의 제일 큰 문제는 우리 하나님을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다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실패했던 사람도 다시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롯 유다가 그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또 가롯 유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죄악을 위함인 것을 모르고 도리어 부끄러움과 수치로 여겼습니다. 그 결과 가롯 유다는 주님이 자신을 찾아오기 전에 밧줄에 목을 매고 자살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다시 주실 은혜의 기회를 놓쳐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주님의 용서를 알았고 의지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추악한 죄악을 보면서 통회하며 울부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의지하며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 증거가 뭐냐고요? 

베드로는 처음에 엄청나게 낙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면서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17절을 보세요.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이 ‘사랑’ 질문은 책망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회복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찾아오셔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죄를 지어도 공동체인 교회를 떠나면 안됩니다. 회개하면서 그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돌이킬 기회는 여러 가지 형태로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사건으로 찾아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한량없는 은혜로 찾아옵니다. 둘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우리는 마가라는 사람을 잘 압니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입니다. 

마가가 살던 예루살렘의 집은 상당히 큰 집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 있었으니 얼마나 큰 집이었을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마가의 삼촌이 그 유명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교회에 자신의 땅을 팔아 바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마가 요한’ 때문에 바나바와 사도 바울이 대판 싸웁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를 담임목회를 하고 있을 때 다소 섬에 쳐 박혀 있던 사울을 찾아가서 데려와 사역자로 세운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께서 이 두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담임목사격인 바나바와 전도사격인 사울이 같이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것입니다. 이때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요한도 그 팀에 합류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선교 여행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마가가 중도 포기하고는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추측컨대 선교 여행에 재미가 없었든지, 아니면 복음 때문에 당할 핍박이 두려웠는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삼촌 바나바보다 사울인 바울이 더 주도권이 가지고 사역하는 것을 두고 보기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가의 중도 포기로 인해 이 선교 팀이 많이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선교 여행을 진행했고 무사하게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차 선교여행이 마친 얼마 후,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제 2차 선교 여행을 계획합니다. 이때 바나바가 다시 ‘마가요한’을 데려가자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그를 데리고 가냐고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그런데도 바나바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결국 마가 때문에 둘이 서로 대판 싸우게 되었고 팀이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조카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2차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성도 여러분! 
문제는 그 후 이 마가요한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 이후 마가를 영원히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신약성경에 바울 서신서들을 보면 아주 놀라운 기록들이 나타납니다. 

그런 사건이 있은 지 15년 후,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마가를 언급합니다. 그리고는 바울의 목회 사역을 마가요한에게 넘겨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4장10절에는 마가가 ‘바울과 함께 옥에 갇혀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마가를 사도바울만큼 영접’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또한 빌레몬서 1장 24절에는 마가를 ‘동역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11절을 보면 마가를 보고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마가를 버리시지 않았고 그를 바나바를 통해 회복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회복된 마가를 동역자로 여기고 사랑하고 아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가 그 위대한 마가가 된 것입니다.   

그는 첫 선교여행은 실패했습니다. 어찌 보면 중요한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바나바를 통해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었고, 결국 사도 바울도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그를 통해 마가복음이라는 거룩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물론 그 기회가 때로는 전혀 기회처럼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이제 죽었구나 하고 절망의 기회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요한 때문에 대판 싸우고 팀이 갈라질 때도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기회를 통해 마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닥치는 환난이나 고난, 그리고 어려움이 단순히 우리가 망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것이다. 

롬8:28을 아시지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질병이 기회일 수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기회일수 있습니다. 원하던 대학에 떨어진 것이 기회일 수 있습니다. 부도가 기회일 수 있고 직장에서 명퇴당하는 것이 기회일 수 있습니다. 

내 생각대로 안 되었다고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을 때에도 반드시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세겔을 받고 팔기로 하고,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가 주님을 배신할 기회를 찾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21절 이하를 보세요.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예수께서 식사하실 때에 일부러 말하십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유다가 듣도록 말하십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은 근심했습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주님, 저는 아니지요?”라고 묻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팔리라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제가 좋을 뻔 했느니라” 하십니다. 

이 정도면 유다가 “주여, 죽을죄를 졌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세요” 하고 자수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안합니다. 그리고는 나가서 예수님을 팔아버립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의도가 뭡니까? 
단순한 경고가 아닙니다. 배신할 놈이 누군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을 배반하려는 가롯 유다를 알고도 끝까지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다는 기회를 발로 차버립니다. 그러고도 “나는 아니지요?” 라고 묻습니다. 그때 주님은 침묵하지 않고 “네가 말하였도다” 하십니다.   

어떻게 이렇게 철판을 깔고 있을까요? 이미 그 마음이 마귀에게 먹힌 것입니다. 
자세히 보세요. 그는 예수님을 뭐라 부릅니까? 25절에 “랍비여” 라고 부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주여” 라고 부르는데 유독 가롯 유다만 “랍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으로 메시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배경은 그 속에 사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13:2절을 보세요.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또 눅22:3절에도 보세요. 
“열둘 중의 하나인 가롯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마귀가 처음에는 생각을 넣고 그 다음에는 아예 그 속에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명심할 것은 가롯 유다는 주님 곁에 늘 있었습니다. 
그는 늘 주님과 함께,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교회를 열심히 나오고, 새벽기도까지 나오는 열심이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안에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단이 이를 이용해 넘어트리려고 온갖 짓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조금만 방심하면 넘어지고, 조금만 방심하며 사탄의 종노릇을 하면서도 그것을 미처 모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 잘못하고 있는 죄가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하고 근신해야 합니다. 

근신이 뭡니까? 자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있지는 않는지,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혹, 여러분 중에 죄 가운데 있다가 기회를 놓친 사람이 있습니까? 
혈기 때문에 또는 무서운 죄로 인하여 기회를 놓친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정죄한 자가 어디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마라.”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시는 조건은 다시는 죄를 범치 않는 조건으로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기에 기회를 다시 주시는 주님 앞에 다 내려놓을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분에게 이 시간 기회를 주셨습니다. 지금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주님 앞에 엎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을 지낼 곳을 준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 18절에 보세요.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성안 아무에게 가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아무”는 무슨 뜻인가요?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불특정 다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나 만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아무에게”는 “어떤 특정 인물”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요한도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했고 마태도 자기 이름을 숨기고 기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마가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미 주님께서 마음에 정해놓으신 사람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집은 마가요한의 집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아무” 는 마가의 부친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 주님은 어떤 사람을 지정해서 그에게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주님은 늘 여러 사람에게 섬길 기회를 주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당나귀의 주인에게 섬길 기회를 주십니다. 
또 마리아에게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십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우리 주님은 그것을 만류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에게도 마태에게도 주님은 그 집에 찾아가셔서 일부러 섬길 기회를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 자기의 무덤으로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셨습니다.
 
제가 목회를 할 때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목사에게 식사를 대접을 하려 합니다. 그러면 제가 대접 받고 고맙다고 말하면 그분들이 오히려 “식사를 섬길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분들은 저를 섬기면서 주의 종을 섬기니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길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과 세상 사람들이 다릅니다. 
우리 성도는 자기시간과 자기 돈으로 교회 봉사를 하면서도 오히려 자기에게 봉사할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 봉사가 주님을 섬기라고 주신 기회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러나 세상 사람은 봉사 좀 하라면 “얼마 주는데요?” 물어봅니다. 삯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입니다. 

교회 식사 봉사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집에서 밥하고 설거지 하는 것도 힘든데 교회 와서도 기쁨으로 합니다. 그게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헌금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주님께 드리는 것이고 주님나라를 위해 쓰이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드리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목사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성도들이 직장과 가정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교회봉사활동까지 하라니, 너무 뻔뻔한 것은 아닌가?”하고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미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봉사와 섬김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복 받는 것은 교회나 목사가 아닙니다. 복은 섬기는 그 사람 자신입니다. 그러니 일부러 섬기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엡4:12절을 보세요.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목사의 일 중에 성도에게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 목사의 임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을 잘 시키고, 잘 부려먹어야 목회를 잘하는 것인데 저는 그것을 잘 못합니다. 그래서 목회를 잘 못하는 것 아닌가 고민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유를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   

그렇습니다. 봉사를 함으로 유익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받는 사람보다 베풀고 나누는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베드로처럼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주님의 복을 누릴 기회를 주십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사단이 기회를 잡아 우리를 넘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봉사와 섬김도 하나님이 복 주실 기회입니다. 마가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다락방을 내어 놓아 마가가 복을 누렸던 것처럼 여러분도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은 곧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갚으시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인생에 복이 되고 그 섬기는 일은 주님께 쓰임 받는 일이며, 동시에 내가 복 받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봉사할 수 있을 때, 섬길 수 있을 때, 헌신할 수 있을 때 놓치지 말고 나서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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