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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수기도의 축복 (막 1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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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기도의 축복 (막 10:13-16)

 
내 용 

오래 전 일인데 제가 LA에서 목회할 때 한인사회 뿐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 터졌습니다. 아마 그 당시 일주일동안 미국 언론이나 한국 언론이나 할 것 없이 톱뉴스로 연일 보도했습니다. TV, 라디오, 신문 모두 특종 기사로 보도해서 모두가 알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내용이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안수기도를 받다가 죽었습니다. 몸이 건강치 않은 어떤 여인을 위해서 어느 목사가 기도를 해주었는데 기도 받는 도중에 숨을 거두어서 이것이 사건화 되어서 살인 행위로 보고 경찰이 수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를 해준 목사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선교 사역을 한 선교사 목사이고 기도를 받은 여인도 남편과 함께 오랫동안 방글라데시에서 선교사 활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서로 친한 사람들이었고 동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기도를 받던 그 현장에는 죽은 여인의 남편도 함께 있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터지니까 모든 언론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요소로 방송을 하고 “이게 기도냐?” 톱뉴스로 보도를 하는데 LA 교계는 이것 때문에 아주 시끄럽고 대단한 관심거리로 등장되었습니다. 

생방송으로 뉴스 보도가 나갔습니다. 저는 그 사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인데 어쩌다 그 사건의 중심인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언론과 수사 기관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신학적 대답을 해달라고 저에게 요청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전화가 걸려 와서 생방송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별안간 저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사건 이야기를 하고 “언론을 보셔서 다 아시겠지만 이 사건에 대한 목사님의 해답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전국에 생방송으로 나가는데 그런 어려운 질문을 조리 있게 말 정리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지 않습니까? 생각할 여유도 없이 별안간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전화를 해서 이 문제에 대해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질문은 누구든지 부담스러워 합니다. 얼떨결에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는 매장 당합니다. “이필재 목사는 이단성이 있다. 그런 문제를 그렇게 말하느냐?” 당장 지적을 받게 되고 법적으로도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게 지금 살인죄냐 아니냐 하는 하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일이니까 굉장히 힘듭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목사가 이렇게 기도하다 생긴 문제를 “나는 그런 것은 잘 모릅니다.” 이렇게 시치미를 떼면서 “다른 데 알아보십시오.” 한다면 언론은 이렇게 기사를 씁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필재 목사에게 물었으나 대답을 회피하고….” 그래도 교계의 큰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비중을 두고 이런 문제의 해답을 구했는데 모른다고 하면 우선 우리 교인들도 ‘우리 목사님은 잘 모르는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을 할 것 같고 품위가 망가진단 말입니다. 

여러분도 별안간 카메라를 가져다 대고 말하라 해보십시오. 얼떨떨합니다. 알았던 것도 다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제가 이 일을 만나 차분하게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서 정리를 잘 해서 생방송을 내보냈더니 그 방송을 듣고 즉시로 LA 경찰국 수사관 5명이나 저에게 왔습니다. “당신이 여기에 대해서 정리를 했으니까 구체적으로 이제 정리를 해주십시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우선 죽은 시체 사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공개하지 않는 것인데 목사님 앞에서만 이렇게 공개하고 여기에 대해서 판단을 정확히 해주십시오.” 그러면서 죽은 여자 알몸 사진 수십 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이 사진을 보고 기도가 어떤 것인지 결론을 내려주십시오.” 사진을 보니까 맞아서 장기 파열로 죽은 것입니다. 어쨌든 목에서부터 발목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이 온 몸 전체가 새까맣게 멍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이게 기도입니까? 안수 기도를 이렇게 하는 겁니까?” 수사관들이 “당신도 이런 기도를 해보셨습니까?” 이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이야기는 “이렇게 기도한 목사를 만약 살인죄로 기소하지 않으면 또 사람을 죽입니다.”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게 기독교입니까?” 그러면서 저더러 결론을 내라고 하는데 이때 말을 잘못했다가는 큰일 나는 것입니다. 속으로 ‘세상 말로 재수 없게 걸린 것인가? 어쩌다 나한테 와서….’ 제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남편도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동료들입니다. 서로 잘 알고 친한 사람들입니다. 선교사들입니다. 절대 기도한 사람은 이 여자를 살인할 마음이 0.1퍼센트도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서로 친한 사이인데 왜 괜히 사람을 죽입니까? 다만 기도의 방법이 틀린 것입니다. 법적인 죄를 묻는다면 이것은 과실 치사입니다. 죽일 마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당신들이 이것을 살인죄로 기소한다면 투쟁하겠습니다. 

왜 저한테 물으셨지 않습니까? 저는 이 일을 처음부터 관계한 사람으로서 이것은 절대 살인죄가 아니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바라던 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해결이 잘되었고 그 사람은 교계에서 다시는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고 일이 마무리 되었는데 우리 한국에서 사용된 이상한 기도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안찰 기도’라는 것입니다. 안수 기도 받다가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안찰 기도 받다가 죽은 사람은 여러 사람 있습니다. 

안수 기도는 성경에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안찰 기도는 없습니다. 안찰 기도는 몸속에 귀신이 들어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을 고통스럽게 하면 그 귀신이 견디지 못하고 나간다는 신학의 기초를 가지고 그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방법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손과 주먹으로 신체 부분을 때리면서 하는 기도입니다. 살살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비명을 지를 만큼 심하게 때립니다. 이 여자는 맞아서 죽었습니다. 그만큼 때립니다. 사람을 때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을 때린다고 생각하고 때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누릅니다. 신체의 어느 특정 부분에 숨어있다고 보고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누릅니다. 그래서 장기 파열이 됩니다. 막 아파서 소리를 지를 거 아닙니까? 그러면 기도하는 사람이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빨리 나가! 안 나가면 계속 눌러 죽일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기도합니다. 세 번째는 간지럼을 주는 방법입니다. 다 벗겨놓고 양쪽 옆구리에 주먹을 쥐고 막 간지럼을 핍니다. 이게 얼마나 사람 죽을 노릇입니까? 그러면 비명 소리를 이상하게 지를 거 아닙니까? 간지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죽을 거 같기도 해서 “깔깔깔” 이런 소리가 나올 거 아닙니까? 그러면 “이게 귀신의 소리다! 나가라!” 그러면 죽습니다. 한번 받아보시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모든 종교는 거룩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신학의 기초가 건전하지 아니할 때 불행을 초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단순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삼각산에서 밤새도록 철야 기도한 청년들이 장마가 졌는데 새벽에 직장을 가기 위해 내려오는데 계곡에 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거기를 건너가려고 하니까 삼각산 주변에 사는 아저씨가 막 야단치면서 “나는 여기서 사는 사람이다. 

여기 지금 밑에 돌멩이가 굴러서 들어서면 죽는다.” 청년들 셋이 아저씨에게 “아저씨! 예수 믿으세요?” “나는 예수는 안 믿는다. 왜 그러느냐? 이 물과 예수 믿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냐?” “그러니까 모르시면 가만히 계세요. 우리 하나님은 홍해 바다도 가르셨어요. 이 삼각산 도랑물 믿습니다.” 들어서서 셋 다 죽었습니다. 시체는 한강 하류에 가서 건졌습니다. 교회 청년들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잘 나가는 교회 청년들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서 홍해 바다도 갈랐지만 삼각산 도랑물은 안 가르실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 개념으로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일이 내게 일어나야 한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적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기적은 다 있습니다. 왜 기적이 없습니까? 어디에서 기적을 찾느냐가 다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오늘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고 앉는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날마다 기적이 있는데 보지는 못하고 다른 데서 자꾸 찾고 있으니까 문제인 것입니다. 

인천 지역에서 아마 제일 큰 교회일 것입니다. 그런 교회의 목사님이 LA에 오셔서 연합 집회를 인도하신 적이 있는데 그분이 강사이시고 장소가 제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연합 집회를 했습니다. 저에게 사회를 보라고 해서 사회를 봤는데 장소도 크고 교인 동원도 필요하니까 연합회에서 저희 교회로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날 그분의 설교 가운데 들은 것이 있습니다. 안수 기도와 관계된 이야기입니다. 자기 교회 여 집사님이 안수 기도를 해달라고 하셔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기도를 해주게 되었는데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안수기도를 빡세게 해주세요.” 그래서 생각을 하셨답니다. ‘지금까지 내가 드린 기도는 물게 기도를 했나보다. 모르겠다. 해달라는 대로 해야지.’ “그래요. 앉으세요.” 그래서 두 손으로 빡세게 하기 위해 머리를 팍 움켜잡고 말의 억양도 세게 해서 어찌나 세게 눌렀는지 ‘어?’ 기도하는 도중에 머리가 뚝 떨어져 땅에 굴렀다고 합니다. 비명 소리와 함께 “어? 이게 뭐야?” 가발이 벗겨졌답니다. 내가 그 날 들은 소리입니다. 복음의 시작 때는 기도로 병이 낫습니다. 지금도 복음이 처음 들어가는 곳에서는 기도해서 병이 잘 낫습니다. 제 친구 선교사 한 명은 그래서 그 재미를 느껴서 선교지를 자꾸 옮겨 다닙니다. 

“Healing Ministry”라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이 처음 들어가는 곳은 복음이 빨리 확산되어야 하니까 하나님이 영적인 은혜를 많이 주십니다. 그래서 병자가 일어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런 일이 드뭅니다. 초대 교회와 같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옛날에는 인간을 질병에서 구원하는 일이 그 길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미신이 많이 생긴 것입니다. 오늘 날에는 성직자 몇 사람이 그 많은 사람의 그 많은 병을 쫓아다니면서 기도를 해줄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과학이라고 하는 의학의 은혜를 인간에게 주셔서 병원을 많이 만들어서 지금은 그 길을 통해서 치료를 받지 않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열어주신 기적의 한 파트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질병자들에게 항상 기도해주시면서 부탁이 “너는 나가서 말하지 마라. 아무에게도 이 말을 하지 마라.” 그러셨습니다. 왜 그게 선전해야 될 일이지 감출 일입니까? 예수님의 목적이 영혼 구원을 해서 모든 사람을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 목적인데 병 고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실 병 나았어도 또 병이 들어서 죽습니다. 근본 인간의 문제 해결이 있는데 부수적인 사역이 오히려 주사역과 같이 될까봐 “이 말을 하지 마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병자를 보고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문제가 더 큰 문제이니라.” 그러고 나서 그에게 질병 자유를 허락하신 것을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도 귀신을 좋아합니다. 귀신 소리만 들어도 귀신 비슷해집니다. 왜 그런가? 본래 종교가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귀신 종교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마지막에 가고 싶어 하는 길이 샤머니즘에 빠지는, 귀신을 따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성경에 나타난 안수기도의 역사 내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동물 안수가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께 제사 지낼 때 사용한 기도 방법은 짐승을 끌고 와서 제사장이 그 머리에 안수기도를 해줍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사람의 죄를 거두어 동물에게 뒤집어씌웁니다. 출애굽기 29장 10절에 “너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오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할지며” 소에게 안수했습니다. “인간의 죄를 네가 책임지라.” 그래서 인간은 죄에서 벗어나고 동물은 죄가 많아졌습니다. 이 죄 많아진 존재는 살려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이는 것입니다. 피를 흘려서 속죄의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동물 안수 제도가 그래서 있었던 것입니다. 속죄 제물로 사용될 때 안수했습니다. 그 다음에 축복을 위한 안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48장에 보면 야곱이 자기의 두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머리에 손을 얹어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축복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권을 놓고 형을 속여가면서 “이것은 내가 아버지에게 틀림없이 받아야 돼.” 그래서 머리를 써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축복기도가 그대로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말년에 12아들을 앉혀놓고 아들마다 특징 있는 축복을 내려줍니다. “너는 어떻게 될 것이며, 너는 어떻게 될 것이며, 너는 이렇기 때문에 이렇게 될 것이며….” 12명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기도를 하고 끝을 내었는데 그 기도대로 역사가 진행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왜 안수기도가 나왔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적 능력이 임재하는 능력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축복을 빌어줄 때는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고자 하는 사람이 안수기도를 해줄 때 합의해서 아멘으로 성립이 되면 그 축복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적 은혜의 임재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축복 기도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일꾼을 뽑을 때 안수기도를 합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울 때 온 회중 앞에서 여호수아를 나오라고 하고 그 머리에 안수해서 일꾼으로 세웠습니다. 유명한 그림이 있지 않습니까? 사무엘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왕을 한 명 세워야 하는데 다윗의 집을 찾아가서 다윗을 만났을 때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된 사무엘 제사장이 발끝까지 내려가는 제사장 복장을 하고 소년 다윗은 목동 차림으로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 앞에서 앉아 있을 때 사무엘의 오른 손을 그 머리에 얹고 왼손은 하늘을 향해서 기도를 했더니 성경 말씀에는 “이 날 이후 다윗이 신에게 감동된지라.” 그래서 그 기도대로 왕이 되었지 않습니까? 

신약에 와서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뽑을 때 “예수님의 제자 사도들이 일곱 명을 안수하여 집사로 세우니라.” 하나님의 일꾼을 그렇게 뽑았습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안수를 했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안수를 해서 일꾼을 세웁니다. 저도 선배 사도들이 안수기도해서 목사가 되게 했고, 나도 수많은 후배들에게 안수해서 목사로 세웠습니다. 그 다음에는 병자 안수가 있습니다. 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안수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눈이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28장 8절에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환자 안수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바울도 환자는 안수기도를 통해서, 즉 몸을 만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 안수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사도행전 8장 17절에 “이에 두 사도가 저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도행전 19장 6절에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신명기 34장 9절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디모데에게 안수기도해줄 것을 말씀하실 때 “내가 너에게 안수함으로 말미암아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불 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사명감이 뜨거워지게 하기 위하여 내가 너를 안수하여 주었다. 너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여라.”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22절에 보면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안수기도는 해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경솔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와 기도를 받는 자가 하나님의 영적 은혜 속에서 일을 해야지 요즘에는 대형 집회 같은 곳에서 목사들이 한 번씩 머리를 치고 지나가듯이 하는 것은 저는 안합니다. 1대 1로 언제나 안수 기도를 했습니다. 안수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손을 머리에 얹거나 손을 마주 잡거나 아니면 손을 대도 괜찮은 부분에, 상처의 부분에 안수를 하면 됩니다. 안수 기도이든 안수기도가 아니든 목적은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인간의 가장 겸손한 태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거룩을 이 땅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내 기도를 통해서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어떻게 됩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우들에게 부탁은 저 같은 사람은 갈보리교회 담임 목사이니까 여러분의 신앙 지도를 책임졌습니다. 사이비 성격이 있는 집단에 함부로 뛰어 들어가서 안수 받지 마십시오. 문제가 발생합니다. 

많은 경험과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 저런 문제는 목회자들과 상담하십시오. 보통 보면 좀 신앙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이 신학적 비판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 안찰 기도해서 죽은 사람들도 선교의 열정은 있었지만 신학적 비판은 없었기 때문에 죽인 것입니다. 좋은 마음이었지만 방법이 틀리니까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떤 때는 교인들도 목사의 말을 절대로 안 듣습니다. 누구의 말도 안 듣습니다. 자기가 받은 계시대로 합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에 나가면 곤란합니다. 누구의 말도 안 듣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 목사의 신앙 지도를 안 받으려면 교회를 옮겨야 합니다.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비판만 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시작은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예수님께 안수 기도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꾸짖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꾸짖고 오라고 하시며 원하는 자들에게 기도해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 모두 안수 축복기도를 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만이 새벽기도를 다닙니다. 왜 그럽니까? 그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기도 생활을 안 합니다. 그 기도는 언젠가는 다 성취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예수님이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고 우리에게 기도를 해주셨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기도받기 원하는 자의 것이다.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란다.” 기도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 앞에 다 어린아이입니다. 오늘 우리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오늘 교회 나오신 모두에게 주님의 손이 안수하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기도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초월자의 힘을 빌리는 겸손한 신앙 태도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겸손히 머리를 숙여 기도를 하며 기도를 받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는 자나 기도를 받는 자나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임을 선언하는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자리에 머리 숙인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건강의 문제나 앞으로 사역의 문제나 가정이나 어떤 것이라도 주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안수 기도를 받고 응답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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