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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 대처법 (창 4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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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대처법 (창 42:18-25)

요셉의 해몽대로 애굽에는 7년간의 대풍년에 이어, 7년간의 대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흉년은 애굽의 전지역만 아니라, 주위의 다른 나라까지도 확대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가나안 땅에 거하는 야곱 가족들도 심한 기근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야곱에게 들리는 소문이 있었는데, 애굽에는 곡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은 야곱 일가의 생사가 달려 있는 중대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우리 영혼의 양식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영락없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의 양식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성경에서입니다. 야곱이 그의 아들들에게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듯이, 요한복음에 보면 (요5: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했습니다. 금년에는 우리 성도들 다른 어떠한 책보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읽으면 영생을 얻고 죽지 아니할 성경을 많이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베냐민을 제외한 야곱의 열 아들들은 아버지의 분부를 좇아 드디어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모든 백성에게 양식을 팔고 있었는데, 요셉의 형들이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요셉은 단번에 자기 앞에 엎드려 절하는 사람들이 그의 형들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실로 뜻하지 않은 때,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뜻밖의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요셉과 형들과의 만남은 20여 년 만의 상봉이었습니다. 요셉이 17세에 팔려, 30세에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고, 7년간의 대풍년이 지난 후의 만남이니, 그러므로 요셉의 나이 38세가 될 무렵인 것입니다. 형들은 자기들 앞에 있는 애굽의 총리 대신이, 20년 전에 자기들이 팔아먹은 요셉일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을 알아 볼 수 없었지만, 요셉은 즉석에서 형들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 때 소년 시절에 꾸었던 꿈이 성취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단을 향하여 절을 하고, 열 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던 꿈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그 감회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요셉은 당장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형님들 나를 보시오. 내가 바로 요셉이요. 당신들이 나를 팔았지만 나는 이렇게 성공을 했오"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형님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을 해 보면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은 형제들이었습니까? 20년 만에 만나는 혈육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이유는, 형들을 시험함으로써 그들이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진정한 형제간의 재회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온 정탐꾼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말하기를 "아닙니다.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습니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로서 독실한 자니, 종들은 정탐이 아닙니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정탐꾼이라고 누명을 씌우자, 그들은 자신들이 한 가족이라는 것을 힘주어 강조합니다. 어느 누가 한 가족을 모두 정탐꾼으로 보내어 여차하면 모두 죽게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겠느냐?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탐꾼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 왔느니라"고 몰아세웠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첩자로 몰아세운 것은 자기들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서 가족에 대한 말을 하도록 하여 가족에 대한 자세한 안부를 알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의 의도는 적중하였고, 형들은 가족에 대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의 종 우리들은 12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말째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형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말째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이니라" 하면서 그들의 결백함을 증명할 방법으로 막내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3일 동안 형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비록 3일 밖에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들은 옥에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상대방과 똑같은 처지가 되어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요셉의 형들도 이제 요셉의 처지가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들은 동생 요셉이 구덩이에 빠졌을 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요셉은 그 때 앞이 얼마나 캄캄했을까? 그 때 우리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뉘우쳤을 것입니다. 

3일만에 요셉은 형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라고 하면서 형들로 하여금 안도감을 갖도록 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너희 형제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은 명령을 들은 형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야곱이 베냐민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온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불안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일들에 대해서 심한 양심의 고통을 받으며, 자기들의 과거를 뉘우치기 시작합니다. 21-22에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고 하였습니다. 즉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난에 처한 인간의 2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1)고난에 처하게 되었을 때, 원망하고 불평하고, 누구 때문이라고 핑계할 수 있습니다. 재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투덜거릴 수있습니다. 

2)회개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전날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놓고 음식을 먹었을 만큼 잔인하였습니다.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요셉을 깊은 구덩이에 던지기도 하고, 불과 은 20을 받고 미디안 상고들에게 어린 동생을 노예로 팔아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형들이 이제 비로소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하면서 뉘우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한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전 7:14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말씀은, 이때까지 깨닫지 못하던 것을 고난과 역경 중에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고난당할 때 다음 세 가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1)나 자신이 죄인인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고난과 시련의 이유를 밖에서 찾지 말고, 먼저 자신 속에서 찾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곤고함을 당해 보아야 자기의 연약을 알게 됩니다. 

2)고난당하는 다른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는 위로 받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위로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평안할 때에는 남들을 무시하게 되지만, 환난을 당하게 되면 아무래도 수그러지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게 됩니다. 

3)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곤고한 날에는, 괴로울 때에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몸소 고난을 당하셨고, 또 이 고난을 치료하실 수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형들은 요셉이 자기들의 말을 못 알아듣는 줄 알고 있었으나, 요셉은 형들의 말을 듣고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 밖에 나가 울었습니다. 그것은 형들이 뉘우쳐 회개하는 말을 하므로 형들을 용서하는 인간 요셉의 눈물이었고, 이와 같이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밖에 나가서 한동안 울다가 다시 돌아와 형들중에서 '시므온'을 택하여 결박하게 하였습니다. 

아마도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리고 미디안 상고들에게 팔고 할 때, 시므온이 가장 잔인하고 포악했으므로, 그로 하여금 회개케 하기 위함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요셉은 형제들 중에서 시므온 한 사람만을 결박하여 가두고, 다른 형제들에게는 그들의 자루에 곡식을 가득 채우고, 돈도 몰래 다 그 곡물 자루 속에 넣어 주었습니다. 형 들에게 대한 요셉의 은밀한 사랑의 발로인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돈으로 자신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양식을 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의 돈을 돌려주고, 아무런 대가 없이 양식을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께서도 돈 없이, 값없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가나안으로 돌아가던 형들은 곧 이어 또 다른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26-28에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곳을 떠났더니, 한 사람이 객점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 아구에 있는지라. 그가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면서 불안에 떨게 되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은밀한 사랑과 호의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불안해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57:21에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형들은 곡식을 사가지고 와서 아버지 야곱에게 그 되어진 모든 일을 自初至終 다 보고 하였습니다. 아들들의 말을 들은 야곱은 큰 번민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36절에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은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의 말을 듣고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이 모든 일들이 야곱과 그 가족의 이로움을 위해서 진행되는 일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무지와 과오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무지와 신앙의 약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실제로 우리에게 이로운 것을 해로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재의 우리의 많은 고민은, 야곱처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좋으신 계획을 모르는데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이나 건강, 명예나 권세를 생명처럼 귀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떠나가면 죽을 줄 알지만, 그러나 그 때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구원의 순간이요, 축복의 순간이 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그 많은 11아들 중 하나인 베냐민을 잃게 될까 봐 이리도 애타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한분 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 주셨으니, 그 사랑을 어이 다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베냐민을 잃지 않으려고 굶어 죽을 것도 불사하는 야곱을 보면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귀한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1. 야곱은 아들들에게 양식을 사오라 하면서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부지런히 성경을 상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요셉의 형들의 곤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을 보면서, 고난에 처하게 되었을 때 원망, 불평하고 낙담하기보다는, 전 7:14의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말씀대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까?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을 만나면 1)고난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음을 알며 2)고난이 자신의 죄보다는 가볍다는 사실을 깨닫고 3)고난을 통해서 못된 행실을 고치고 4)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이 찾아올 때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친구 되는 한 사람은 어려서부터 산간 지방에서 자라났고 그 지역의 산에 대하여는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미국의 산은 매우 거대하기 때문에 산에서 길을 잃으면 목숨을 잃기 쉬운 것을 잘 아는 그 사람은 당황해졌습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중에 마침 다행스럽게도 산속 오두막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노인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살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노인이 남겨 준 다음과 같은 말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젊은이, 산에서 길을 잃으면 보통으로 사람들이 얼른 내려가서 동리나 길을 찾아야겠다고 산밑으로 내려가는데 그것이 죽는 길이라오. 산중에서 길을 잃으면 반대로 위로 올라가야만 사는 것이라오. 위로 올라가서 지금의 위치를 발견하고 어디에 길이 있는지, 어떤 쪽에 마을이 있는지 분명히 방향을 확인하고 내려가야만 사는 것이라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닥칠 때에 낙심하여 세상으로 내려갈 것이 아니라, 더욱 위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앙망하여 가까이 나가면, 문제와 역경이 전능자의 눈에 의해 해결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신앙은 위로 올라가야만 사는 것입니다. 

3. 야곱이 일의 전모를 모르고서, 사실은 자기를 이롭게 하기 위해 되어지는 일들을 가리켜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고 했듯이, 현재의 어려운 상황만을 보고서, 잘못 판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롬8:28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니라"는 말씀에 아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야곱이 열 한 아들중 하나인 베냐민을 잃을까 봐 그토록 애타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같은 죄인 괴수들을 위하여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하지 않는 자를, 어찌 성도라 하고,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기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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