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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선 여호수아 (슥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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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사자 앞에 선 여호수아 (슥 3:1-10)
 
스가랴 선지자는 여덟 개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중에서 이미 세 개의 환상은 살펴보았고 오늘은 네 번째 환상입니다. 사단은 우리 인간을 공격하는 여러 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쓴 무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죄악을 지어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속임수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 사단은 여호와의 전이 예루살렘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찌 너희를 심판할 수가 있겠느냐며 바벨론에게 너희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짓된 확신을 주었습니다. 

둘째, 죄를 짓고 나면 정죄합니다. 바벨론에서 70년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성전을 지으려고 하자 사단은 죄 많은 너희들이 무슨 성전을 짓는다고 하느냐며 정죄하고 낙심시키는 것입니다. 사단은 죄를 짓기 전에는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다가 죄를 짓고 나면 이제 큰일 났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기 전에는 죄를 짓지 말고 거룩하게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죄를 짓고 나면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단의 전략과 하나님의 은혜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아버지는 여호사닥입니다. 여호사닥은 B.C. 587년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갈 때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B.C. 538년 고레스 칙령으로 바벨론에서 포로로 올 때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아버지도 대제사장이었고 아들도 대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 가나안 입성의 지도자였던 여호수아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여호수아는 바벨론에서 포로로 돌아올 때 총독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백성들을 지도했던 사람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도 여호수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다고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서 예수님의 인준을 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이 여호수아의 우편에 서서 대적을 합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이렇게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데 어찌 이런 사람이 성전을 지을 수 있겠으며 대제사장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사단이 송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 근거가 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28장 2절을 보면 제사장은 거룩한 옷을 지어서 입으라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꾸짖고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여호수아로 하여금 성전을 완공하도록 격려하십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슥 3:8).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 제사장들은 앞으로 오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로서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 있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무엇인가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Ⅰ. 사단은 여호수아를 정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변호하신다 

사단은 우리를 공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호해주십니다. 사단이 여호수아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했습니다. 사단이라는 말 자체가 대적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도 보면 남을 송사하고 고소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단이 뒤에서 조종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이라는 사명을 수행하려고 예수님의 인준을 받으려는데 사단이 나서서 여호수아는 더러운 존재이므로 성전도 지을 수 없고 대제사장의 업무도 수행할 수 없다고 송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기 전에는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 같은 존재였습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사 64:6). 

우리가 아무리 의롭게 살았다고 해도 모두 더러운 옷을 입은 것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전적으로 인간은 타락된 존재입니다. 이런 사단의 송사를 부인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데 갈아입을 옷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여호수아에게 소망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첫째, 사단을 책망하시고 둘째, 여호수아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을 책망하시는 내용은 사단이 입이 10개라도 대답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슥 3:2). 

하나님께서 사단을 책망하시는데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택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유다 백성들을 택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을 책망하시는 근거는 전능하시고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택하여 대제사장 일을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목적은 온 인류를 멸망시키고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목적은 온 인류를 다 망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 인류를 다 구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온 인류를 구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은혜가 없다면 아무도 사단의 송사를 견뎌낼 수가 없고 죄 용서를 받을 수가 없으며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3).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책망하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를 향해 긍휼도 베풀어주십니다. 스가랴 3장 2절 후반에 보니까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에 그슬려서 사라질 위기에 있는 여호수아를 건져내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은 존재입니다. 이 불은 지옥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이미 빠져있는 사람을 건져내시지 않습니다. 지옥에 간 사람은 갈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간 것입니다. 이 불은 죄악의 불입니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는 징벌의 불입니다. 하나님이 죄악의 불 가운데 있는 여호수아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불 속에 타고 있는 나무를 건져내려면 하나님 자신도 그 손을 불 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 수난의 불을 지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악의 불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스가랴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가 두 가지로 상징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슥 3:8). 
 
첫째, 메시야를 순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순은 왕으로 오는 순이 아니고 종으로 오는 순입니다. 이 순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에서도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종종 나옵니다. 다 죽은 것 같았던 다윗의 뿌리에서 새로운 순이 나와 싹이 나고 열매를 맺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둘째, 메시야를 한 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슥 3:9). 

천국에 가고 구원받는 길은 오로지 한길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2). 한 돌이 있는데 이 돌에는 눈이 일곱 개가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눈이 일곱 개라는 것은 일곱은 완전수이고 눈은 지혜이기 때문에 완전한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돌에 뭔가가 새겨져 있다고 했는데 건축할 때 글씨가 새겨진 돌은 기초석입니다. 

여기에 건물이 언제 준공되고 언제 완공되었는지 다 기록해놓습니다. 교회의 기초석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가랴 3장 8~9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호수아에게 능력을 주셔서 성전을 완성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 순이시고 일곱 눈을 가진 한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는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슥 3:9). 이것은 십자가의 속죄 사건을 가리킵니다. 죄가 많으십니까? 좌절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다 갚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사단의 송사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죄로 우리를 좌절시키려는 사단의 전략에 넘어가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사단을 책망하고 우리를 변호해주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Ⅱ. 여호수아는 부패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정결케 하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슥 3:4). 

지금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습니다. 부패하였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 큰 위로가 됩니다. 인류 가운데 가장 똑똑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택하셨고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가장 똑똑한 아론 지파를 택하셔서 대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라고 하면 인류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인류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도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목사도 완전하지 않은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은 사람은 목사가 아주 의로운 사람인 줄 압니다. 그래서 목사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시험에 들어서 하나님을 떠나려고 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의로운 의인은 목사 중에도 없고 장로나 권사 중에도 없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도 더러운 옷을 입었는데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라고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부패하고 더러운 죄인이 되었을 때 택한 백성들에게 두 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첫째, 죄과를 제하여 버리십니다. 죄과는 죄에 대한 책임입니다. 죄가 있으면 책임을 져야합니다. 죄에 대한 책임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서 죄과를 제해주셨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 1:5).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죄과를 씻는 유일한 세척제입니다. 죄가 많아 마음에 고민이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이 옷은 의의 옷이고 구원의 옷입니다. 천국은 어떻게 가느냐? 예수님의 완전한 의의 옷을 입은 사람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라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 갈만큼 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똑똑하거나 권력이 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더러운 옷을 벗겨주시고 예수님의 완전한 의의 옷을 입혀주셔서 그 예복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는 고난의 불을 당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천국에 들어갈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든 지옥에 가든 그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하시는 분 있습니까? 그러면 뭐가 중요합니까?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까? 권력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까? 사람이 죽는 순간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의의 옷을 입었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Ⅲ. 여호수아는 사단에게 멸시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관을 씌우셨다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슥 3:5). 

대제사장은 옷만 입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에 관도 써야 됩니다. “너는 가는 베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 가는 베실로 관을 만드고 띠를 수 놓아 만들지니라” (출 28:39). 

가는 베실로 만든 관을 머리에 써야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인정해주시고 사람들도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여호수아의 머리에 관도 씌워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정한 관을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대제사장으로 인정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결론 

사단은 온 인간을 다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은혜주실 자를 택하시고 그들의 죗값을 갚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풀무불 속에 던져지셔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피 흘리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성경을 읽고 공부해도 예수님께서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죗값을 갚았다는 내용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죗값을 다 갚았다면 왜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갑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의 죗값을 갚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 예수님께서 죗값을 갚으신 자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부르셔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죗값을 갚으셨다는 것을 믿게 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며 의의 옷을 입혀주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인정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곳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분들은 ‘내가 교회를 나가고 싶다. 내가 십자가를 볼 때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찬송을 부르면 마음이 움직인다. 나는 이상하게 성경을 읽으면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주변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어서 자꾸 전도했다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불러 믿음을 주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인정하여 천국에서도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신교 종교개혁의 위대한 원리인 이신득의의 원리입니다. 
 
마틴 루터는 교회가 흥하느냐 망하느냐는 이신득의의 교리를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예배당이 크고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이 폼나게 옷을 입고 있어도 이신득의의 교리를 부정한다면 참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내가 노력해서 착해지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종교는 다 거짓된 것입니다. 또 내가 믿어서만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착한 행위를 해야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도 거짓입니다. 

이신득의는 모든 종교의 진위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아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고 의롭다함을 받았으며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옷을 갈아입고 머리에 관을 쓴 여호수아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슥 3:6~7).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내 도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함부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함부로 살면 하나님께 징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일꾼으로 인정해주시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높은 지위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분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우리는 다시 되물어 봐야 합니다. “법률적인 의를 말합니까? 실질적인 의를 말합니까?” 우리는 법률적으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의인이라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죄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법률적으로는 의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질적으로도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인 것입니다. 
 
오늘 스가랴 3장은 이신득의의 위대한 교리를 환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단이 와서 네가 무슨 의인이냐고 물어보면 하나님께서 날 택하셨고 예수님께서 내 죄과를 제하셨으니 사단아 물러가라고 대답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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