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맥추감사절] 개인 감사, 교회 감사 (느 2:1-9, 12:31-43)

첨부 1


개인 감사, 교회 감사 (느 2:1-9, 12:31-43)


'시종여일(始終如一)'과 '시종일관(始終一貫)'이라는 동의어의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물론 둘 다 같은 뜻이지만, 그 중에서 전자는 '같을 여' 자를 써서 '처음과 끝이 하나같다'라는 뜻이며, 후자는 '꿸 관' 자를 써서 '처음과 끝이 하나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즉 시작과 끝에 무언가 '공통적'인 것이 있으며 그것이 '한결같이' 유지되는 상태인데, 이것은 특히 무언가 큰 일을 끝까지 완수해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자세이기도 합니다.
  
느헤미야가 제일 처음에 뜻을 품고 또한 그의 지도하에 끝내 완성되었던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에서 바로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 엄청난 과업의 시작과 끝에 동시에 나타난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감사'였습니다.
그 큰 일은 처음에는 그저 한 개인의 '작은 감사'로 시작되었다가 나중에 가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올리는 '큰 감사'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는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난'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주어진 본문을 통하여 지난 2012년 전반기에 우리 각 개인과 이 경향 공동체 전체에 베풀어 주신 은혜들에 대하여 어떤 감사를 어떻게 드려야 마땅한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개인적으로 드려야 할 감사'를 잊지 말고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즉시 올려야 합니다.

느헤미야 2장 1절부터 9절에 "1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2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3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이까 

4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5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6그 때에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행할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즐겨하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7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8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9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 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편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라고 기록했습니다.

1절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느헤미야가 이 당시 바사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 밑에서 '술 관원장'으로 섬기고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상당히 높은 관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자신의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해야 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게 되었습니다.
  
1장 1절에 보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비참한 형편에 대한 소식을 '기슬르월' 즉 오늘날의 양력으로 11월 중순부터 12월 중순에 해당되는 때에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기"(1:4)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이제 본문에 기록된 "니산월"에 이르러서 그 응답을 받게 됩니다.
'니산월'은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에 해당되므로 느헤미야는 대략 4개월 동안 이 예루살렘 성벽재건의 사명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께 꾸준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그 기간 동안 자나 깨나 그 기도 제목을 심중에 품고 있었을 때에, 이방 제국의 불신 군주조차 그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괄목상대(刮目相對)란 '사람이 3일을 공부하면 상대방이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로 달라진다.'라는 뜻의 고사성어입니다.
'3일을 공부해도' 그 정도라면 하물며 '4개월 동안 기도를 하고' 있던 느헤미야였으니 당연히 달라 보일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라고 먼저 물어왔던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모시는 주군으로부터 뜻밖에 그런 질문을 받게 된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왕 앞에서 신하가 좋지 않은 인상을 보이고 서 있었다는 자체로도 큰 실례이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술 관원장'은 왕이 마시는 모든 음료를 전적으로 관할하고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왕의 생명과 직결되는 직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입장에서 볼 때에 자신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술 관원장이 뭔가 어두운 얼굴빛을 띄고 있다면, 혹시 그가 무슨 역적모의를 꾸미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될 소지가 다분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왕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즉 '임금님, 오래오래 사십시오. 저는 임금님을 살해하는 반역 따위는 꿈에도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안심시켜 주는 말부터 먼저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자기 얼굴에 근심 빛이 있는 이유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저의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고향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불탄 상태로 내버려져 있으니 제가 어떻게 근심이 없겠습니까?"라고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가 걱정했던 불호령을 내리는 대신에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아주 자상하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시 근동지방의 모든 나라와 민족들을 한 손에 휘어잡고 있던 제왕이 자기에게 '네가 원하는 것이 뭐냐?'라고 물어 주었으니, 이것은 그야말로 자기의 소원을 말하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질 '도깨비 방망이'가 손에 쥐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러니 느헤미야는 왕의 이 말을 듣게 된 순간 '드디어 왔구나!'하는 기분이었을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느헤미야가 나타낸 첫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4절 하반절에 보니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의 '묵도'라는 것은 모든 형식을 다 갖춘 긴 기도는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네 소원이 무엇인지 말만 하면 내가 다 들어 주겠다.'라고 나왔을 때에, 느헤미야가 "임금님,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하면서 그 앞에서 뒤돌아서서 하나님께 정식으로 감사기도를 드린 후에 다시 아닥사스다 왕과 대면했겠습니까?
결코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즉 이 '묵도'란 '아, 하나님, 이것이군요.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느헤미야가 자기 마음속에서 1, 2초 사이에 올린 아주 짧은 기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했었습니다.
즉 느헤미야가 그 아닥사스다 왕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깨달은 후에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즉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는 충분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곧 이어지는 느헤미야와 아닥사스다 왕 사이의 대화에서 명백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다녀올 "기한" 즉 특별 휴가 기간을 넉넉히 받았을 뿐 아니라 오가는 여행길의 안전한 '통행권'과 나중에 예루살렘 재건 공사에 필요한 '건축 자재 조달'까지 구체적으로 보장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즉 느헤미야의 그 짧은 감사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앞에 그야말로 '만사형통'의 길을 활짝 열어 주심으로써 더욱 풍성히 응답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감사'란 어떤 감사 제목이 생겼을 때에 '즉시' 해야 합니다.
기도는 오랫동안 해 놓고서도 막상 그 기도가 응답되고 나면 그것이 마치 '저절로 이루어진 일'인 줄로 착각하면서 '감사기도'는 깡그리 잊어먹는 교인이 있습니다.
온갖 소원들은 많이 나열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매일 매순간마다 베풀어 주고 계시는 '일용할 것'들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매주일 감사헌금을 드려도 모자랄 감사제목들을 일년 내내 그냥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이반제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에 보면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 슈호프가 어느 날 고된 노동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수용소 입구에서 소지품 검사를 받게 되는데, 그는 낮에 작업할 때 땅바닥에서 주웠던 '부러진 톱날 한 조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신체검사에서 그것이 들키면 '얼어 죽고 굶어 죽어가는 독방'에 끌려가게 될 것이지만, 만약 무사히 숨겨 가지고 들어가서 그것을 돌에 갈아 구두수선용 칼을 만들면 수용소 안에서 욋벌이를 할 때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슈호프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을 자기 장갑 속에다 감추는 것입니다.
드디어 자기가 신체검사 받을 차례가 되었는데, 간수의 손이 그 톱날 조각이 숨겨진 장갑에 가 닿았을 때 슈호프는 '자신의 심장이 기중기로 짓눌리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슈호프는 속으로 '하나님, 제발 들키지 않게 해 주십시오. 독방만은 면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절박한 기도를 올리게 되는데, 그 기도가 효험이 있었던지 그는 무사히 신체검사를 통과하게 됩니다.

그런데 슈호프는 그 톱날조각이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뻐서 그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까먹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것을 깨닫게 되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친 것 같아서' 끝내 감사기도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감사라는 것은 '즉시'라는 타이밍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선물을 받았을 때 "아빠, 엄마, 고맙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포장부터 뜯는다면 그 부모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여러분 중에 누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주었는데, 그 상대방에게 그 자리에서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넘어가 버렸다가 며칠 후에 "아, 그때 감사인사 드리는 것을 까먹어서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한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런 '늦은 감사'라도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뒤늦게 가서 온갖 긴 말로 치레하는 것보다는 그냥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감사합니다.'라고 딱 한마디 해 주는 것이 백번 더 나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는 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중에 무슨 감사드릴 일이 생길 때에 물론 감사헌금을 바치는 것은 주일까지 기다려야 하겠지만 감사 기도는 바로 그 자리에서 즉시 올려야 합니다.
무슨 고마운 일이 생기면 즉시 감사해야 그 효과가 최대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 같은 감사라 할지라도 시간이 흘러버리면 실로 '김빠진 감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차려서 살펴보면 자신의 삶 속에 얼마나 많은 '기도 응답'들과 '특별한 은혜'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연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매일 매순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온갖 '일용할 것'들과 '범사의 축복'을 두고 그때그때 즉시 비록 짧지만 진심의 감사를 주님께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교회적으로 드려야 할 감사'에 혼자 빠지지 말고 마음과 정성을 합하여 동참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12장 31절 이하 43절에 기록하기를 "31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성 위로 항렬을 지어 가게 하는데 한 떼는 우편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32따르는 자는 호세야와 유다 방백의 절반이요 33또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과 34유다와 베냐민과 스마야와 예레미야며 35또 제사장의 자손 몇이 나팔을 잡았으니 요나단의 아들 스마야의 손자 맛다냐의 증손 미가야의 현손 삭굴의 오대손 아삽의 육대손 스가랴와 

36그 형제 스마야와 아사렐과 밀랄래와 길랄래와 마애와 느다넬과 유다와 하나니라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37샘문으로 말미암아 전진하여 성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다윗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다윗의 궁 윗 길에서 동향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38감사 찬송하는 다른 떼는 저희를 마주 진행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으로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 위로 행하여 풀무 망대 윗 길로 성 넓은 곳에 이르고 39에브라임 문 위로 말미암아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그치매 

40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떼와 나와 민장의 절반은 하나님의 전에 섰고 41제사장 엘리아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내와 스가랴와 하나냐는 다 나팔을 잡았고 42또 마아세야와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웃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와 엘람과 에셀이 함께 있으며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43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자신의 작은 감사에 대하여 큰 형통으로 보답해 주심으로써 시작되었던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가 드디어 완성된 시점에 느헤미야는 이제 그 '끝' 역시 '감사'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에서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라고 한 대로 그는 레위인으로 구성된 '전문 음악인'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로 구성된 '아마추어'들까지 총동원한 초대형 찬양대를 조직했습니다.
그 특별 찬양대는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재건된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특별예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찬양대는 두 팀으로 나누어져서 한 팀은 에스라가 맡고 다른 팀은 느헤미야가 맡았는데, 각 팀마다 기다란 행렬을 이루면서 행렬 앞쪽에는 여러 가지 악기 연주자들과 전문 성악가들이, 그리고 행렬 뒤쪽에는 일반 백성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본문에 "두 떼로 나누어"라는 말과 "백성의 절반"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느헤미야가 그런 찬양대를 두 팀으로 나누어 조직했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두 찬양대가 일단 출발은 "골짜기 문"이라는 같은 지점에서 시작했지만, 각각 좌우의 반대방향을 따라 "성 위로 항렬을 지어" 행군하게 했습니다.
38절에 "감사 찬송하는 다른 떼는 저희를 마주 진행하는데"라고 한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렇게 악기와 레위인 찬양대의 반주에 맞추어서 온 백성들이 다 함께 기쁜 찬송을 부르면서 성벽 위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반 바퀴 돈 후에 반대편에서 두 팀이 합류하여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서 봉헌식의 예배를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왜 느헤미야는 그 '감사 찬송하는 큰 무리'들로 하여금 그런 특별한 코스를 택해서 행진하면서 찬송하게 했겠습니까?
그 특별 찬양대의 행렬에 속한 유다 백성들이 지금 막 완성된 예루살렘 성벽 위를 자기 발로 밟고 걸어가면서 그 기쁨의 찬송을 부를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떠올랐으며 그들의 가슴속에는 어떤 감격들이 치솟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느라고 그들이 그처럼 고생하고 희생했던 52일에 대한 감회였습니다.
그 유다 백성들은 성벽의 돌 하나하나를 밟으며 지나갈 때마다 '아, 여기가 바로 내 손으로 돌을 쌓아올린 곳이지. 저기를 저렇게 재건할 때에는 무척이나 힘들었었지.'라는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성을 양쪽으로 반 바퀴 돈 후에 반대쪽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에는 '그처럼 온갖 어려움과 시험과 원수들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 성벽을 이처럼 멋있게 재건시켜 주셨구나!'라는 감사가 뜨겁게 공감되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그런 감사의 감격을 모든 유다 백성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누리게 하기 위하여 그처럼 두 개의 초대형 찬양대를 조직하고 그런 특별 행진 순서를 만들었습니다.
불과 세 달 전까지만 해도 불타 버린 폐허와 무너진 돌무더기에 불과했던 예루살렘이 바로 그들 자신이 흘린 땀과 눈물과 피를 통하여 그처럼 영광스러운 새 예루살렘의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으니, 정말 그 감격이란 오직 그 성벽 재건 공사에 희생적으로 참여했고 이제 그 성벽을 돌면서 감사찬송을 함께 부르고 있는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 기쁨의 감사 제사는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 할 수밖에 없는, 실로 온 백성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한마음으로 통하면서 올린 예배였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감격적이고도 큰 기쁨의 감정이었던지 그처럼 감사로 인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예루살렘 성 바깥 "멀리까지 들릴" 정도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 가운데 이처럼 감격적인 감사의 감정이 공감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회중 전체가 힘차게 감사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자기는 맥 빠진 소리로 따라 부르는 흉내만 내고 있다든지, 특별감사절을 맞이하여 모든 성도들이 각기 정성을 다하여 감사헌금을 정말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데도 자기는 오늘이 특별감사헌금 드리는 주일인 것을 기억조차 하지 않고 빈손으로 오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한 일원'으로서 실로 어색하고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큰 교회에서 나 한 사람 쯤은 빠져도 표도 안 나겠지?'라는 생각이 드는 교인이 있다면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부터 곰곰이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은혜'에 대한 감사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성도들과 함께 충성을 다해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큰 일을 성취해 내는 보람'에 대한 감격 같은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몸만 교회에 등록되어 있지 영으로는 '거룩하고 복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있지 않는 교인은 그처럼 '감사 제사를 통한 성도의 즐거운 교통'을 전혀 나눌 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공짜로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드릴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고 죽도록 충성한 것이 많은 성도일수록 감사의 강도는 훨씬 더 높고 감사의 양도 훨씬 더 풍성합니다.
'남이 힘들여서 재건해 놓은 예루살렘 성'에 와서 그냥 편안하게 즐기는 것을 교회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교인은, 자기 손으로 스스로 '성벽을 쌓아 올리고' 그처럼 자신의 눈물과 땀이 배어 있는 '성벽을 돌면서' 감사찬송을 부르고 있는 성도의 감격과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 도리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란 온 교회가 함께, 각 성도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같이 나누어야 하는 최고로 '기쁜 경사'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부르고 감사의 예물을 바치고 감사의 절기를 지키는 모습은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에게조차 절로 전달될 만큼 지극히 '즐거운 예배'가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적어도 유다 백성이라면 '예루살렘 성벽 봉헌의 감사예배'에 단 한 명도 빠질 수 없었듯이, 이 경향제단을 통하여 특별감사절뿐 아니라 매주일의 예배를 통하여서도 항상 '감사의 제사'에 빠짐없이 기쁨으로 함께 참예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우리나라의 여자 프로골프 선수 중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유소연 프로입니다.
이 선수는 무슨 대회에서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마다 바로 그 마지막 퍼팅을 마친 그린 위에서 즉시 두 손을 모으고 감사기도부터 드리는 아주 독실한 기독신자입니다.
그것은 정말 짧은 감사이지만 또한 얼마나 진실하고 뜨거운 감사이겠습니까?
바로 그런 '즉시 감사'를 잊지 않는 그 선수에게 하나님께서는 작년에 전 세계의 여자 골프 대회들 중에서 단연 최고 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감격적인 순간에도 유소연 프로가 제일 먼저 했던 것이 전 세계의 골프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로 마지막 그린 위에서 두 손을 모으고 감사기도를 드린 것이었으며, 우승자 인터뷰에서도 제일 첫 멘트가 "First of all, I thank God."(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였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슨 일이든지 즉시 감사드릴 줄 아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이레의 은혜를 더 크게 베풀어 주십니다.
'수미상관(首尾相關)' 즉 '시작과 끝이 관계가 있다'는 말처럼 감사로 시작하는 성도에게는 훨씬 더 큰 감사 제목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또한 모든 일을 끝에 가서는 반드시 감사로 마감하는 것이야말로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자세인 동시에 최고의 유종지미입니다.
실로 감사는 매사를 시종여일, 시종일관 형통하게 이끌어 주는 가장 중요한 '하나'인 것입니다.

반면에 이미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릴 줄 모르고 늘 불만만 품고 짜증만 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현상태를 극복하는 것이나 불안한 미래가 형통하게 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이루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께 온전하고 풍성한 감사를 드리지는 않고 오히려 자화자찬하고 자만에 빠진다면 그야말로 용두사미요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감사를 빼 먹음으로써 축복의 길을 스스로 막아 버리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어리석고도 무례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개인의 매사를 두고 비록 '짧은 감사'라 할지라도 즉시 올림으로써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긴 형통'을 누리고, 공동체가 함께 올리는 '큰 감사'의 시간에도 자기 자신의 진정하고도 정성스러운 감사를 빠짐없이 올림으로써 교회를 통하여 누리는 '최고의 기쁨'을 함께 충만히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