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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감사를 창조하는 신앙 (대상 16: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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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를 창조하는 신앙 (대상 16:7-10)

독립운동가요 아동문학가인 소파 방정환(1899-1931) 선생님에 관한 일화입니다. 
  
어느 날 그가 밤이 늦도록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복면을 한 강도가 불쑥 들어와 시퍼런 칼을 들이밀며 말했습니다. “꼼짝 말고 손들어!” 그러자 그가 태연히 말했습니다. “아니, 꼼짝 않고 어떻게 손을 든단 말이요?” 강도가 주춤하며 말을 바꾸었습니다. “그럼, 손들고 꼼짝 마! 그리고 더 이상 잔소리 말고 돈이나 내놔.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야.” 그런데도 그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고 390원을 내놓았습니다. 옛날 그 시절에 390원이면 큰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이것이 전부이니 가지고 가시오.” 주인이 태연하게 돈을 주자 도둑이 오히려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그 돈을 쥐고서 얼른 도망가려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그가 소리를 쳤습니다. “이보시오. 돈을 주었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할 것 아니오?” 깜짝 놀란 이 강도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래 고맙다. 이놈아!” 
  
그리곤 날이 밝았습니다. 누군가가 방정환 선생님 댁의 문을 두드려서 나가 보니까 강도와 순경이 찾아왔습니다. 순경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간밤에 많이 놀라셨지요? 이 사람이 선생님 댁에서 강도질을 했다고 하기에 확인을 하러 왔습니다. 맞지요?” 이 때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이 사람 말이오? 어젯밤에 우리 집에 왔었지요. 그런데 돈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사정이 딱해 보여서 내가 390원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는데요.” 
  
순경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 분명히 선생님 댁에서 돈을 훔쳤다고 자백을 했는데요?” 라며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래도 그는 태연히 말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 그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내가 돈을 주니까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지 않았소? 돈을 훔쳐 가는 도둑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소?” 
  
순경은 할 수 없이 강도를 풀어 주었습니다. 순경이 돌아가자 강도는 방정환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세상에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그러자 방정환 선생님은 강도의 등을 두드리며 이렇게 타일러 주었습니다. “일어나시오. 사람이 어렵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마시오.” 그 후 그 강도를 마음을 고쳐먹고 죽을 때까지 방정환 선생님 곁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감사는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감사는 진정한 감사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억지로일지라도 감사하는 자에게는 그 감사에 따른 보상이 반드시 주어집니다. 요즘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우러나는 것이 진짜 감사이긴 하지만, 때로는 떠밀려서 하는 감사일지라도 그런 감사를 통해서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엄청난 축복의 결과가 주어지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억지로라도 감사해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의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삶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애굽을 탈출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시내산 아래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을 맺음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려주신 말씀이 ‘율법’입니다. 그 율법 가운데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목인 광야에서부터 지켜야 할 것들도 있는가 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야 지킬 수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세 개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세 절기는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입니다.(출애굽기 23:14-17)
  
그 세 절기 가운데 유월절은 광야에서도 지킬 수 있는 절기인 반면, 맥추절과 수장절은 광야에서 지키는 절기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야 지킬 수 있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은 농사를 지은 후에 첫 열매를 거둘 때 지키는 절기이고, 수장절은 모든 추수를 끝낸 후 추수한 곡식을 창고에 저장하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것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직 농사를 짓지도 않은 - 광야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절기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간적으로 한다면 40년 후에나 지킬 수 있는 절기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 후에나 지킬 수 있는 절기를 가나안 당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 절기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 말씀하셨을까요? 왜 감사절을 꼭 지켜야 한다고 미리 강조하셨을까요? 사실 맥추절만이 감사절인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하는 세 번의 절기는 모두 감사절입니다. 

유월절은 400년 동안 노예생활하던 애굽에서 건져주신 것이 대한 감사의 절기이고, 맥추절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첫 열매를 거둬들인 것에 대한 감사의 절기이고, 수장절은 풍성하게 추수할 수 있었음에 대한 감사의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아직 농사를 짓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또 가나안 따엥 들어가 농사를 짓는다 하더라도 상황이 언제나 같을 순 없습니다. 때로는 첫 열매가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그런 것처럼 오랜 가뭄 때문에 첫 열매를 거둬들인 시기가 늦어질 수도 있고, 알맹이가 작을 수도 있습니다. 또 수장절에 창고에 들인 곡식이 평년보다 적은 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한 곡식의 양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첫 열매를 거둬들이는 시기가 이르냐 늦느냐 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감사의 절기들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많이 주셨든 적게 주셨던 그것이라도 거둬들일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추수한 곡식의 많고 적음을 떠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하라고 강요하고 계신 것입니다. 감사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절을 강요하듯이 지키라고 명령하셨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다윗 왕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 들인 후에 백성들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르도록 강요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된 다윗은 자신을 위해서 멋진 왕궁을 지어 편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하나님의 언약궤가 생각이 났습니다. 앞선 사울 왕 때에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방치되어 있던 언약궤입니다. 그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생활할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아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언약궤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 언약궤 위에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짐을 싸서 그 구름기둥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행진해야 했습니다. 그 언약궤 위의 불기둥이 떠오르면 아무리 밤중이라 하더라도 그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그들은 거처를 옮겨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광야생활은 언약궤를 중심으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언약궤가 사울 왕이 통치하던 40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던 다윗은 그것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자신이 살고 있는 다윗성으로 모셔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언약궤를 모셔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언약궤를 옮겨오던 첫 번째 시도 때에 웃사가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오다가 웃사가 수레에서 떨어질 것같은 언약궤를 손으로 잡는 바람에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언약궤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든 다윗은 그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모셔놓은 후에, 다시 언약궤를 옮겨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도에서는 무사히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올 수 있었습니다.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 다윗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바로 앞인 역대상 15장에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는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약 천 여명에 가까운 레위사람들에게 언약궤를 멜 준비를 시켰고, 거대한 찬양대를 만들어 온갖 악기를 가지고 노래하고 찬양하면서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왔습니다. 

언약궤가 다윗성에 들어올 때에 다윗이 얼마나 기뻤는지 왕복 대신에 베 에옷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의 아내인 미갈이 다윗이 그렇게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에 다윗 왕을 업신여길 정도로, 왕의 체통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습니다. 너무너무 좋아서 춤을 추면서 언약궤를 옮겨왔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 바로 앞인 16:1절 이하에 보면 다윗 성에 언약궤를 위해 마련한 장막에 언약궤를 모셔놓고는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 날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거기 모인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떡 한 덩이와 야자열매로 만든 과자와 건포도로 만든 과자를 선물로 나눠주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언약궤를 모셔오는 것이 국가적인 기쁨이요 축제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온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이 자신이 아니요 하나님이심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마치 새로운 왕을 모신 것처럼 축제를 벌인 것입니다. 떡과 과자를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는 것의 또 하나의 의미는 화목제 제사를 어마어마하게 드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율법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화목제를 드렸으면, 그 화목제 제사를 드린 후에 그 제물을 제사드린 사람이 다시 받아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웃 사람들과 나눠먹습니다. 다윗도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렸고, 드린 제물을 되받아서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과 나눠먹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모인 사람의 수가 10-20명이 아닙니다. 수만 명이나 됩니다. 그 많은 사람에게 떡과 과자를 다 나눠주었다는 것은 다윗이 드린 화목제물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다윗이 언약궤를 모셔오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또 감사하게 생각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한 일이기에 온 백성들이 먹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양의 화목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4절 말씀에 의하면 다윗은 레위 사람들을 세워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송을 부르게 했습니다. 온갖 악기를 동원해서 하나님께 감사찬송을 부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감사의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노래의 앞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노래의 마지막인 36절에 의하면 온 백성이 그 노래를 함께 부르며 아멘으로 화답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레위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백성들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는 것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백성들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르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바꿔 표현한다면 감사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모셔오는 그 기쁨을 자신의 가슴 속에 묻어둘 수가 없어, 온 백성들을 다윗 성으로 불러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자신만 감사하고 끝낸 것이 아니라 온 백성들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함으로써 온 백성이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했습니다. 

여러분, 감사는 전염됩니다. 그리고 전염시켜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감사를 나 혼자만 누릴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눠야 합니다. 나눌 때에 그 감사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리고 때로는 스스로 감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감사를 나누어야 합니다. 강요해서라도 감사를 나눠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를 잃어버린 삶이 감사로 넘쳐나는 삶으로 바꿔지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감사하는 삶은 풍요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감사한다고 해서 우리의 환경이 바꿔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함으로 마음은 여유로워지고 따뜻해집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에는 하늘의 평화와 기쁨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것이 감사가 주는 가장 큰 유익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자주 우리의 삶을 바꿔줍니다. 빈궁한 삶을 풍요로운 삶으로 바꿔주고, 힘든 삶을 기쁨으로 바꿔줍니다. 낙심되고 절망적인 상황에 용기를 주고 활기를 주는 것도 감사가 주는 유익입니다. 

우리는 너무 분주한 삶을 살면서 감사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오늘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 채 늘 불평 가운데 살다보면 오늘 내 삶에 주어진 은혜와 기쁨도 잊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잠시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바쁘게 살아온 삶을 한 걸음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잃어버렸던 감사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별로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이고, 때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살 때도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삶에서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일지라도 바꿔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 굉장히 많음을 알게 됩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우리가 흔히 문둥병이라고 말하는 나병(한센씨 병)에 걸린 사람들은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손가락이 불에 탈 때에고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데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희망이 있다면,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가 쓴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제목처럼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청춘이라는 특권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고, 성공한 사람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를 느낄 수 있는 것도 젊음의 특권입니다. 때로는 슬럼프를 경험하기도 하고, 새로운 것에 대해서 도전하다가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도 청춘이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실패하면서 아파하는 것은 축복이요 감사한 일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에 아버지 거지와 아들 거지가 한 마을에 들어갔는데, 한 집에 큰 불이 났습니다. 가만히 다가가 보니까, 자신들이 가끔 이 마을에 올 때면 몰래 헛간에 들어가 잠을 자고 가던 그 집이었습니다. 불이 나자 그 집안 식구들이 양동이에 물을 담아가지고 불을 끄겠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불은 꺼지지 않고 집을 홀랑 다 태워버렸습니다. 집안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 모습을 한참 동안 구경하던 거지 아빠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집에만 헛간이 있는 게 아니란다. 널리고 널린 게 헛간 아니냐? 그리고 봐라 저 사람들 얼마나 불쌍하냐? 넌 저런 고생할 일 없단다. 이게 다 애비 잘 만나 집 없이 사는 덕인줄 알아라.”

상황을 뒤집어 보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욕심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니까 적다고 불평하고, 불편하다고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뒤집어 보면 그런 상황 하나하나가 감사의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오랜 기간 동안 가물었습니다. 104년 만에 발생한 최악의 가뭄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물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가뭄을 겪어보면서 물 한 방울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비가 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일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인데, 우리는 가물었다고 불평합니다. 그동안 가물지 않고 넉넉하게 물을 물쓰듯 쓰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오랜 가뭄을 통해서 가물었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감사하지 못했던 우리의 못된 심보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물을 사서 가뭄을 해갈해야 한다면 그 비용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물을 사서 해갈할 수도 없지만, 정말로 물을 사서 해갈해야 한다면 몇 천억을 가지고도 안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새로 교회당을 건축하고 나서 전기사용량이 많이 늘었습니다. 지난 겨울에는 한 달에 전기료가 350만 원 정도 나왔습니다. 요즘 전기료가 인상된다고 하고 피크제를 도입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교회 1년 전기료가 4천만 원이 넘을 것입니다. 전기를 많이 아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매일 받아쓰고 있는 햇빛 값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청구서를 보내오신다면 얼마나 나올까?’ 전기료 정도만 받는다고 해도 아마 한 사람당 1년에 몇 천만 원은 족히 나올 것입니다.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햇빛을 받아 쓰지요, 빛뿐만 아니라 열까지 주지요, 적당한 자외선에,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이 자랄 수 있도록 온갖 필요한 것들을 함께 주시는데, 그것을 가격으로 따진다면 어마어마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다 공짜입니다. 그러니 오래 가물었다고 불평할 것도 없고, 장마가 오랫동안 계속된다고 불평할 것도 없습니다. 본문 8절과 9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과 기적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라는 말은 신약성경 언어인 헬라어로 ‘유카리스티아’입니다. 이 말은 ‘좋은 은혜, 행복한 은혜’라는 뜻입니다. 동사로는 ‘숙고한다, 깊이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감사하는 말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은혜를 깊이 생각하여 그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깊이 생각함으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좋은 은혜를 은혜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는데서 발견되어집니다. 그리고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더욱 풍성하게 임하게 됩니다. 

독일의 유명한 사상가요 작인 괴테(Johann Wolfgang Goethe, 1749-1832)는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공자(孔子)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싫어하는 인간이 네 종류가 있는데, 그 첫째는 타인의 실패를 기뻐하는 사람이고, 둘째는 윗사람을 헐뜯는 자 앞에서는 맞장구를 치고선 뒤에서 욕하는 사람이고, 셋째는 용기는 있으나 예의가 없는 사람이고, 넷째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 곧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싫은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은 인간이 덜 된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신앙인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억지로라도 감사하십시다. 억지로 진 십자가가 축복이듯이, 억지로라도 한 감사에 하나님께서 하늘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부어주십니다. 
  
역대하 5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는 다윗이 다윗 성으로 옮겨온 언약궤를 그 성전 안에 모시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솔로몬도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기면서 찬양대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러자 성전에 구름이 가득하게 덥혔습니다. 구름이 가득하게 덥혔다는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게 임재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역대하 5:13-14) 
  
물론 언약궤가 성전으로 옮겨지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가득 임한 것이기도 하지만, 감사의 노래가 불려지는 곳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감사의 노래가 불려지고, 감사의 말이 많아지는 곳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비춰주십니다. 언약궤를 옮기면서 감사의 노래를 불렀던 다윗과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고, 그 시대는 가장 복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감사의 노래가 불려졌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우리의 삶을 너무 분주하게 살면서 잊어버렸던 감사를 회복하는 절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불평거리를 뒤집어 보면 감사가 보입니다. 억지로라도 감사하며 사십시다. 그래서 그 감사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더욱 풍성히 누리십시다. 감사는 하늘의 은혜를 내 삶으로 끌어오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우러날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서라도 해야 합니다. 감사를 창조하는 신앙 - 그 신앙이 하늘의 복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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