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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순결신앙 (4) (사 1:2-4, 13-14,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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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순결신앙 (4) (사 1:2-4, 13-14, 롬 12:1-2)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는 자비와 사랑과 인내와 용서의 하나님입니다. 인내하시되 하루가 천년 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용서하시되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랑하시되 아들을 제물로 내 놓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도 분노를 하십니다. 구약 성경에만도 분노가 450번 출현하는데 그중 하나님의 분노가 375번 차지합니다. 인간만 분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분노하고 진노하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진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시대에 나라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 심정을 전달하기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1)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심청전에서 심청이가 팔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 심봉사가 기가 막혀 동네 사람들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여보소 내 말 좀 들어보소” 바로 그 심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탄하십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자식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 만은 내 백성 이스라엘은 나를 외면하고 잊어버렸다”(3)고 하소연 하십니다. 그래서 저주하십니다. 5절을 보면 “어찌 매를 더 맞으려고 이러느냐,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되려느냐. 이제는 더 이상 제물을 내게 가져오지 말라, 나는 너희들이 바치는 짐승의 기름이나 염소의 피에 신물이 났다(13).” 화가 잔뜩 나신 하나님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고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분노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분노하시고 진노하실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의 조건이 몇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름 욕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고 망령되게 일컬어질 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존귀하고 영광된 이름입니다. 그래서 10계명 중에 3계명을 보면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망령되게 한다는 뜻은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자식이 세상을 함부로 살면 아버지 이름이 망령되게 됩니다. “저게 뉘 집 자손이냐” 그 말은 그의 아버지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함부로 무책임하게 살면 교회 이름과 하나님 이름이 망령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게 어느 교회 신자인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성경에 제사법이 뚜렷하게 제정되어 있습니다. 먼저 제사직 수행자는 자신을 성결해야 하고 경건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상2장을 보면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이 망나니들 입니다. 백성들이 제물을 가져와 제물을 삶고 있는 과정에 와서 다리 하나를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갈고리로 다리 하나를 건져 갑니다. 그것은 만용이고 불경입니다. 그런데도 겁 없이 자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상 2:17을 보면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망령되게 하는 일입니다. 결국 그 두 아들은 심판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8·15는 우리민족에게는 해방이고 일본에게는 심판을 받은 날입니다. 일본은 하나님 이름을 능멸하고 욕되게 하였습니다. 천황을 신으로 우리민족에게 숭배를 강요하고 핍박하고 억지로 참배하게 하였습니다. 거역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 하게 탄압하고 핍박하였습니다. 하나님에게 가야할 영광을 일본은 천황에게 돌렸습니다. 구약시대 바벨론이 느브갓네살에게 경배하게 한 것처럼, 로마시대 때 황제숭배를 강요하였듯이 말입니다. 로마가, 바벨론이, 일본이 그래서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을 아주 욕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이름을 능멸하였습니다. 

다음 차례는 북한이 심판받을 차례입니다. 북한은 바벨론이나 로마나 일본을 능가합니다. 오늘 평양에 가 보면 가장 좋은 자리에, 그 자리는 전에 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곳에 있던 교회를 부숴버리고 김일성 동상을 세워놓고 자국민은 물론이고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모두 입국하면 먼저 그곳으로 데려가 참배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어지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이름을 욕되거나 망령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업하면서, 사회생활 하면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돈관계로, 신용불신으로, 언어생활로, 처신 미숙으로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여인이 차를 난폭하게 몰았습니다. 앞에 신호등이 정지 신호로 바뀌면서 앞차가 정지하였습니다. 

그때 뒤차의 여인은 좀 빨리 갔으면 지나갔을 것인데 정차하는 바람에 지나가지 못했다고 앞차 운전자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 부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경찰이 와서 그 여인의 차를 살피더니 그 여인을 경찰서로 연행해서 유치장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사과했습니다. “나는 이 차가 도난 차인 줄 알았습니다, 차 뒤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나와 함께 교회에 가자’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 나는 당연히 당신의 차가 도난차인 줄 알았습니다.”하고 사죄하였다고 합니다. 

모두 하나님 이름이 욕되고 망령되게 만드는 행동들입니다. 그런 모습들에 하나님은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차에 이름을 붙이고 다닐 때는 그 수준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을 때에는 차라리 이름을 달지 말아야 합니다. 

우상 섬길 때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가장 민감하실 때가 백성들이 우상을 섬길 때입니다. 예언서에 나타난 심판의 경고는 대부분 백성들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은 우상숭배를 간음이라고 표현하고 불륜으로 표현합니다. 예언자들은 그런 백성들을 향하여 외치기를 “너희는 정조도 없고 지조도 없는 백성”(호5:7)이라고 책망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지적하는 대표적인 우상은 바알 종교입니다. 바알신은 가나안 토속종교로 일명 자연종교라고 하고 풍산종교라고 합니다. 

비는 하늘에서 옵니다. 풍년은 하늘에서 비가 와야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바알종교는 바알이 비와 폭풍과 번개의 신이라고 말합니다. 바알에게 제사하면 비를 충분히 내려 풍년들게 한다고 해서 바알을 풍요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을 살았습니다. 드디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농사를 지을 줄 모르니까 가나안 족속에게 배워 그들을 따라 농사를 짓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농사짓는 것을 보니까 먼저 바알신에게 제사부터 지냅니다. 

그리고 대지에 막대기를 꽂아 놓고 씨를 뿌립니다. 막대기는 남근의 상징이고 대지는 여성의 몸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곧 생명은 바알이 준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 없이 그대로 따라서 흉내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바알신앙이 자연스럽게 생활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고 바알신이 비를 주는 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분노하신 것입니다. 신앙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우매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그 보다 더한 우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이 재물의 신 맘몬신앙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모두 이 재물의 신을 뜨겁게 숭배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이 재물을 의지하는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 더 강렬합니다. 재물이 하나님 보다 더 화끈하게 도움을 다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돈이면 다 된다고 믿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재물이 다 채워줍니다. 병이 들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돈이 다 해결해 줍니다. 위험이 닥쳐도 걱정이 없습니다. 돈이 다 해결해 줍니다. 노후 걱정이 필요 없습니다. 돈이 다 해결해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주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고 꽁꽁 숨겨놓고 살아갑니다. 마음이 든든합니다. 경기가 어려워져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죽을 때가 임박해서 그때 하나님을 찾아가면 됩니다. 이것이 오늘의 최고의 우상신앙입니다. 

여러분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우상을 따라갈 때 하나님을 더 가까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물질을 생명처럼 숭배할 때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더 가까이 따라가는 삶입니다. 주일날 모두가 놀러 갈 때 나는 고집스럽게 예배드리러 가는 그 모습, 그 중심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중심입니다. 성지 갑바도기아에 가 보십시오. 

3세기에 있었던 심한 핍박을 피하여 팔레스탄에서 또 수리아 등에서 화산재로 덮인 그곳까지 와서 지하 5층 10층까지 동굴을 파고 들어가 그 안에서 해를 보지 않고 몇 대가 살았습니다. 믿음을 저버리거나 타협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 백성으로서 자존감을 유지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신앙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구원받음의 감격을 유지하며 주일을 지키며 하나님 백성으로서 목숨 걸고 신앙 지조를 유지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도록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이생을 위하여 너무 쉽게 버리고 타협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다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너무 빨리 타협하고 안주하고 우유부단한 신앙도 우상숭배 생활입니다.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입니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무속종교 등 여러 종교들이 섞여 있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가 참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본의 아니게 내 정체성을 숨기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숨김이 곧 타협입니다. 한 직장에서 여러 해동안 함께 생활하고 어느 날 회식 때도 함께 주거니 받거니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상대가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그도 집사였고 상관은 장로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지독한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안타까워하시는 부분입니다. 

하나님 이용

이 세상에는 이웃이나 친구를 이용하여 성공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성공하고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이용하여 성공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배반하고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 뜰까지 장사꾼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돈벌이를 위해 장사꾼들에게 성전 뜰을 불하해 준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런 제사장들의 속셈을 아시고 분노하신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시대가 얼마나 타락하였다는 말입니까. 사무엘상 6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과 전쟁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협을 느끼자 언약궤를 메고 전쟁터에 나아갑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은 언약궤 안에 계신 줄로 알았습니다. 아직 신앙의식이 미성숙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적에게 그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이제는 하나님도 빼앗긴 줄 알고 난리였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은 그 언약궤를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다곤 신당에 안치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역병이 발생하고 겁이 난 블레셋은 언약궤를 가져가라고 통고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언약궤를 인수하여 기럇여아림에 안치합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 다윗은 왕이 되어 다윗성으로 언약궤를 옮기고자 운구합니다. 운구도중 소가 뛰는 바람에 인부 웃사가 언약궤를 만졌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갑자기 진노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에게 진노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고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모셔 와서 아직 왕권이 불안한 때에 백성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려 한 것입니다. 

모셔올 때 백성들을 길가에 도열시키고 이 행사를 거대한 행사로 치러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려 하고 왕으로서 명성을 얻으려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이 앞섰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게 되고 우상숭배를 자행하고 하나님을 이용하는 일에 하나님은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타락

하나님의 가장 큰 분노는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그 앞에서 누구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소돔은 유황불로 세상을 쓸어버리셨습니다. 누가 그 앞에서 도피하고 숨을 수 있습니까. 노아 심판을 보십시오. 물로 세상을 쓸어버리셨습니다. 왜 쓸어버리셨는가 하면 이 세상이 너무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그 진노 앞에서 도망하고 숨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백성들이 너무 형식적이고 매일같이 죄를 짓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그리고는 매일 양을 잡아 가지고 와 제사를 드리는 그 모습을 고발합니다.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그들의 모습이 너무 가증스럽고 염치가 없고 기가 막혀 말씀하시기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 귀를 기울이라”고 탄식하십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 만은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사 1:2-4)라고 탄식하십니다. 이렇게 탄식하시고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다시는 내게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나는 양의 피를 즐겨하지 않는다.”(11), 그 말은 “이제 나는 너희들이 형식적으로 바치는 제물이나 양의 피에 신물이 났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무서운 심판입니다. 

여러분, 심판이 무엇입니까. 아이들이 가장 두려운 것은 엄마가 얼굴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가장 무서워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즐겨하지 않는다, 다시는 내게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이제는 너희의 형식적인 제물에 신물이 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호세아 6장6절을 보면 “나는 인애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또 미가 6장8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네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던가, 정의롭게 행동하며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너의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인내의 하나님이고 평화의 하나님이고 회복의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늘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이 예수 안에서 살아가면서 이루고 만들어 가야할 그리스도인들의 순결한 신앙의 삶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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