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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실존 (왕하 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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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실존 (왕하 5:1-14)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를 보면 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경찰이 수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아들을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질문을 하는 경찰도 민망합니다. 피해자의 아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사 한 명이 우연히 볼펜을 떨어뜨려서 그것을 주우려고 책상 아래로 고개를 숙이는데 피해자의 아들이 다리를 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그 아들을 용의자로 지목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우는 사람이 다리를 떨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리를 떤다는 말은 지루하다는 말이고 현재 상황에 몰입하고 있지 않다는 얘기이고 진실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 아들이 연기를 하고 있었고 그 아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담배를 피우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인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모습이 불량하게 보이는 이유는 삶에 가득 찬 지루함의 모습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의 무관심한 눈초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프랑스어로 에누이 실존적인 지루함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스마트폰에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가는 사람도 비슷합니다. 

현대인은 지루합니다. 현대인은 항상 무료합니다. 그 인생에 가득 찬 지루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사람이 진정하게 실존하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차라리 화가 나서 흥분하는 모습이 돌부처처럼 무뚝뚝한 모습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차라리 그게 본 모습입니다. 그 사람의 참 모습을 거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사람을 경험할 수 있고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을 엿볼 수가 있고 그 사람과 가까워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위 망가지는 모습을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사람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로 술을 많이 마신다든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무릅쓸 때 그렇게 해서 망가진 모습을 연출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 사람을 친하게 생각합니다. 왜 청소년들이 욕을 합니까. 욕은 당연히 나쁜 언어습관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왜 욕을 하려는 감정을 갖느냐. 그게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말로는 나타낼 수 없는 자신의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점잖음으로 나타낼 수 없는 진실 · 감정 · 간절함 때로는 분노를 욕을 통하여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모습에서 언제 진실한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느냐.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질 때, 그게 베드로의 참모습입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것은 점잖은 베드로도 아니고 거룩한 베드로도 아니고 진짜 인간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닙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연기하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 위기 앞에서 허둥지둥하는 베드로. 그것이 그의 한계요 그의 참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또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기 전에 좌우를 살펴보는 모습. 사람은 죽여야겠고 그것을 숨겨야겠고……. 

이런 데에서 우리는 신앙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참된 모습은 정돈된 모습이 아니고 멋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유일하게 항상 진실하게 실존하셨던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순간이든 삶에 전적으로 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무관심하다든가 지루하다든가 관망하는 태도를 가지신 적이 없어요. 예수님은 그냥 길을 걸어가는 순간에도 그의 옷에 손을 대는 사람이 나음을 얻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어느 한순간도 예수님은 공회전하는 순간이 없었어요. 자동차에 엔진을 걸어놓고 서 있으면 공회전이라고 하지요. 엔진은 돌아가는데 앞으로 가지 않는. 예수님에게는 공회전하는 순간이 없었어요.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 교류하셨고 항상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회전하는 순간이 많습니다. 우리가 항상 성령 충만하지 못하는 이유가 아마 거기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순간은 무관심하고 인생을 관망하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집중합니다. 그때가 진정 실존의 순간입니다. 진정한 실존의 순간은 주로 위기로써 찾아옵니다. 예수님 양편의 강도가 바로 그런 위기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습니다. 더 이상의 시간은 없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그들은 연기할 수 없습니다. 절박한 순간입니다. 최후의 위기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한 명은 예수님을 욕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우리를 구원하라’ 그런데 한 명은 예수님에게 간구합니다. ‘주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이들이 이런 위기의 순간까지 오게 된 것은 자기들의 잘못입니다. 좀 더 일찍 정신을 차렸더라면 이러한 경험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들이 이러한 위기를 당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가까이 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 기회가 한 사람에게는 멸망으로 가는 기회가 되었고 한 사람에게는 영생으로 가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아만 이 사람은 나름대로 사회지도층이고 그 밑에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어른이고 점잖은 사람이고 많은 것을 이룬 사람이고 사람들에게 명성과 존경의 대상입니다. 11절까지는 나아만이 점잖습니다. 

그런데 11절에 그가 엘리사 선지자의 집 문 앞에 섰을 때 그는 엘리사가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영접할 줄로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직접 나오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내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면 몸이 깨끗해집니다 라고 말을 하는 순간에 나아만의 뚜껑이 열렸습니다. 열을 받은 것입니다. 화를 냅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지금까지는 점잖은 사람이었는데 그가 냉대를 당한다고 생각하니까 흥분하고 화를 내고 돌아가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엘리사가 의도한 대로 된 것입니다. 엘리사가 일부러 이렇게 한 것입니다. 일부러 나아만을 화내게 만든 것입니다. 그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 하나의 테스트입니다. 일반 목회자라면 엄두도 못 냅니다. 교인 잃을까봐.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종만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정중한 만남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중한 만남은 진실을 드러내기가 힘듭니다. 맞선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맞선. 선남선녀가 옷을 잘 입고 좋은 커피숍에 나와서 서로 공손하게 대화합니다. ‘취미가 무엇입니까? 아버님은 무얼 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그래서는 가까워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 맞선이 효과가 없느냐. 그런 상황에서 만나서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화를 냈기 때문에 나아만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화를 내는 순간에 나아만이 진실해진 것입니다. 더 이상 경건한 척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거룩한 척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인품이 있는 것처럼 보일 필요도 없고 화를 내는 순간에 나아만은 진실한 나아만의 모습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영국의 설교자 스펄전은 나는 화가 나면 설교를 더 잘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화를 내면 설교를 더 잘 할 수 있다는 얘기냐. 그러면 앞으로 설교할 때마다 화를 내면 되겠네요. 그게 아니지요. 사람이 화를 낼 때 그의 감정이 최대로 작동합니다. 영혼이 최대로 작동합니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펄전이 역설적이지만 나는 화를 낼 때 설교를 더 잘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아만이 이 순간에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여기에서 화를 내지 않으면 사람도 아닙니다. 나아만이 화를 내는 이유는 자기가 기대했던 것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과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셨다면 진지하게 신앙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가 인생에 기대하는 것과 인생이 그를 위하여 베푸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철이 들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발견합니다. 내가 기대한 것과 인생이 나에게 주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 내가 결혼할 때 남편에게 기대했던 것과 진짜 남편이 내게 주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지요. 아내도 그렇고.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하나님에게 기대했던 것과 하나님이 내게 역사하시는 방법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같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당신의 생각이 다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 사람이 철이 들고 신앙인의 신앙이 성숙해지고 영혼이 성숙해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진실된 만남은 충돌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염려해야 될 것은 문명의 충돌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의 충돌이에요. 예수님 좌편 강도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충돌을 가져왔어요. 우편 강도에게만 그것이 은혜가 되고 구원이 되고 낙원을 허락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충돌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예사롭게 생각한 것입니다. 신앙은 서비스업이 아닙니다. 고객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서비스업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곳이 아니고 성도를 섬기지만 서비스업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가장 솔직한 방법으로 반응했습니다. 화를 냈습니다. 이것이 나아만에게는 위기요 기회의 순간인데 그 옆에 바른말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종들이 뭐라고 말하느냐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홀로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른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말은 듣기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른 말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분노든 자신의 자존심이든 자신의 상한 마음에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찾고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우리 옆에서 진실 된 말을 해 줘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들을 수 있을 때 우리에게는 축복이 되는 것이고 그것을 거부하면 우리에게 그 기회는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본질은 나아만이 문둥병에서 낫느냐, 낫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의 기분이나 비위나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건 비본질적입니다. 기분이 나쁘다고 평생 문둥병으로 살다 죽겠습니까. 기분이 나쁘다고 천국가기를 거부하겠습니까. 기분이 나쁘다고 굴러들어온 복을 발로 차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지요. 지금이야말로 정말로 인생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판단해야 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나아만이 이 순간에 철이 든다면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이 기회를 발로 차버리면 그는 영원히 문둥병자로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 선지자는 일부러 이러한 힘든 선택의 순간을 그에게 안겨준 것입니다. 

진실한 실존 이것은 철학적인 표현이지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제 모습보다 더 거룩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교양, 우리의 점잖음 이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에 도달할 때에 우리의 진짜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유도하십니다. 그것이 필요하다고 보시기 때문에.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대화를 통해서 한계에 찬 우리의 본 모습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두 가지를 발견하는데 첫째는 나는 애초에 왜 병들었는가, 둘째는 나는 지금 어떻게 나을 수 있는 가를 깨닫습니다. 나아만은 이 순간에 내가 애초에 왜 병이 들었을까, 그의 인격적인 결함, 그의 인생의 결함에서 평생 그를 괴롭히는 원인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지금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는 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당황할 때 몰입할 때 굳게 닫아두었던 영혼이 노출되고 이제 비로소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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