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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경받는 교회는 없습니까? (출 7: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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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받는 교회는 없습니까? (출 7:14-25)  

< 균형 잡힌 신앙의 중요성 >   

얼마 전, 29살의 이 모 씨가 삶이 답답해서 경기도의 한 점집을 찾았습니다. 운세를 물어보자 26살의 처녀 무속인이 3달 내에 경찰 조사를 받는다는 점괘를 내놓았습니다. 삶이 힘든데 그런 점괘까지 듣자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그 무속인을 흉기로 찔러 큰 중상을 입혔습니다. 결국 3달이 아닌 3시간 내에 경찰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보도가 나가자 그 무속인이 용하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조금 후에 칼 맞을 것도 모르고 ‘3달 내’를 말한 것이 용한 것일까요?  

작년에 김정일이 죽자 그 죽음을 자신이 언젠가 예언한 적이 있다고 수많은 점쟁이가 자신의 용함을 선전했습니다. 애매한 표현으로 점괘를 내놓고 맞으면 좋고 안 맞아도 책임을 지지 않는 점괘를 누군들 못 내놓겠습니까? 문제는 예언을 빙자해 그렇게 예수 점을 쳐주는 교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들은 대부분 이단 교회들인데 일반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교회에 대해 실망하고 마음을 닫으니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어떤 여 성도는 가정은 팽개치고 매일 교회에 가서 철야를 합니다. 남편이 못살겠다고 하고 주변 사람들이 그러지 말라고 설득해도 그녀는 자신은 남편과 이혼해도 좋으니까 맘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덕이 안 되는 행동입니까? 문제는 그녀가 다니는 교회 역시 이단교회란 사실입니다. 일반인은 그것을 모르고 그냥 똑같은 교회인 줄 알고 교회의 몰상식을 질타하니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요즈음 성령 충만을 빙자해서 무속신앙의 신들림 현상을 추구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런 신들림은 깊은 상처와 곤경에 빠진 영혼에게 일시적으로 환각적인 만족을 줄 수는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의 외적인 팽창과 내적인 지도력 강화 수단으로 리더에 의해 악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공동체에 빠지면 가정이 깨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 공동체가 외적으로 힘이 커지고 내적으로 지도력이 확고해지면 신들림과 같은 열광주의가 조금씩 절제되는 수순을 밟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특별한 종교적인 신들림의 현상을 내세워 공동체를 급성장시키고 난 후 어느 정도 지도력이 확립되고 사회적 위치를 얻으면 그 다음에는 종교적 신들림을 크게 조장하지 않습니다. 종교적 신들림은 대개 신으로부터의 직통계시를 내세우며 종교적인 기득권과 질서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기득권이 굳게 뿌리내린 사회일수록 초자연적인 계시와 영감을 더 억제하는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실제로 과거에 직통계시와 예언과 열광주의로 크게 성장을 시킨 교회 중에 한국 교계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다시 말씀 중심 신앙으로 돌아온 교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 교회들은 과거처럼 직통계시와 예언과 열광주의를 크게 내세우지 않습니다. 괜히 판을 깰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 전반적으로 뜨거운 신앙이 사라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차원 높은 신앙을 향한 성숙의 기회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 균형 잡힌 신앙이 중요합니까? 성장 문제보다 바른 진리 문제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성공만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 자기 공동체는 커져도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닫게 만듭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한국 교계에 공헌한 것도 많습니다. 특히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말은 어렵게 살 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그러나 그 말은 잘못 오도될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당시 많은 거짓 선지자들은 “우리는 바벨론을 이길 수 있다. 국제정세를 잘 이용하면 된다.”고 수많은 희망적인 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자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거짓 선지자들에게 몰려갔습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이러면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인기 없는 말만 하니까 당시에 예레미야의 편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너무 기가 막혀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어머님! 저를 온 세계와 다투는 존재로 낳으셨군요. 사람들이 다 저를 저주합니다(렘 15:10).” 오늘날로 말하면 예레미야는 개척 교회 멤버도 거의 없는 처절한 왕따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편이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렘 15:11).   

< 바로 하면 됩니다 >   

물론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과 긍정적인 사고를 일깨우는 것은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도되면 안 됩니다. 윤리의식과 화합정신이 없이 자기만 성공하려고 하는 무조건적인 긍정주의는 많은 폐해를 만듭니다.  

바른 진리의 밑바탕도 없이 자기긍정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은 드라마 추적자에 나오는 대통령 후보 강동윤과 같은 사람입니다. 강동윤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아내의 교통사고를 감추려고 서민의 딸을 빚진 의료인을 매수해서 독극물로 죽입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말은 청산유수입니다. 사회를 보면 그런 사람들이 대개 성공하지만 과연 그런 성공에 행복이 있을까요? 불법과 탈법과 편법으로 얻은 성공은 결코 결말이 좋지 않습니다.  

요새 왜 교회가 욕을 먹습니까? 빚더미에 올라서 무리하게 교회를 짓고, 그린벨트 땅을 사서 건축할 수 있는 대지로 바꾸려고 시장에게 로비를 하고, 카리스마를 인위적으로 얻고 재정을 확보하려고 연약한 영혼들에게 잘못된 두려움을 심어주는 등 고쳐야 할 부분이 일반인들의 눈에도 너무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한 카센터 사장이 친절하게 전구도 공짜로 갈아주고 자동차 내부 청소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믿고 차 수리를 맡겼는데 점점 비용청구가 많아져서 주변에 알아보니까 남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청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두려움을 이용했습니다. “목사님! 지금 바퀴를 갈지 않으면 고속도로 운행 중에 바퀴가 터질 수도 있어요.”  

차량 운행 중에 바퀴가 터지면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런 두려움을 주입해서 갈 때가 되지 않았는데 바퀴를 갈게 하고, 오일을 교환하게 하고, 다른 부속품들은 일찍 갈게 하면 자동차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무조건 당합니다. 결국 그런 거짓 카센터는 돈을 벌면서 대형화되고 진실한 카센터는 동네 개척 영업장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식으로 두려움을 이용하면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지만 양심적인 목회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또한 무조건적인 긍정주의자들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영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서울을 못 가는 한이 있어도 모로(aside) 가면 안 되고 바로(right)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서울에 못 가게 되면 하나님이 더 좋은 목적지로 반드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이제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해 보자!”고만 하지 말고 “바로 하면 된다! 바로 할 수 있다! 바로 해보자!”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축복 받고 욕먹는 사람’이 아닌 ‘축복 받고 존경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단순히 ‘성공하는 사업가’에 머물지 말고 ‘성공해서 존경받는 사업가’의 꿈을 가지십시오. 그처럼 남의 뒤를 치고 남을 물 먹이지 않으면서도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온유한 성품으로 얻은 인맥으로 가치와 재화를 창출하며 성공하는 길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바로 하면서도 성공하는 길을 반드시 열어주실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긍정주의자들은 로또에 당첨되어도 하나님이 축복을 주셨다고 간증하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로또 당첨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시험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영혼과 정신이 망가집니다. 그러므로 혹시 로또에 당첨되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하나님! 이번에는 땀이 없이 횡재했지만 계속 횡재를 추구하는 인생이 되지 않게 하시고 이번 일로 인해 저의 영혼과 정신이 오염되지 않고 늘 나눔을 힘써 실천하며 살게 하소서!”  

로또 당첨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간증하는 것은 경망된 것입니다. 그것도 일종의 은혜지만 사실 부끄러운 은혜입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듣는 사람들도 오염됩니다. 희생하고 헌신해서 축복받은 얘기는 영혼에 유익이 되지만 로또 당첨으로 축복받는 얘기는 오히려 영혼을 망칠 수 있습니다. 바르게 성공하지 않으면 성공한 후에도 존경을 받지는 못합니다. 횡재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존경의 대상은 아닙니다.

저는 미국 목사님들의 설교를 많이 듣습니다. 특히 조엘 오스틴 목사님 설교는 영문이 단순하고 쉽고 언어에 운율이 있고 화법도 탁월해서 영문설교 연구에 도움이 되어 자주 듣는 편입니다. 게다가 은혜와 도전이 되는 좋은 내용도 많고 그 동안 약점으로 지적되던 지나친 축복 신학도 점차 균형 잡힌 신학으로 바뀌는 추세입니다. 다만 ‘희생적인 과정’이나 ‘바른 과정’에 대한 얘기는 여전히 적은 편입니다.  

얼마 전, 그 목사님이 설교할 때 어떤 사람의 아들이 로또에 당첨되어 순식간에 4천만 불을 얻은 얘기를 하며 “여러분들도 희망을 가지세요!”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런 설교가 없는 자에게는 희망이 되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는 않습니다. 사실상 매주 전 세계에서 1000만 명이 넘게 듣는 설교에서 그렇게 로또 맞아서 축복받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런 말들은 오히려 영혼을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님은 ‘행운’이란 말로 break란 단어를 유난히 많이 씁니다. 네트영어로 설명하면 break의 원뜻은 ‘터뜨림’란 뜻인데 한국어 표현으로 쉽게 개념을 설명하면 ‘대박이 터짐’이란 뜻입니다. 또한 그 뜻을 조금 쉽게 뜻풀이하면 ‘복이 넝쿨째 굴러옴, 갑자기 횡재함’이란 뜻입니다. 그런 뜻이니까 설교에서 ‘break’란 말이 많이 나오면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희망으로 흥분되겠습니까? 그러나 남용되면 안 됩니다. 

설교에는 희망을 주는 희망 설교, 심판을 예고하는 심판 설교, 사람이 되라는 윤리 설교 등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선호하는 설교는 희망 설교입니다. 그리고 언뜻 생각하면 사람이 되라는 윤리 설교보다 심판을 예고하는 심판 설교를 사람들이 더 싫어할 것 같지만 사실상 사람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설교는 사람이 되라는 윤리 설교입니다. 그러나 듣기 좋은 설교보다 듣기 싫은 설교에 마음을 열 때 더욱 큰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 뜨거운 신앙이 몰상식과 비윤리로 흐르지 않게 해야 합니다. 

시골의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님의 심방 후에 목사님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으려고 성도들 사이에 경쟁이 벌어집니다. 그 음식을 먹으면 축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정상적인 모습으로 보이겠습니까? 그런 모습이 보이면 불신자들은 교회와 교인을 경멸하게 됩니다.  

교회는 평범하게 행동해도 “교회가 왜 그래?”라고 하면서 늘 당하는 입장입니다. 교회를 섬기다 보면 그런 일을 당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를 들어, 교회 입구가 공용구간이면 건물 청소인은 그곳도 다른 곳처럼 매일 청소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2008년 초에 한때 2달 넘게 청소를 안 했습니다. 마침내 2달 만에 그분에게 매일 청소해달라고 요구하자 그 다음부터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험담하고 다닙니다. 그처럼 교회는 조금만 권리를 주장해도 사랑이 없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일반인이라면 그렇게 나오겠습니까? 

어느 날, 주일에 주차장소가 없어서 우리 교인 중에 한 분이 어느 가게 앞에 주차했습니다. 매일 그러는 것도 아니고 1년에 한두 번 있을까말까 한 일이기에 이웃끼리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인데 아주 매몰차게 나왔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장사를 방해하고 매출을 줄인다고 이웃이자 고객에게 그렇게 매몰차게 나옵니까? 그런 일을 당해도 교회는 말없이 참아야 합니다. 일반인이라면 그렇게 나오겠습니까? 

그처럼 교회와 교인이란 딱지 때문에 억울해도 참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와 교인과 목회자가 지탄받을 명백한 잘못을 하면 얼마나 곱빼기로 욕을 먹습니까? 요새 인터넷을 보면 교회와 교인과 목회자는 씹히는 안주거리입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10배, 100배로 비난의 돌을 던집니다. 특히 현 대통령이 장로란 이유로 반대자들의 돌팔매는 더욱 거세졌습니다. 그런 세태이기에 성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굳센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존경받는 교회와 교인이 되도록 지혜롭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무속신앙을 멀리하십시오 >  

본문은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 중에 첫 재앙인 나일 강이 피로 변하는 재앙이 묘사된 본문입니다.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거절하자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 바로가 나일 강으로 나오면 이렇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왕이여! 당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지 않아서 이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그 물에서 악취가 나고 애굽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시기를 싫어할 것입니다(16-17절).”

또한 아론에게는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강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내밀라! 그러면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굽 온 땅과 나무 그릇과 돌 그릇 안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19절).”  

그 명령대로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자 강물이 다 피로 변하고 고기가 죽고 그 강물을 마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20-21절).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애굽 요술사들도 요술로 똑같이 물을 피로 만든 것입니다(22절). 아마 그들은 눈속임이나 약품 사용 및 사단의 능력으로 소량의 나일 강물을 피로 변하게 했을 것입니다.  

결국 거짓 요술사들의 술수로 바로는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나일 강이 피로 변한 사실과 백성들의 고통을 애써 외면했습니다(23절). 그처럼 나일 강물을 마실 수 없게 되자 애굽 사람들은 하수가를 파서 마실 물을 구하기까지 했습니다(24절). 그런 상태에서 7일이 지났습니다(25절). 얼마나 백성들의 고통이 컸겠습니까? 가짜 때문에 진짜도 외면된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왜 점과 각종 거짓 사술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깨닫습니다.   

어떤 분이 결혼 일 년 만에 6.25 전쟁이 났습니다. 전쟁 후 남편의 생사도 모르고 애 하나를 안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했습니다. 그러자 점집을 찾아 무슨 소리라도 들어야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렇게 수시로 점집을 찾다가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이 점치는 것을 무섭게 심판하는 것을 깨닫고 점집을 끊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안이 망했을까요? 아닙니다. 나중에 그 아이가 훌륭한 목회자가 되어 모친의 설움과 상처를 씻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운명론과 연관이 깊습니다. 운명론이란 자신에게 규정된 운명을 거부할 수 없고 미래는 자신의 노력과 상관없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운명은 하나님 안에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을 바꿔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운명론에 매이지 말고 예수님 안에서 운명을 바꾸십시오. 인생은 운명이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인격관계를 통해 운명을 결정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을 꼭 붙잡고 운명을 멋지게 개척해 나가십시오.   

왜 사람들이 무속신앙과 신비주의에 빠집니까? 신비와 영성을 과시하려는 본능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제일 주의할 것은 영성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앞세우는 것이기에 영성과시와는 본질적으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을 과시하면 가장 영성이 없게 됩니다. 반대로 늘 자신의 부족한 영성을 안타까워하면 가장 영성이 좋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은 결국 그런 사람에게 임합니다.   

요새 어떤 이단 단체의 영성훈련 프로그램을 보면 여러 가지 무속신앙으로 미혹합니다. 그래서 그 훈련을 받으면 입신을 잘하고, 성령의 9가지 은사를 다 받고, 미래를 보는 예언과 투시 능력이 생기고, 사람 마음을 읽는 투심 능력이 생겨 사람을 척 보면 그 마음을 읽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일급 성도로 여기는데 그것이 영성일까요?   

영성(靈性)이란 ‘자기를 영(zero)으로 만드는 성품’입니다. 자기를 영으로 만들수록 영성은 높아지고, 자기를 높이고 내세울수록 교만과 영적 만성질병에 빠져서 참 고치기 힘듭니다. 물론 그런 영적 질병도 사람이 죽을 때는 다 고쳐지지만 중요한 것은 죽기 전에 자기를 잘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잘 죽이면 고통도 그만큼 죽고 자기가 펄펄 살아있으면 고통도 그만큼 커집니다. 그러므로 잘 살려면 먼저 잘 죽을 줄 알아야 합니다.   

< 존경받는 교회는 없습니까? >   

요새 미혹의 영이 창궐한 시대입니다. 교계에서도 애굽의 요술사와 같은 이단들이 가짜를 전파해 진짜를 못 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1992년 다미선교회의 거짓 종말론이 극성을 부려서 참된 종말론 신앙까지 얼마나 약해졌습니까? 그래서 교회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고 사회의 흑암은 짙어지고 있습니다. 이때 어둠의 세력을 이기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소명의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바로에게로 가라고 했을 때 모세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앉아서 한탄하지 마십시오. 일어서서 사명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십시오. 그리고 힘 있는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십시오. “나는 능력이 없는데...”라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셨다는 소명을 가지고 나가면 자신은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이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쓰임 받는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둘째,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사실 모세의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입니까? 거기서 무슨 역사가 나타나겠습니까? 그런데 정말로 나일 강이 피로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힘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재능과 장점의 지팡이를 가지고 현실을 피하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고 뛰어드십시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자신감은 강력한 무기와 같습니다. 사람이 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자신감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감은 자신의 잠재능력을 사용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사람은 보통 자신의 전체 능력의 10%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능력의 사용비율을 높여 주는 것이 바로 자신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은 자본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을 가진 셈이 됩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큰 자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셋째, 큰 꿈을 가지십시오. 왜 하나님은 아론에게 지팡이를 잡은 팔을 애굽의 물들과 강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내밀라고 했습니까? 나일 강 하나가 아닌 전체 물 근원을 변화시키려는 조치입니다. 그때 아론이 지팡이를 잡고 팔을 모든 물 위로 높이 내미는 것은 큰 꿈과 비전의 기치를 높이 드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처럼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일에 적극 나서십시오. 

요새 한국 교회에 대한 인식이 너무 나빠졌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재산과 자리싸움에 멍들어 있고 무리한 세습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또한 무리한 교회건축으로 소중한 헌금이 이자로 새나가고 있습니다. 그처럼 교회가 자기를 덜어낼 줄 모르고 하나님 나라 확장이 아닌 자기 왕국 확장에 열을 올린다면 얼마나 실망이 됩니까? 그래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묻습니다. “존경받는 교회는 없습니까?” 이런 때에 우리 교회는 선교마인드를 가지고 자기를 덜어내고 나눌 줄 아는 최고의 모델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물론 멋진 취지와 구호만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축복을 많이 받고 그 축복을 멋지게 나눠주는 실질적인 능력을 갖추기에 힘쓰십시오. 그래서 ‘멋지게 잘 나누는 교회’란 꿈과 비전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눔의 바람을 선도하는데 각자의 힘을 보태십시오. 그처럼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멋지게 이뤄내는 존경받는 교회와 교인의 꿈을 가지고 최선을 다함으로 내일의 축복과 상급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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