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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랑할 것이 없는 자의 자랑거리 (고전 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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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할 것이 없는 자의 자랑거리 (고전 1:26-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시는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40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돈 자랑을 합니다. 한 친구는 자식 자랑을 합니다. 한 친구는 골프 실력을 자랑합니다. 한 친구는 대궐 같은 집 자랑을 합니다. 그러자 한 친구는 족보 있다는 개 자랑을 합니다.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친구가 빙그레 웃으면서 “나는 내가 나인 것이 너무 좋아. 어떤 때는 내가 나인 것이 자랑스러워서 눈물짓곤 해.” 하였습니다. 이 친구의 말이 끝나자 시끄럽던 동창회는 잠시 동안이나마 고요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 친구의 자랑은 전혀 다른 자랑거리였습니다.

자! 여러분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자랑거리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서까지 자랑할 것이 많았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보라[blevpw/블레포]’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것은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I. 없는 자  

우리말에 ‘업신여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을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이렇게 본다면 매우 기분이 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드러나게 기분나빠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실 없는 것이 많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26절 말씀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고 말합니다. 서로 자기가 잘 났다고 편을 가르고 싸우는 그들을 향하여 인간적으로 별로 잘 난 것이 없지 않느냐는 고 직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첫 번째로 무엇이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지혜[sofov"/솝호스] 있는 자’는 헬라의 철학자들을 가리킵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헬라 철학자들처럼 교육받은 지적인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결코 그들의 학벌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27)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교만을 꾸짖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세상적으로 지혜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초기 교인들은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다가 국문을 깨우쳐서 똑똑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요즘은 설교를 많이 들어서인지 교인들이 ‘말은 잘하는 사람’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었으면 지혜가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에게 지혜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지혜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분야에서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전문가를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더욱 겸손해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 무엇이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6절 말씀에서 두 번째로 이야기 하는 것은 ‘능한 자’입니다. 여기에서 ‘능한 자[ dunatov"/뒤나토스]’는 강력한 힘이 있는 사람, 즉 권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권세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랑이 없는 굴에 토끼가 왕 노릇한다고, 고린도 교회는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로 갈라져서 자기들이 제법 힘이 있는 것처럼 서로 다투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능력이 있는 자가 많지 않다는 것은 그들의 다툼을 꾸짖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세상적으로 능력이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 아무리 유력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교회는 여전히 세상에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옛말에 ‘열흘 가는 꽃이 없고 십년 가는 권력이 없다’고 하였는데, 십년은 고사하고 오년도 버티지 못하고 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요즘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권력이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줄줄이 소환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교인이라고 해서 교회가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기독교 국회의원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8대 299명의 국회의원 중에서 기독교인 수는 112명으로 37%였는데, 이번에는 300명 국회의원 중에서 120명으로 40%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회의원 중에 몇 %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반드시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 속에서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국회의원 중에서 몇 %가 교회를 다닌다는 통계는 불교 계통이나 반(反) 기독교 단체에서 먼저 조사하여 기독교를 공격하는 도구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현실입니다.

결코 세상에는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휘두를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 무엇이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26절 말씀에서 세 번째로 이야기 하는 것은 ‘문벌 좋은 자’입니다. 여기에서 ‘문벌 좋은 자[eujgenhv"/유게네스]’라는 말은 ‘좋은 가문에 태어난 자’로써 사회적으로 상류 계급에 속한 사람, 즉 귀족을 뜻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런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28)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구성하였던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서민이나 천대받는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스스로 귀족인체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3. 우리는 세상적으로 문벌이 없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귀족은 없습니다. 다만 돈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귀족인체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물건을 파는 입장에서 마케팅전략으로 자신들의 물건을 사용하는 고객은 귀족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소비자는 명품이라는 것을 사용하면서 스스로를 귀족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지혜도 없고, 권세도 없고, 문벌도 없는 사람들이 아니냐고 직격탄을 쏘았을까요? 이것은 본래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29절 말씀입니다.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직설법을 사용한 이유는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4.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얼마나 있습니까? 권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습니까? 재산이 있으면 얼마나 있습니까?

유난히 힘이 장사인 개미가 있었습니다. 다른 개미들은 쌀 한 톨을 겨우 드는데 이 개미는 두 톨씩도 거뜬히 들었습니다. 많은 개미들이 이 힘 센 개미를 우러러보았습니다. 교만해진 개미는 넓은 세상에 나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싶어졌습니다.

개미는 사람들이 많은 시장에 가서 힘자랑을 하였습니다. 쌀 두 톨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집어던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개미를 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쌀 한 말 이고 가는 꼬부라진 할머니의 발에 밟혀 죽고 말았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그 지식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은 그 권력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돈 많은 사람은 그 돈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개미’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는 인간입니다. 교회 안에서 인간적인 것을 자랑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비웃으십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그들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에게 없는 것 말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II. 있는 것  

우리들이 없는 것만 생각한다면 인간적으로 슬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버림 받고, 왕따가 된 느낌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여야 합니다.

30절 말씀입니다.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먼저,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우리의 자존감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예수님이시라 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예수님 안에 있기에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 안에서 가지는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먼저,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있는 지혜’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으면 지혜가 있고, 예수님 안에 없으면 지혜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1.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혜가 있습니다. 앞에서는 지혜가 없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지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앞에서 세상적으로 지혜가 없다는 말은 세상에서 지적으로 그다지 탁원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헬라 철학의 계보를 꿰거나 헬라 철학자들의 논리를 헤아리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지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기에 예수님 안에서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지혜의 중요성도 인정하여야 합니다. 무식을 자랑하는 시대는 정녕 지나갔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가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각 분야의 전문가라는 말은 다른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정치 전문가가 경제에도 전문가일 수는 없습니다. 경제의 전문가가 교육의 전문가일수도 없습니다. 세상적인 지혜가 나름 필요하지만 영혼의 구원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지혜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 하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는 영적 확신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지혜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첫 번째로 무엇이 있는 사람입니까?

30절 말씀의 후반절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있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 첫 번째가 ‘의로움’입니다. 여기에서 ‘의로움[dikaiosuvnh/디카이오쉬네]’은 법정 용어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로운 존재가 아닌데, 예수님께서 대신 지신 십자가 때문에,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로운 존재로 간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의로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신 값을 지불하여 주신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의로움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의로움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 값을 치러야 합니다. 지은 죄에 대하여 재판에 의하여 벌을 받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었던 사람을 전과자라는 이유로 계속 나쁜 사람으로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죄의 값을 치른 사람은 다시 죄를 짓지 않는 한 죄인이 아닙니다. 그 죄 때문에 다시 벌을 받지 않습니다. 비록 전과는 남겠지만 벌을 받음으로 죄는 끝이 납니다. 벌금형을 받은 사람은 벌금을 내는 것으로 끝입니다. 징역형을 받는 사람은 징역형을 받음으로 끝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선언하시면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우리가 잘해서 인정받는 의로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의로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의롭게 되었다는 확신이 넘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30절 말씀에서 두 번째로 우리에게 있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의 덕분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거룩함[aJgiasmov"/하기아스모스]’이란 본래적 의미로는 ‘정화’ 즉 ‘청결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깨끗하게 씻기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거룩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거룩한 사람, 성도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는 허물 많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된 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거룩할 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계속해서 거룩해 져야 할 사람입니다.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 때문에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람으로서 살기를 결심하십시오. 거룩하신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또, 우리에게는 예수님 안에서 무엇이 있습니까?

30절 말씀에서 세 번째로 우리에게 있는 것은 ‘구원함’입니다. 여기에서 ‘구원함[ajpoluvtrwsi"/아폴뤼트로시스]’은 ‘구속 행위’, 즉 상징적으로 ‘벗어남’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치러야 할 값이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해방되었습니다. 


4.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구원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속받은 것이 싫어서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합니다. 어쩌면 종교화 된 기독교 신앙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십자가를 헬라인처럼 미련한 것으로, 유대인처럼 거리끼는 것으로(고전 1:23)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만나주시고 믿어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에게는 감당하여야 할 사명의 십자가 때문에 힘들도 지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정말로 ‘내우외환’이라는 말이 요즘 제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저를 근심하게 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 도도하게 흐르는 세상의 물결이 심각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탄식이 절로 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저에게는 솜털보다도 더 가벼운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새벽에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할 때, 밀려드는 평안을 감격하곤 합니다. 숨을 내 쉬고 들이 쉴 때, 내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근심은 날숨과 함께 사라지고, 행복한 기운이 들숨과 함께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는 이미 구원됨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31절 말씀입니다.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을 주신 것은 예레미야 9:23 이하에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고 한 것처럼, 주님을 자랑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랑하다[kaucavomai/카우카오마이]’는 말은 ‘뽐내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랑하고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는 것입니다.


5.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랑할 것이 있다는 말은 자랑의 근거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여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이루어 주신 일을 자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자랑할 것이 있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자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이루어주신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을 자랑함으로 예수님을 자랑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지혜입니까? 그러면 얼마나 똑똑하십니까? 박사학위를 몇 개나 가지고 있습니까? 능력입니까? 그러면 얼마나 권세가 있습니까?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릴 수 있습니까? 재산입니까? 그러면 얼마나 부자이십니까? 우주의 수많은 별들 중에서 지구와 같은 별을 몇 개쯤은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지혜, 능력, 문벌 어느 것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이미 의롭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이미 거룩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미 구원되었다고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일을 이루어 주신 예수님을 우리가 어찌 자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 바로 그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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