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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갈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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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갈 1:1-9)

몇 주 전 남가주 지역에서 유통되는 위조지폐로 인해 한인 업주들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요즘 위조지폐의 대부분이 1달러나 5달러짜리 지폐를 화학약품에 담가 잉크를 빼낸 뒤 그 위에 고액지폐를 인쇄하는 방식으로 제조되고 있어 재질 자체는 진짜 지폐와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흔히 업주들이 위폐 감별을 위해 사용하는 요오드펜 검사에서도 문제가 없는 경우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 특별한 주의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위폐를 발견한 업주는 위폐 액수에 대한 보상을 받긴 힘들지만, 은행과 비밀경호국에서 주는 서류를 보관하고 있다가 세금보고 때 제출하면 해당 액수는 수입에서 공제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업주가 위폐임을 알고서도 고의로 위폐를 재유통시켰다가 적발되면 최대 20년형에 처해질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는 게 연방 당국의 설명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합니다.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집니다. 네가 기준이니 네가 옳은 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그러니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겁니다. 사사 시대의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했는데 오늘날 세대의 모습이 그때와 비슷합니다. 구원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믿는 종교에 구원이 있느냐 내가 믿는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믿든 간섭하지 말고 네가 믿는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편협하게 굴지 말라고 합니다.  

화려한 포장이나 광고를 통하여 짝퉁을 더 진짜 같이 보이게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영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속이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적그리스도가 있고 선지자에 대항하여 거짓 선지자가 있습니다. 복음이 있으니 유사복음이 존재합니다. 유사복음에 물들면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사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입술로는 자기들도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 부르고, 오직 예수님 한 분 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들의 삶을 보면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무엇인가 자기에게 만족을 줄만한 다른 무엇들을 여럿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의 길로 확실하게 가고 있습니까? 혹시 짝퉁을 붙들고 있으면서 진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처럼 갈라디아의 교회에 침투한 것이 바로 이 유사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말하지만 예수님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은혜를 말하지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믿음을 말하지만 그리스도만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주장하고 또 거기에 미혹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동기 

바울은 일차 전도여행 때 바나바와 더불어 지금의 터어키 남방인 갈라디아 지방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들을 개척하였습니다. 제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두 번째로 갈라디아 지방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에 갈라디아 교회에는 복음이 아닌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침투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왜곡하여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직접 파송 받은 진정한 권위를 가진 자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을 흔히 유대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제 막 믿음생활을 시작한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믿음과 더불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율법에서 떠난 복음이며 그의 사도권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의 공격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많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미혹되었습니다. 

일부 교인들은 바울을 떠나 다른 복음을 좇아갔으며 (1:6),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대적자들은 바울을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한 사역자로 몰아갔으며 (1:10), 그가 전한 복음은 바울이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1:11). 

이러한 소식이 바울의 귀에 들려오자 바울은 그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 자신을 변화시켰던 복음, 자신이 전했던 참된 복음에서 떠나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함께 한 믿음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간절하게 기도를 한 후 갈라디아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어떻게 변호하는지, 다른 복음을 따르면 어떻게 되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하는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1:1-5)

사도권의 변호(1:1-2)

바울이 편지 서두에서 자신을 어떻게 밝힙니까?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 왜 바울 앞에 수식어가 길게 붙어 있습니까? 바울을 비난한 선동자들은 바울의 사도성의 진위여부를 들먹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1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  간단합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베드로가 사도임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통상적으로 사도로 인정받기 위한 자격: 공생애 기간 중 주님과 함께 있던 자,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본 자,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과 더불어 있지도 않았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아니하였고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을 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교회들에게 편지할 때는 반드시 그 서두에 자신의 사도된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을 꼭 밝히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합니다. 

더구나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편지를 보낸다고 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떠나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과 함께 하는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은 바울의 주장에 신뢰성을 더해줍니다.  

변화받기 전의 바울은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그는 길리기아 다소라는 곳에서 출생,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 원래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에 대한 열심이 있던 유대인이었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는 역할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하게 되었는지 사도행전에는 9장, 22장, 26장에 걸쳐 세 번씩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가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강렬한 빛이 바울을 비추자 바울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바울은 “주여 뉘시오니이까?” 물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나는 네게 핍박하는 예수라” 눈이 멀고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다가 아나니아 라는 사람의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며 다시 보게 된 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저것 다해 보고나서 마지막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사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시켜서 마지못하여 사도가 된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와 친분이 있는 가를 내세우며 목에 힘을 줍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때야 합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 등 이른 바 기둥 같이 여기는 사도들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가 보내신 일꾼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복음 전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이러한 확신에 찬 고백은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된 것도, 내가 사역부장을 맡고, 목자가 된 것도, 찬양대원이 되고, 주일학교 교사가 된 것도, 주일에 식사당번을 맡게 된 것도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이라는 부르심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직분에 대한 자부심,  맡겨주신 사역에 대한 자부심, 사명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하던 일도 팽개칠 수 있습니다. 어떤 직분을 맡았다고, 어떤 일을 한다고 자만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족한 나를 불러서 하나님의 일을 맡겨주신 것을 인하여 항상 감사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들을 향한 축복(1:3-5)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면서 성도들을 축복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표현하며, “평강”은 그 선물이 각 개인에게 적용된 결과를 가리킵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 부족한 내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이 생겼을까? 우연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 그 뒤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과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평강은 단순히 기분이 좋고 육신이 편안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풀려지고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아들 예수께서 사탄의 권세 아래 놓여있던 우리를 구출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결과, 우리가 이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 안에 살지만 더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며, 죄에 매여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내 모든 죄를 제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마땅히 영광을 돌리며, 오늘 하루도 그분이 행하신 일을 감사함으로 누리고, 내가 가는 곳마다 그분의 영광이 선포되기를 열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 일입니다. 그 제물은 속죄제물이요, 또한 화목제물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희생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이 속죄의 희생으로 인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가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에게 죄사함만 가져다 준 것이 아니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로서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사는 삶을 가져다주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되신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하나님에 의하여 그가 부활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이루어지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것이기에 ‘다른 복음’은 필요 없으며 구원을 얻기 위한 또 다른 요소가 필요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2. 복음에 대한 확신(1:6-9) 

대적자들의 정체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그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은 어리석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소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그들의 주장을 ‘다른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고, 교인들도 바울의 복음과 잘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했기에 ‘속히’(1:6) 떠난 것, 또 바울이 굳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그것이 그들이 가진 권위의 근거였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은 예수님을 믿는 자일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로서, 우선 할례부터 행해서 유대인의 계보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갈라디아인들은 할례, 음식법, 절기 등을 지키지 않는 등 부족한 자들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들과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 잠시 머물렀기에 바울의 복음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다 듣지 못한 갈라디아인들은 율법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할례를 행하고 음식법이나 유대교 절기들도 지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적자들은 실제 예루살렘 사도들이 보낸 자들이 아니며, 사도들보다 훨씬 더 엄격한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바리새파 유대인 그리스도인인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단의 주요 전략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면서 복음을 변질시키려고 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사단의 도구가 되어 바울이 전한 복음을 의심하게 하고 그의 사도성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복음을 은혜의 복음과 다른 복음으로 구분합니다. 

은혜의 복음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교우들에게 전하여준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해결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이 주어진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반면에 다른 복음은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전하여 준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믿음과 행위, 은혜와 율법을 섞어 넣은 변질된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저버리고 율법을 추가로 지킴으로서 구원을 얻는다는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어 다른 복음을 좇는 자들을 이상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속히 떠나” (6절)라는 말은 군사적인 용어로 탈영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말합니다. 

군인이 싸우기 싫다고 탈영을 하면 영창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군사들입니다. 바울은 부름 받은 군사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많은 수고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아마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주의자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나 하나님을 떠난다고 생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떠나다’에 해당되는 동사가 현재시제를 취하고 있으므로 지금도 그들 중에 떠나는 자들이 있지만 아직 모든 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상태는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에 여전히 충실한 교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대적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의 결과, 일부 교인들은 참된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다른 복음을 좇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분입니다. 그것은 단지 교회 안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속으로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왜곡하거나, 다른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그를 떠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교인들 중의 일부는 ‘다른 복음’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다른 복음이 아예 복음도 아니며,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1:7).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방법이나 형식은 달라질 수 있으나 복음의 핵심은 변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가 예비하신 구원에 참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참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의 죄가 해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졌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새로운 은혜의 길을 주셨는데 또 다른 구원의 조건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바울은 8절과 9절에서 중복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명료하게 강조합니다. 바울 자신이나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바울이 전한 복음’ 곧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받은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저주”는 본래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벌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장 가혹한 형벌입니다. 심지어 바울 자신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이전에 전한 복음을 바꿀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 말은 사도권을 가진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할 뿐이지, 자기의 사도권이 복음을 초월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거기에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요란케 하는 자들이 누구든지, 그들이 심지어 사도들이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는 것이 곧 바울에게 사도직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심지어 그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라고 권고합니다(4:30). 

* 우리의 자세 

복음을 바르게 붙들어야 합니다

위조지폐를 분별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세상에 통용되는 위조지폐를 다 모아서 보여주어야 합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새로운 위조지폐는 앞으로도 계속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훈련을 시켜야 진짜지폐와 위조지폐를 분별해 낼 수 있습니까? 감정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짜 지폐만 계속 관찰하게 합니다. 그러면 진짜 지폐와는 다른 위조지폐를 분별하게 된다고 합니다. 유사 복음이나 다른 복음을 어떻게 분별합니까? 세상에 나도는 소위 복읍이라는 것들을 다 모아 보여주어야 합니까? 진짜 복음을 대하게 하면 됩니다. 진짜 복음을 붙들면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강력하게 변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주된 관심사는 사도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정당성에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과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부활을 기초로 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권위를 위임받았다는 사도나 하늘에서 왔다는 천사나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보다 더 자비로운 것처럼 누구나 결국은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의 물결 속에 휘말리는 오늘날 복음의 진수를 흐리거나 고치려는 시도는 계속해서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주장은 우리에게 도전이 되고 강력한 경고가 됩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바른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회복시켜야 합니다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문제로 갈라디아 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교회 아니면 없나 하며 그들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을 떠나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자기가 수고한 것이 헛된 지경에 이르렀을지라도, 비록 저주를 선포하는 처지에서라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형제들아’ ‘나의 자녀들아’라고 부르면서,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그들을 위해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하는 바울의 자세는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됩니다. 

우리 주변에 아직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접하기는 했지만 유사복음에 유혹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에 든든히 선뒤 우리 주변을 돌아보아 연약한 자들을 복음으로 회복시켜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신앙이란 그가 나를 위하여 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고전 15:3-4,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심.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의 핵심인 것을 강조합니다. 주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그 그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제 내가 그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구원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도 복음을 변질시키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허물려는 사탄의 시도는 계속됩니다. 바른 복음을 붙들고 우리 자신부터 바른 복음의 기초 위에 든든히 설 뿐 아니라 생명의 복음으로 우리의 이웃에 다가가서 복음을 나누며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회복시켜야 합니다. 이런 자세로 살아갈 때 성도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풍성히 임합니다. 

2012년도 벌써 절반이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위로와 인도함을 받으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짓는 복된 성도들, 그리고 일생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에녹과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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