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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이름으로 살기 (5) (시 131:1-3, 롬 12: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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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이름으로 살기 (5) (시 131:1-3, 롬 12:14-18)


오늘 세상을 예수 이름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예수 이름을 걸고 살아가려면 그만한 역할이 있어야 하고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늘은 나의 신앙을 고백하며 살아가려면 대단한 용기와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의 삶을 드러내 놓고 공개하지 못하고 숨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삶에 용기와 역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삶은 영적인 삶입니다. 영적인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니면 자꾸만 소극적이 되고 형식화되기가 쉽습니다. 역할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강조합니다. 영적 생활을 해 나가려면 도전해 오는 것들이 많습니다. 먼저 외적으로 도전해 오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사탄의 도전이 심각합니다. 오늘의 문화가 영적인 삶과는 정반대의 문화입니다. 신앙의 삶과 동떨어진 문화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문화에 휩쓸리게 되고 깊이 빠지게 되고 결국 주일을 멀리하게 됩니다. 오늘의 문화는 우리들이 영적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이 주일날 교회에 와 예배드리는 것은 대단한 행동이고 결단입니다. 그만큼 오늘은 영적인 생활하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런가 하면 내적으로 내 자신으로부터 오는 도전도 심각합니다. 내 안에는 온갖 유혹의 뿌리와 욕망의 뿌리와 거짓의 속성들로 가득합니다. 이 죄성의 뿌리가 너무 깊습니다. 이 요소들이 환경이나 조건이 조성되게 되면 지체 없이 고개를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유혹받고 시험받고 넘어가고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환경이 조성되면 빨리 도망해야 합니다. 그 환경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안에서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이 욕망의 뿌리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II

본문은 로마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시대에는 핍박이 많았습니다. 회유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핍박을 피하여 살았고 숨어 살았습니다. 본문은 그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강조합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핍박자들에게는 절대로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한 일을 도모하고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자칫 핍박자들을 증오하고 복수심에 저주하게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당시 핍박자들까지도 저주하지 말고 복수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또 집권자들에 항거하고 봉기하고 전복하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더 큰 화를 불러오게 된다고 염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13장을 보면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고 강조합니다. 그 말은 단순 복종이 아니고 때를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군사정권 시절에 이 구절가지고 왜 권세자들에게 순종하라고 했는데 자꾸 데모하느냐고 압력을 넣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본문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면에서 지혜로워야 합니다. 시대마다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다릅니다. 사도바울 당시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 인내의 삶이었고 순교하는 삶이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어주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원수를 주께 맡기고,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선을 도모하며 할 수 있는 대로 화목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할 십자가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생활을 충실하게 유지하는 삶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영적인 삶을 충실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날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일을 지나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예배와 하나님을 향한 생각이나 마음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게 됩니다. 일주일 동안 분주하게 살아가면서 주일처럼 주님을 생각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선데이 크리스찬들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어느 성도가 성령의 은혜를 뜨겁게 받았습니다. 그 뒤로는 다시 그런 경험이 없었다고 합니다. “왜, 어떻게 살았길래 그러냐”고 물으니 “그냥 감사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남다른 은혜를 주신 것은 그만큼 할 일이 있어서 주셨을 것입니다. 증인의 삶을 살아가라고 주셨을 것입니다. 고백의 삶을 살고 증인의 삶을 살라고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으니까 그만 그 뜨겁게 주신 영성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샘도 퍼내지 않으면 마릅니다. 샘은 자꾸만 퍼내야 새로운 생수가 고이게 됩니다. 은사도 활용하지 않으면 녹이 습니다. 은혜입은 사람은 입은 수준의 생활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그 영적인 수준이 계속 유지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주일 내내 우리들이 주일 수준을 유지하며 예수 안에서 건강한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요즘 독일과 스위스에서는 “월요일의 신앙”이라는 모토로 일상생활 속에서 내가 크리스천임을 드러내고 온전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운동의 제안자는 롤란트 베르너 박사(Roland Wernet)인데 일상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더 잘 실천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열 가지 방법입니다. 

III

첫 번째는 성경을 항상 지니고 다니기 입니다. 성경을 항상 지니고 다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필요할 때 언제나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지니고 있음”, 이것은 두 가지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하나는 남에게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의 삶과 증인의 삶과 증거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일부러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 자체로서 나는 그리스도인임을 공개하고 고백하고 증인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 자신에게 말씀과 가까운 삶을 살게 하고 말씀을 잊지 않게 하고 영적으로 나를 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도중에 넘어진 사람들이 있고 탈락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말씀을 멀리하였거나 소홀히 한 사람들입니다. 촛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어두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옆에 있는 시종에게 항상 해골을 들고 따라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대왕이 술에 취하면 시종은 “폐하 폐하는 죽을 몸임을 기억하소서”라고 읊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대왕은 주연상을 물렸다고 합니다. 지혜있는 임금입니다. 그냥 읊조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해골이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감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내 옆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구체적이 됩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때 사탄이 찾아와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물리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말씀을 멀리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유사시 흔들림이 큰 것입니다. 조그만 일에도 흔들림이 큽니다. 그러다 넘어지게 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살면 넘어져도 곧 일어설 수 있습니다. 성경을 항상 지니고 살아간다면 그만큼 나 자신을 더 확고하게 붙잡아 줄 것입니다. 

다음은 이웃과 인사 나누기입니다. 오늘 이웃은 벽이 너무 높습니다. 옛날 시골생활 할 때는 이웃은 가장 좋은 사촌이었습니다. 그때는 이웃집의 모든 가정사나 가정 형편까지도 잘 알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웃은 가장 가까이 살면서도 가장 멀리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아파트에 살면 이웃을 자주 만납니다. 만나면 인사하면 참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됩니다. 이 일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도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러면 그 집단에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작심하고 인사하기 운동을 펼치면 그곳에 새로운 문화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먼저 인사하고 다가가면 좋을 것입니다. 참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마음이 즐거우면 상대의 마음도 즐거워집니다. 혼자 왔다가 조용히 그냥 돌아가면 편할 것 같아도 무미건조한 삶이 됩니다. 교회에 수년을 왔다 갔어도 이웃을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느 부부는 언제나 조용히 와서 예배드리고 조용히 나가 둘이서만 같이 식사를 합니다. 이웃 아무도 모릅니다. 도움을 주지도 않았고 도움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그렇게 살면 외로워집니다. 

어느 날 남편이 병원에 입원을 해서 큰 수술을 했습니다. 아무도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세상을 떠나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명이 부여된 삶입니다. 그것이 도움을 주는 삶입니다. 때로는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나누고 주는 삶입니다. 그것이 건강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문화를 주도 하고 적극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밝아질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모르는 사람에게 복을 빌기입니다. 인사하기도 힘든데 복을 빌기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생소하게 만나는 사람들이 어쩌면 그리스도인일지도 모릅니다. 또 앞으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오늘은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내일 나에게 어떤 사람으로 다가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서로 인사하고 더 나아가 복을 빌자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가 가장 중요한 사람인가 라는 질문을 받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네 앞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장차 내게 어떤 사람으로 다가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수동적이 아니고 능동적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시도하고 먼저 찾아가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굴은 모르지만 만나면 복을 빌라는 것입니다. 나의 말 한마디는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감동 줄 수도 있습니다. 생각을 밝게 마음을 행복하게 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후에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를 살면서 너무 쩨쩨하고 인색해서도 안됩니다. 너무 지나치게 절약하는 것도 궁상입니다. 나를 위해서 절약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도 너무 지나치게 인색한 것은 선이 아닙니다. 당시 로마시대에 핍박자에게도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주깨 맡기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매일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이고 행동하는 자세입니다. 

네 번째는 예수님 이야기하기 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예배드리는 것만으로 다가 아닙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상 속에서 그리고 우리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늘 신앙 이야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교회 문을 나서면 그 시간부터 신앙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주일 예배가 끝난 후 월요일부터 한 주간 동안 일주일 내내 신앙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매일 세상적인 일에 관심 갖고 대화하고 분주한 생활에 깊이 빠져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영적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가 힘들게 됩니다. 사람은 삶의 내용이나 언어생활과 습관이 삶의 모양을 만들게 됩니다. 평소 내가 사용하는 언어와 관심과 놀이와 삶의 우선순위가 내 삶의 내용을 만듭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이웃을 만날 때 서로 신앙이야기를 하고 신앙 간증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소의 삶에 신앙의 삶과 관심과 대화가 그대로 나타나고 이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영적생활이 삶에 그대로 나타나 삶의 모습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승려들의 도박 파문이 볼성사납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일들이 발생하는가 하면 그 승려들의 평소 관심이 도박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승려는 해명하려 나와서 화투는 치매에 좋다고 말했습니다. 치매에 좋은 놀이 중에 화투 말고도 많습니다. 치매에 좋다고 꼭 화투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세속화된 놀이를 즐기게 되면 반드시 돈과 연관되게 되어 놀음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생각, 내 마음속에 온갖 놀음놀이로 가득 차 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승려들이 모여 아주 자연스럽게 판을 벌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건도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악한 습관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평소 사람이 어떤 놀이를 즐기느냐에 따라 내 마음, 언어, 생각에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많은 대화들 속에 신앙 간증, 신앙고백, 예수에 대한 대화를 유도하는 것도 내 신앙을 매일같이 유지하는데 필요한 방안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전도가 될 수 있고 적극적인 고백의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 자신의 신앙 간증이나 신앙 고백이 이렇게 중요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공개적으로 기독교적 일정을 이야기하기 입니다. 친구가 내일 만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때 내일 볼일이 있고 바빠서 안 되겠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내일은 주일이라서 예배 드려야 하니까 시간이 없다”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내일 나는 기도모임에 나가기로 약속되어 있어”, “내일 자원 봉사하는 날이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내일은 예배드리는 날이야”,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처음에는 이해를 잘 안될지 모르지만 그런데 그 말 한마디는 상대방 마음에 깊은 메시지가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른 후에는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그 사람이라면 내가 없을 때 내 이야기는 하지 않을꺼야”하고 믿어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믿고 싶다”는 마음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도 봉사도 선행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 한마디로 내안의 중심이 발휘되고 표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일 만나자”, “내일은 주일이라 예배 드려야 해”, “그 날은 자원봉사 하는 날이야”, 그렇게 내 중심을 확고하게 표현하게 되면 두 가지 메시지가 표현되게 됩니다. 하나는 너에게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아 저 사람은 중심 있는 사람이군”, “아 저 사람은 틀림없는 사람이겠군”, “아 저 사람은 신실한 예수 믿는 사람이군”하고 타인에게 강한 암시와 메시지가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 자신에게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그렇게 고백하였으면 자기 자신에게 “나는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해”, “더 긴장해야 해”라는 메시지가 자신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신앙적 일정을 소개하라는 것입니다. 

한 주간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매일 예수 안에서 영적 삶으로 살아보려고 힘써 보십시오. 주일 예배드리고 월요일부터 다음 주일까지 신앙의 삶이 충만하도록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예수 안에서 승리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삶이 오늘 내일 한 주 한 주 쌓이게 되면 충실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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