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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 (롬 1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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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 (롬 15:1-13)

1. B.C.985년경, 다윗 왕 통치 시절입니다. 다윗 왕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있었는데, 그처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 잡을 데가 하나도 없는 완벽한 미남은 없다고, 전 이스라엘에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로 인해 압살롬이 백성들의 존경과 갈채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압살롬은 머리숱이 많고 빨리 자랐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머리털은 힘과 미(美)의 상징이었습니다. 

‘숱이 많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신비로움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머리털이 빨리 자란다.’는 것은 삼손의 경우처럼 힘의 왕성함(삿 16:17)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긴 머리털은 왕다운 자태와 위용의 상징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이러한 자신의 빼어난 신체와 더불어 음흉한 생각을 품고 백성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민심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 다윗 왕에 반역합니다. 다윗 왕은 압살롬의 반란을 자식들을 잘못 가르친데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깨달았습니다. 압살롬이 반란 수년 전에, 자신의 친누이 다말을 강간한 맏형 암논을 살인한 것을 다윗이 방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에 따라 처리하지 않고 방관한 데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반란군을 제압하려다 수많은 백성들이 죽게 될 것이 염려되어 예루살렘을 뒤로 하고 도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요압 장군에 의해 반란군들이 진압되기 시작합니다. 압살롬 역시 견디지 못하고 노새를 타고 도망가다 가지가 무성한 큰 상수리나무 아래로 노새가 지나갈 때 압살롬의 머리가 그 나뭇가지에 걸려 노새는 그냥 달아나고 그는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이 때 반란군을 추격하던 요압 장군이 이 사실을 알고 달려가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아직 살아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이어 병사들이 달려들어 압살롬을 쳐서 완전히 죽여 그 시체를 숲속의 깊은 구덩이에 던져 넣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아마 그 자랑스러운 머리털, 왕권을 상징했던 머리털만 아니었더라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압살롬이 살아 있을 때 자기 이름을 전하기 위해 자기 기념비를 세웠던 ‘왕의 골짜기’(압살롬의 기념비)라는 곳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영광을 기념하고 자기 이름을 길이 남기기 위해 세웠던 기념비가 자신의 수치와 불명예스러운 돌무더기 무덤이 될 줄을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삼하18:1-18)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고, 자신의 어떤 업적을 통해 이름을 내고 자신이 그 영광을 누리고자 하면 반드시 돌이킬 수 없는 패망과 수치를 당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창세기11장에 보면, 당대에 인간의 최고 기술을 자랑하는 마천루(摩天樓), 바벨탑을 세워 자신들의 이름을 날리고자 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인간이 자신의 기념비를 세워 스스로 영광을 취하고자 하면 결국 망하는 법입니다. 

(창11:1-9)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A.D.45년경 헤롯 왕이 축제일에 은으로 만든 빛나는 옷을 입고 연설할 때, 그 옷이 햇빛에 빛나자 아첨꾼들이 그를 신(神)으로 추대하여 소리쳤습니다. “(행12:22)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이렇게 군중들이 자신을 추켜세우는 함성을 듣고 마치 신처럼 행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러자 즉시로 주의 천사가 헤롯을 내리치자 그는 벌레에게 먹혀서, 죽고 말았습니다.

(행12:21-23)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만 그 영광을 돌리고 경배해야만 합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시29:1-3)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군 천사들이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목적도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 전서 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고, 사도 베드로 역시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전 2:11)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비단 먹고 마시는 일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모든 것을 형통하도록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고 살든, 살든지 죽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마침내 형통하여 영광스러운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복된 삶은 먼저,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해야합니다.”(롬15:1-2) 

사도 바울도 고린도 전서 10:32에서,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고 했습니다. 

우리 정치, 경제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보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눌림에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물세계의 약육강식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치관마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약점을 파고 들어 폭로하고 짓밟아야 승리자, 성공자인 양 인식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스럽게 여기시는 복된 삶은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신보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 믿는 성도들은 반드시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져주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여기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보살펴 주고,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며, 이웃을 기쁘게 하여 서로 유익하게 하고 덕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행할 때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마음이 서로 하나가 됩니다. 이웃들과 하나되는 생활방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진 자가 가난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때 그들 마음이 하나되어 덕을 세우는 사회가 됩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의 약점을 담당할 때 그 마음이 하나되어 덕을 세우는 사회가 됩니다. 더 나아가 힘 있는 대기업이 약한 중소기업의 약점을 담당하는 기업 풍토가 이루어질 때 건강하고 튼튼한 기업들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살아갈 때 덕망있는 행복한 가정과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물론하고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이웃을 기쁘게 할 때 마음이 하나되어 행복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이 바로 덕을 세우는 삶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스럽게 여기시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기 위해,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가장 적절한 비유로 설명한 하나님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2:20-27을 보겠습니다. “그래서 지체는 많아도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너는 내게 필요 없다.’ 고 하거나 머리가 발에게 ‘너는 내게 필요 없다.’ 고 할 수 없습니다. 몸 가운데 약해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더 필요합니다. 우리는 몸 가운데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부분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또 별로 아름답지 못할 부분을 더욱 아름답게 꾸밉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부분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찮은 부분을 더욱 귀하게 여겨 몸의 조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몸 안에 분열이 없이 모든 지체가 서로 도와 나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몸의 각 지체입니다.”

약해 보이는 지체,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부분, 별로 아름답지 못한 부분, 하찮은 부분 등 이들을 더욱 필요로 하고,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더욱 귀하게 여겨 조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는 것이 바로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생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몸의 각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몸”이란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을 주고 산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바로 나와 너를 사랑으로 화해하고 또 만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에 깨어진 남편과 아내가 ‘우리’로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에 이웃 형제들과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 민족과 민족 사이에 새로운 ‘우리’가 탄생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하나가 되게 하는 곳입니다. 가정과 이웃, 민족과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하나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통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입니다. 약해 보이는 지체,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부분, 별로 아름답지 못한 부분, 하찮은 부분 등 이들을 더욱 필요로 하고,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더욱 귀하게 여겨 조화를 이루어 나갈 때, 모든 분열이 사라지고 하나되는 복된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동서의 분열, 지방색의 분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담, 민족과 민족 간의 벽이 허물어지고 화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희생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12-19을 보겠습니다.

(엡2:12-19)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사랑으로 서로 하나되어 덕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성도 여러분과 이 나라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12:1-3)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자 아브라함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대로 고향을 떠날 때 조카 롯도 함께 동행했었는데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자 롯도 더불어 거부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거하는 땅이 함께 머물기에는 너무 좁았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말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얼마든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돌려 세울 수도 있지만, 서로의 화목을 위해 모든 것을 롯에게 양보하고 롯이 기뻐하는 대로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롯은 당시 에덴 동산같은 땅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해서 그곳으로 떠났습니다. 조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간 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창세기13:14-17입니다.

(창13:14-17)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아브라함은 과연 오늘 본문 말씀대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여, 서로에 유익하게 하고 덕을 세우는 믿음의 조상으로써, 아름다운 믿음의 덕망을 보여준 것입니다. 믿음의 덕을 세운 아브라함은 처음보다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덕을 세우는 삶으로 아브라함과 같은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서로 약점을 담당하고 짐을 져주는 생활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전지전능하시고 지극히 성결하신 예수께서 인간의 무거운 죄의 짐을 대신 져주시고자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희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짐을 지게 될 때, 그를 두고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따를 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됩니다. 서로 짐을 져주는 덕을 세워 그리스도의 법,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삶으로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으로 영광스럽고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다음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인내와 안위의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소망의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본문 5-6절을 보겠습니다. 

(롬15:5-6)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던 것”을 본 받아 남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야만 합니다. 결코 내 능력,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의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깨닫고 인내의 힘을 얻어서 소망과 안위를 받고 말씀의 힘으로 덕을 세우는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덧입게 될 때 남을 기쁘게 하되 선과 덕을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된 우리를 받아들인 것처럼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처럼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면 용서 못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남을 용서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신 그 깊이와 충만함을 아직도 깨닫지 못했거나 진실된 회개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끝없는 용서와 사랑으로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용서와 사랑은 한 인간의 인격에서 나오는 덕행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덕입니다. T.S.엘리옷은 현대인을 가리켜 ‘텅 빈 사람이요 충만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있어야 할 믿음, 소망, 사랑은 텅 비었고, 없어야 할 미움, 질투, 시기, 죄악은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셔야 기쁨을 서로 나누고 누리며, 평강을 주셔야 평강을 서로 나누고 누릴 수가 있으며 성령으로 충만케 해야만 소망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이 소망이 있고서야 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말씀과 은혜로, 사랑과 소망으로 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영광스러운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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