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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단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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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단 3:13-18) 
 
  
13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말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제아무리 불신사조가 팽배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오늘도 믿고 버스를 타고, 믿고 약을 사먹고, 또 믿고서 아내가 지어주는 밥을 먹고, 그리고 믿고 이발사에게 목을 맡기게 됩니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믿음을 가리켜 일반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직 신학에서는 믿음의 종류를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 역사적인 신앙인데, 이것은 아무런 도덕적이나 영적인 목적을 가지지 않은, 순전히 지성적인 진리의 인식을 말합니다. 성경의 사실들을 마치 6.25나 8.15와 같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들로만 인정하고, 진리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여, 심령에 변화가 없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죽은 신앙을 말합니다.

둘째로, 임시적인 신앙인데, 이는 복음을 듣고 참으로 회개하지는 않지만, 일시적으로 감화를 받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기쁨과 평안을 맛보기도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 신앙은 영구하지 못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곧 넘어지고 말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 임시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곧 주님의 ‘씨 뿌리는 비유’ 가운데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같은 신앙을 말합니다. 이러한 임시적 신앙은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셋째로, 이적적인 신앙인데, 이 신앙은 능동적으로 자신이 이적을 행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하고, 수동적으로 자신에게 이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믿기도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역사적 신앙이나, 임시적 신앙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지만, 이적적 신앙은 어떤 경우에는 구원받을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받을 수 없기도 한 점에서 다릅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나 요한, 사도 바울 같은 분들은 능동적인 이적적 신앙을 소유했던 사람들로서, 그들의 구원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경우 그도 이적을 행한 것으로 보여지나, 구원에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 중 아홉 명은 병 고침을 받았어도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넷째로, 구원적 신앙인데, 이 신앙은 선택받고, 부름 받고, 중생한 심령에 자리 잡은 생명이 있는 신앙을 말합니다. 유명한 조직신학자 ‘루이스 벌콥’은 “구원적 신앙이란, 성령의 역사로 복음 진리에 대해 가지는 견고한 확신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심적 의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제가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미 진정한 구원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우리 모두 피차 더 큰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서, 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진정한 성도라고 하면 누구나 더 크고, 더 아름답고, 더 귀한 믿음을 갖기 원하는 염원이 다 있는 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믿음이 적은 믿음이고, 어떠한 믿음이 보다 큰 믿음인가? 그 실례를 성경에서 몇 가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 8장에 보면, 한 백부장의 큰 믿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중풍 병으로 고생하는 한 하인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간구하기를 “주여, 제 하인이 중풍 병으로 몹시 괴로워하나이다.”고 하면서, 하인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을 간청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즉석에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는 주님의 흔쾌한 대답을 듣고, 싱글벙글 좋아해야 할 백부장은, 뜻밖에 다음과 같이 사양을 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내가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우리는 이 기사에서 보잘 것 없는 하인에게 대한 백부장의 사랑, 예수님을 진정으로 높이는 겸손, 주님께서 오심을 감당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생각, 예수님의 수고를 덜어드리는 따뜻한 마음씨 등, 얼마든지 백부장의 아름다운 신앙과 인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말씀만으로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라고 한 백부장의 말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시공을 초월한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믿는 백부장의 큰 믿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요11장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마르다?마리아 자매의 대조적인 믿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라비 나사로가 병들자, 사람을 보내어 속히 예수님께서 오셔주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병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병임을 아신 주님께서는, 일부러 이틀을 더 지체하셨다가, 나사로가 죽은 후에야 그들의 집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 때에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에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고 하면서 섭섭한 마음, 원망 섞인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주께서 이제라도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시니까 “마지막 날 부활에는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하면서 동문서답과 같은 답변을 합니다. 이 기사를 보면 마르다?마리아의 자매는, 예수님을 시공을 초월한 절대자로 믿지는 못한 것 같고, 생명의 주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하신 말씀을 듣고도, 마지막 날에는 살줄을 믿지만 지금은 죽은 오라비를 다시 살리라고 믿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백부장의 믿음과,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을 비교해보면,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요20:28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한 도마의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이 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쌍벽을 이루는 위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습니까?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숨을 죽이고 숨어있을 때, 돌연히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시면서, 못 박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놀람과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얼마 후 밖에서 돌아온 도마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정말 주님이 다시 살아나시고, 우리에게 다녀가셨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모아 열심히 증거 했습니다. 그러나 도마의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3년여 동안이나 직접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숱한 이적과 권능을 직접 체험하고, 또 주님 자신이 친히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여러 번 예고해 주셨는데도, 도마의 신앙은 이 정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 후 여드레를 지나 주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시며 축복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는 유명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에게 한마디 칭찬의 말씀이 없으신 채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복 되도다 하신 말씀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의 믿음이 더 크기 때문에, 더 복되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들의 믿음은 도마의 믿음보다 크고, 그래서 도마보다 분명히 더 복이 많은 사람들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기왕에 도마보다 더 큰 믿음을 소유한 우리들에게,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믿음을 주셨으면 하는 것이, 오늘 아침 말씀의 주제입니다.

본문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의 크고 귀한 믿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느브갓네살 왕이, 높이가 60 규빗이나 되는 커다란 금신상을 만들어 두라 평지에 세우고, 그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팔소리가 나면 엎드려 “느브갓네살 왕의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는 추상같은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드디어 나팔소리가 울리자, 바벨론 각 도의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가와, 각도의 모든 관원과, 백성과, 모든 방언 하는 자들이 모두 엎드려 절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만은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리지도 않았고, 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당장에 그 사실이 느브갓네살 왕에게 고발되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노발대발하면서, 그들을 잡아 끌어내어 한 번 더 선택의 기회를 주면서 “이제라도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지울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라고 하며, 온갖 위협을 가했습니다. 

절대 군주인 느브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만일 이번에도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풀무불 가운데 던져 넣겠다고 하면서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의 답변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왕의 말을 듣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를 “느브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우리가 섬기는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얼마나 시원하고 통쾌한 대답입니까? “당신이 만일 우리를 불 가운데 던져 넣는다면,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성도 여러분! 험한 시험 물속에서 하나님이 능히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까? 극렬히 타는 플무불 같은 시험 중에서도, 하나님이 능히 건져주실 것을 믿습니까? 낭패와 실망 중에서도, 하나님이 능히 재기 시켜주실 것을 믿습니까? 의사가 이미 손들어 버린 중한 병이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고쳐주실 것을 믿습니까? 가난과 궁핍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능히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까?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크고 귀한 믿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더 큰 믿음을 보십시오. ‘‘우리가 섬기는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한 고백인 것입니다. 그들을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한 다니엘의 세 친구는, 자신들이 비록 폭군 느브갓네살에 의해 풀무불 가운데 던져져서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겠다는 놀라운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영국의 대설교가 스펄전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당신의 의무는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하나님이 감당할 일입니다. 비록 하늘이 무너져도 옳은 일을 행하고,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그리스도의 명령을 행하는 것이, 당신과 나의 할 일입니다. 당신은 결과에 신경을 쓰십니까? 그것이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선한 사람은 자신의 주님께 순종하고, 그 분의 진리에 충성합니다.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의로운 자가 되고 두려워 마십시오. 결과는 하나님의 일이지 당신의 일이 아닙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 말은 분명히 풀무불 가운데서의 구원을 확신하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자신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이나,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생명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겠다는 큰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우리 송정 중앙교회 성도들에게, 바로 이러한 믿음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얼른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이 정말로 계실까 안 계실까 하면서, 예수 믿기 전과 다름없이 의심을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질병을 꼭 고쳐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다가, 얼른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이 어디 계신단 말인가? 기도해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꼭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쳐 주시고, 사업을 성공케 해주시고, 만사형통케 해주셔야만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꼭 그렇게만 나타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 집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였습니까? 복음을 전하면서 춥고 헐벗고 굶주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안 계셔서 그 고난을 겪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의 생명을 왜 안 구해주시고, 그토록 충성스런 사도 바울의 가시와 같은 질병을 왜 안 고쳐주셨습니까? 여기서 그 까닭을 다 말씀드릴 수 없고, 또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은, 하나님이 스데반 집사를 사랑하셨고, 사도 바울을 극진히 사랑하셨음을 확신합니다.

질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시는 성도들을 봅니다. 그리고 때로는 끝끝내 고침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부름 받는 성도들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다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그것이 그 자신과, 또는 그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부르신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충성해야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생각할 때, 온 천하 만물 다 드려도 갚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요, 만입이 있어도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다 찬송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은혜 한 가지만 가지고 평생을 감사해도 부족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하박국 선지자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의 소출이 없으며, 밭의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의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고, 마침내 풀무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느브갓네살 왕이 자세히 보니까, 풀무불 가운데 꽁꽁 결박한 세 사람을 던졌는데, 네 사람이 자유롭게 불 가운데로 걸어 다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신들의 아들’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라고 증언한 넷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이들은 이를 하나님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호하도록 보내신 수호천사라고도 말하기도 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이 넷째 사람을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께서 자신의 순전한 백성들 가운데 찾아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신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고 풀무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죽기는커녕, 심지어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이 일을 통해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순전하게 믿음을 지켰을 때, 얼마나 신실하게 보호의 은총을 베푸시는지를 체험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폭군 느브갓네살 왕의 입을 통해서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라고 고백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병고쳐주실 것을 믿고, 물질의 축복을 주실 것을 믿고, 풀무불 같은 극한 시험 중에서 건져주실 것을 믿읍시다. 그러나 설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주님의 구원의 은혜에 뜨겁게 감사하여, 숨질 때까지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키면서 살 수 있는, 참 믿음의 소유자들, 큰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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