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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환기에 선 믿음 (창 17: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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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에 선 믿음 (창 17:15-27)   

우리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면 삶의 방향이나 결과에 큰 변화를 가져온 전환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전환점에서 바른 선택을 하고 바른 결단을 하면 열매를 많이 거두고 보람된 삶을 살지만 그렇지 못하면 자신의 꿈을 포기하거나 주저앉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업 뿐만 아니라 가정생활,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살아오시면서 어떤 전환점을 가지셨습니까? 한 때의 선택과 결단이 우리의 남은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더욱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은 인생의 여정에서 바른 선택과 결단을 함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삶, 후회 없는 삶,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highlight 를 꼽으라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창세기 22장에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외아들 이삭이라도 이끼지 않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믿음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가 처음부터 믿음의 용장이었을까요?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와서 정착하는 동안 많은 up and down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 굽이굽이에서 여러 가지 시험문제를 내셨습니다. 그 문제를 믿음으로 잘 풀기도 했지만 그렇지 못하여 실패한 적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문제들을 풀면서 아브라함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믿음의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창세기 17장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마침내 믿음의 사람으로 든든히 서게 됩니다. 무슨 일이 그에게 벌어졌을까요?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다시 나타나시기 전 13년 동안 아브라함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렇게 바라던 아들인 이스마엘로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가운데 낳은 아들이 아닙니다. 그저 인간적인 조급함 때문에 아브라함과 사라의 여종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일 뿐입니다. 

언약은 잊어버린 채 하나님 보시기에 별로 의미 없는 살아가던 아브라함을 깨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잊고 살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 사이에 자식을 가질 것을 포기했지만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나타나신 하나님은 자신을 ‘엘 샤다이’로 소개하십니다. 온 창조세계의 주관자이시며 번성케하고 창대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시면서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시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심히 창대하게 하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에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아브람의 경배를 받으신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아브람(존귀한 아버지)에서 ‘아브라함’ (많은 무리의 아버지)으로 바뀝니다. 아브라함으로 한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실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여러 민족과 왕들이 나올 것이며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도 대대로 이어지는 영원한 언약임을 선포하십니다. ‘영원한 언약’은 후손의 약속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의 약속을 포함합니다. 지금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에 불과하지만 때가 되면 그 땅을 영원한 소유로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언약의 징표로서 아브라함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할례 자체가 언약 백성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그 믿음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요 할례는 그것의 외적인 표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남자이면, 이방인이든, 노예이든 예외 없이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누구든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이제 아브라함이 믿음의 반응을 보일 차례입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사래의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17:15-16)  

아브람의 이름을 바꾸어 주신 하나님께서 사래의 이름을 또한 고쳐주십니다. 미국 남편들은 아내를 부를 때 honey, honey 꿀, 꿀 대며 애정을 표시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부를 때 “사래” 그 이름의 뜻은 'my princess'(나의 공주). 사래는 아브라함에게 너무도 귀한 아내입니다. 자식을 낳지 못함을 인하여 사래가 마음 고생도 많았겠지만, 아브라함은 아내를 여전히 ‘나의 공주’라 부르며 자기의 변함없는 사람을 표현했습니다. 

‘사라’의 의미는 ‘나의’라는 소유격이 빠져서 그냥 공주입니다. 사라는 이제 아브라함의 공주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공주,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인정받는 열국의 어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라고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라도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에 참여하는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자식을 주실 것이면 진작 주셨어야지 늦추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은 99세, 사라는 89세입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생식능력이 떨어져 출산이 불가능한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는 사라가 더욱 겸손하여져서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을 준비를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라가 65세가 되어 애굽에 내려갔을 때 애굽 백성들은 물론 바로도 첫눈에 반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사라는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아브라함의 존귀한 부인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남부러울 것 없는 사라였지만 자식 이야기만 나오면 주눅이 들었습니다. 아이 없음을 인하여 오랜 세월 동안 마음고생을 하게 되고 심지어 자기가 데리고 있던 계집종이 남편의 아이를 갖자 그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라가 더 이상 자기의 외모, 재산,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어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또 복을 주어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게 하신다고 합니다. 복을 준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담을만한 큰 그릇을 준비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도 낮추실 수 있습니다. 왜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잘나가던 사람들을 낮추십니까? 왜 갑자기 사업이 안 되고, 취직이 안 되고, 결혼을 하지 못하고, 결혼해도 아이를 갖지 못합니까? 물론 여러 가지 사람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고 사정은 다릅니다. 그가 우리를 낮추심은 그저 우리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연단을 통하여 더 이상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자세로 끝까지 주님을 붙들었습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헌신의 삶을 살 때 사라에게 복을 주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17:17-18)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하여 아이를 낳는다는 약속을 듣고 또한 아이 이름도 이삭이라 지어주셨지만 아브라함은 여전히 감동이 없습니다. 이미 너무 오래 기다리다가 지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한 계획을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었습니다. 그가 왜 엎드렸습니까? 하나님께 경배드리기 위함입니다. 그가 왜 웃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배하기 위해 엎드렸는데 불신앙의 웃음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예배자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다니요? 이것이 바로 인간이 보여주는 믿음의 한계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한지 24년 동안 하나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고 언약을 언급하시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오기는 왔지만 아직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어찌 자식을 낳을까? 어찌 출산하리요?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어렵다는 겁니다. 아브라함 하면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17장에 나타난 그의 모습을 보면 이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모습이 사실 설득력 있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평소에 가진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직도 자기가 이해되는 부분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믿어지는 한도 내에서만 믿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진 인간적인 믿음을 포기하게 하시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버리게 하시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찾아오셨습니다. 

저 같으면 엎드려 웃는 아브라함의 머리통을 한 대 때려줄 것 같은데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은 반드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약의 자손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 태어나는 것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아니 내 나이 백 살이고 아내 나이 90살인데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귀찮게 일을 벌이지 마세요. 이스마엘도 내 자식인데 이 아이나 데리고 살렵니다.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제안합니다. 우리도 자칫하면 하나님보다 더 똑똑한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기다리지 못하여 가진 자식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이 진짜 인양 만족하며 주저앉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많은 경우 진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우리 수준으로 제한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원하든지 원치 아니하든지 상관없이 그를 통하여 약속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호합니다 (17:19-22)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아브라함 개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이 약속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삭만이 약속의 자녀요, 하나님의 복의 agent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이름의 뜻은 ‘웃음’ 혹은 ‘기쁨’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주심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작은 기쁨이 되지만 장차 오실 메시야의 예표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자녀 이삭의 후손을 통하여 먼 훗날 메시야를 태어나게 하시려고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이삭이 언약의 대상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삭 뒤에 더 큰 분이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분이 오실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5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중에 영의 눈이 떠져서 바라본 것은 단순히 육신의 아들 이삭이 아니라 그 뒤에 오시는 더 큰 자인 메시아였습니다.    

물론 이스마엘도 많은 자손을 낳아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과만 영원한 언약을 세우신다고 합니다. 이삭은 약속을 따라서 낳은 언약의 상속자가 되고 이스마엘은 육신을 따라서 낳은 언약 밖의 후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고 그에게 약속의 자녀를 허락하신 것은 단지 아브라함이 자손이 이 땅에 잘되고 행복한 삶을 살라고만 부르신 것은 아닙니다. 그와 그 자손을 통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전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17:23-27) 

인간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머릿속에 생각이 많습니다. 머리를 굴리느라 분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단순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때로 의심하고 머리를 굴렸지만 이제는 그런 자세와 결별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합니다. 

즉각적인 순종은 이제부터 아브라함의 삶의 특징이 됩니다. 주저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이 주시는 복을 풍성하게 얻는 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비롯한 그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비로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 전환점에 선 우리의 자세  

1)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귀신 들린 아들의 치료를 인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부탁이 미적지근합니다. “무엇을 할 수 있으시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시옵소서.”(막 9:23) 예수님께서 이 아이를 반드시 치유하실 것이라는 믿음은 없었고 그저 예수께서 자기 아이를 고치기 위하여 무엇인가 한번 해보라는 미적지근한 부탁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하며 우리말 번역에는 살을 붙였지만 원문에는 단순히 할 수 있거든 (If you can?) 하며 예수님이 반문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비의 의심하는 태도를 지적하면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 "Everything is possible for him who believes.") 예수님의 말씀에 그 아버지가 정신이 번쩍 납니다. 자기의 부족했던 부분이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갑자기 깨달아집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한 것에 대하여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를 지르며 말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I do believe; help me overcome my unbelief!")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의 치유를 위하여 예수님께 나왔는데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진짜 문제는 자기에게 있음을 깨닫습니다. 문제는 내 아들이 아니라 나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조금 전까지 “내 아들의 귀신 들린 것을 고쳐주옵소서” 부탁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에게 믿음을 달라고 주님께 매달립니다. 주님의 역사는 자기의 부족과 한계를 깨달을 때  일어납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치유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데 문제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로 만족하다고 느끼고 그것이 그를 향한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인 줄 착각하고 하나님을 자기의 작은 생각 안에 가두어 둔 것은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생각이 자기 생각과 다를지라도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어지지 않고 의심스러워도 하나님의 뜻이면 따라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나서부터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을 가지기까지 하나님은 정말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에 연연하여 두고두고 우리를 탓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현재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시고 복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실 것을 믿으며 동침하였습니다. 그들의 변화된 신앙의 모습이 신약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롬 4: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우리의 불완전함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고집을 피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려면 예수 안 믿어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참된 믿음을 가지기 원하십니다.  

믿음의 길은 때로 험난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는 유일한 길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기십니다. 그렇기에 의로움이 의미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의롭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서 그 앞에 머물러 있게 만드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맛보려면 하나님의 때를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은 결단입니다. 약속과 현실 사이에 갭이 클 때 우리는 낙심하거나 좌절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믿음을 가지도록 하신 것처럼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결단하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자기 포기입니다. 자기의 뜻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우며 자기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17장 전반부에 나타난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 믿음 대단하구나. 감탄사가 나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불신앙적인 모습, 연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인내하시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끈질긴 사랑,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토기장이가 흙을 빚어 자기가 원하는 그릇을 만들어가듯이 은혜 가운데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당신의 뜻대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저희들에게 얼마나 위로를 주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이니까 그렇지 나 같은 존재야 어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이 사랑받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도 저희들을 붙들고 있습니다.  

창립 17주년을 맞이합니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감사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죄송함을 느낍니다. 하나님과 교우들을 좀더 잘 섬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17년이 지났는데 아직 자체 건물이 없다, 일꾼을 체계적으로 키우는 양육 시스팀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부분들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려는 일꾼들이 많습니다. 든든한 중보기도팀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앞장서서 달리려는 리더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모여 뜨겁게 기도하며 많은 분들이 점차 일꾼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선교회나 목장을 중심으로 사역이 활발해지고 교우들 간의 교제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붙들었던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오늘 우리 교회도 붙드시고 앞으로도 붙드실 줄을 믿습니다. 오늘 창립주일이 우리 교회 역사에 전환점이 되어야 합니다. 안 된다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가진 것도 별로 없는데 하며 환경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점이나 한계만을 보지 말고 아브라함이 붙들었던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 서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4-5년 후의 모습이 아무런 발전도 없이 현재의 모습과 같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위기가 한편으로는 도약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물론 잘못하면 엉뚱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결단이 미래를 좌우합니다. 바른 선택과 그에 따른 결단을 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돌다리만 두드리겠습니까? 신앙의 모험을 할 때가 왔습니다. 안정된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불안정해보이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미래를 향하야 함께 나아가기 원합니다. 새 일을 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를 영육 간에 강건한 교회, 건강한 교회,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를 세우는데 하나가 되어 참여하며 내년 창립주일에는 하나님 앞에 더 아름다운 열매를 보여드리기 원합니다. 교회적으로 영적 갱신이 일어나 교회의 체질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공동체, 사랑과 진리를 나누는 공동체로, 생동감이 넘치는 공동체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이를 추진하는 동안 세 가지 열매를 거두기 원합니다. 앞으로 설교를 통하여 실제 양육을 통하여 소개하고 실천이 가능하도록 돕겠습니다. 

1) 예배를 통하여 영적 성숙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찬양대와 경배팀만 예배를 인도하고 다른 온 교우들이 관객이 되어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예배자로서 적극 참여하기 원합니다. 그러려면 엿새 동안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2) 새로운 가족들이 교회에 정착하는 것을 돕기 위해 훈련받은 분들로 하여금 일대일로 섬기도록 하겠습니다. 매주 여러분들이 새로 오지만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그냥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의 정착을 돕고 가족의 일원으로 함께 섬기도록 돕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목장으로 자연스럽게 인도하여 교회를 섬기도록 하겠습니다. 

3) 우리가 받은 사랑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웃과 세상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장년들끼리, 학생들끼리, 혹은 연합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러한 비전은 목사 혼자 나선다고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이신 보혜사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교우들이 한 마음이 되어 나아갈 때 가능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작품을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그 수를 날마다 더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 스토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여기까지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함께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인 사역에 동참하며 예비하신 귀한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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