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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능력 (창 21: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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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신분과 모습을 철저히 위장하고 살아온 한 여인의 인생이 그만 들통이 났다. 삼십 대의 이 여인은 자신을 서울대학교 출신에 재정경제부 산하 경제연구소 연구원이라고 속였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여인은 남편과 부모까지도 감쪽같이 속였다고 한다. 그는 버젓이 서울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서 학사모를 쓰고 졸업사진을 찍었고 최근까지 서울대학교 동문회에도 참석했다고 한다. 이 여인은 외제차를 몰고 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사기행각을 일삼고 심지어 교회까지 다니면서 사람들을 속였다고 한다. 남편은 자기 아내가 꽤 높은 자리에서 비밀스런 임무를 맡고 있는 연구원인 줄로 알고 최근까지 무역센터로 출근을 시켜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밀은 오래 가지 않고 오래 가면 꼬리가 밟히는 법, 생각지 않은 일로 가짜 신분이 들통이 나서 허세와 위장의 가짜 인생은 종지부를 찍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예수를 믿는 사람들과는 구별해서 말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실제로 믿음의 능력은 없으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믿음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하는 척,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도 말씀을 늘 가까이 하는 척,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전도하지 않으면서 전도하는 척,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는 척 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별히 예수를 믿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믿음이 계속해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이런 가짜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즉 위장하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음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꾸미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믿음의 능력이 없는데도 자신이 믿음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믿음의 능력이 있는 줄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정도가 더 심각하고 또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피해가 더 심각하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믿음의 행위를 흉내내면서 그것이 믿음의 능력인 것으로 착각한다. 

예를 들면 기도할 때 큰 소리로 기도하면서 자신이 기도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거나, 겨우 알고 있는 몇 가지 성경구절을 말할 때마다 인용하면서 마치 자신이 말씀의 사람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 등이다. 물론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먼저 믿은 사람들의 믿음의 행위를 따라하면서 신앙생활을 배우고 훈련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를 오래 믿었으면서도 믿음이 자라지 않고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흉내내면서 착각하고 산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위장하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나 자신의 믿음을 착각하고 사는 이런 사람들이 믿은 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많은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믿음의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언제 나타나게 되는가? 개인적으로나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 그 본 실력이 나타나게 된다. 믿음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결하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도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확신을 가진다.

그러나 믿음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절망하고 좌절하고 흔들린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원망과 불평과 불만을 터뜨린다. 그리고 모든 일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자꾸만 사람을 의지하려고 한다. 그나마 겨우 조금 기도하던 것도 중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이렇게 해서 말은 하지 않아도 자신이 믿음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성도가 믿음의 실력이 있으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믿음의 능력이 없으면 세상과의 싸움에서, 죄와의 싸움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 믿음의 능력이 있다고, 나는 믿음이 좋다고 말로 암만 떠들어 보아야 소용이 없다. 실제로 어려운 일이 생기고 죄와 세상의 공격을 받고 고난과 시험이 올 때에 이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믿음의 모습,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실제로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믿음의 능력, 경건의 능력인 것이다. 믿음의 능력이 나로 살게 하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블레셋왕 아비멜렉이 제발로 먼저 찾아와서 화친조약을 맺자고 한다. 아브라함은 한 부족의 인도자이고 아비멜렉은 한 나라의 왕이다. 그런데도 아비멜렉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싸우지 말고 잘 지내자고 요청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21절에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고 했다.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그들이 보았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보였다는 것이다.

23절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지금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들과 손자 때까지도 대대도 서로 공격하고 싸우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자고 한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러겠다고 대답하면서 2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에 당신의 종들이 우리가 판 우물을 빼앗아 간 일이 있었다”고 하면서 아비멜렉을 책망했다. 아비멜렉은 자기는 누가 그랬는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고 우물쭈물하면서 변명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그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애써 파놓은 우물을 빼앗기고도 말 한 마디 못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따지지도 못했다. 왜 그랬는가?

첫째, 자기가 그들에게 저지른 잘못이 있어서 떳떳하지 못했다.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그랄 땅 즉 블레셋 땅으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서 아비멜렉에게 자기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었다. 그리고 사라를 아비멜렉에게 빼앗겼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건드리지 말라고 막아 주셨고 이 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고 아브라함을 책망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믿음대로 살지 못해서 잘못을 저지르고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끼칠 뻔했다가 망신을 당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사는 방법이 똑같은데 누가 누구를 책망하고 따지겠는가? 아니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보도 못한데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억울하게 우물을 빼앗기고도 그동안 말도 못하고 따지지도 못한 것이다. 

둘째, 그에게 믿음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것을 지키지 못했다. 세상의 원수와 맞서 싸우지 못했다. 내게 해를 끼치는 원수, 내게 주신 복을 빼앗아 가는 악한 세력과 맞서 싸우고 내 것을 지킬 힘이 없었던 것이다. 사탄이 나를 공격하고 하나님이 주신 복과 은혜를 빼앗아가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당한다.

딤후 3:1-5를 보자. 말세에 나타날 징조들이다. 아니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이렇게 변한다는 것이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지만 정작 믿음의 능력은 없다.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은 있지만 믿음의 능력은 없는 껍데기 신앙이다.

삼상 4:1-11을 보자. 엘리 제사장 시대에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자 하나님의 언약궤 즉 법궤를 들고 나가기로 했다. 전에도 이 법궤를 앞세우고 나가서 문제를 해결한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어떻게 보면 바른 결정이요 생각을 잘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결과가 어떠했는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이겼는가? 아니다. 완전히 패배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언약궤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왜인가? 그들의 신앙이 껍데기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이름뿐인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궤를 들고 나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믿음은 형편없으면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었다. 자기들에게 그런 믿음의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믿음의 능력이 떨어진 것을 몰랐다.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를 믿는다는 성도가 믿음의 능력이 떨어지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망신을 당한다. 그리고 세상과의 싸움에서, 죄와의 싸움에서 날마다 패배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제는 자신 있게 따지기도 하고 아비멜렉을 책망하기도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브라함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기에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평안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런 아비멜렉에게 그들이 자기에게 저지를 잘못을 자신 있게 그리고 분명하게 책망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그런 믿음의 능력이 생긴 것이었다. 

어떻게 갑자기 이런 능력이 생겼는가? 성경 어디에도 아브라함이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갑자기 아비멜렉이 자기 발로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이 일이 있었던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8-21절이 중요하다. 즉 아브라함이 여종과 그 아들 즉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낸 직후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을 쫓아내고 나니 바로 아비멜렉이 찾아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을 다 던져 버리면 믿음의 능력이 회복된다. 하나님을 믿는 내게서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잠 16:7에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했다. 이 말씀대로 그대로 된 것이다. 꼬이고 얽힌 관계들,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붙잡고 내 힘으로 내가 직접 풀려고 아무리 애써 보아야 소용이 없다. 왜인가? 하나님이 막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된다. 

둘째는 믿음의 그릇을 깨끗하게 하면 믿음의 능력이 회복된다. 육신적인 삶을 정리하고 세상에서 돌아서면 능력이 생긴다. 하나님이 아무리 복을 주시려고 해도 내 믿음의 그릇, 생활의 그릇, 마음의 그릇이 깨끗하지 못하니까 주시지 못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복의 근원이면서도 자기의 생각대로 행동해서 저지른 잘못된 결과를 그대로 그의 삶 속에 가지고 있었다. 우유부단해서 과감히 잘라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두고 있다가 가정불화가 생기고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믿음의 사람이지만 그의 생활이 깨끗하고 온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안에서도 집안이 시끄럽고 밖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기 것을 빼앗기고 어려움만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과감히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고 생활을 정리했더니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가정도 화목하게 되었고 또 밖의 문제도 저절로 해결되었다. 갑자기 한꺼번에 모든 일이 일어나서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잘 해결되었다.

딤후 2:20-22를 보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원하시는 것은 깨끗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음과 생각이 깨끗하고 믿음이 깨끗하고 삶이 깨끗할 때 믿음의 능력이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그 때에 믿음의 능력이 나타난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단순하게 순종하면 믿음의 능력을 주신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는 사라의 말을 듣고 고민하였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고 하시면서 쫓아내라고 하시자 그는 즉시 순종했다. 떡과 물 한 부대만을 들려보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순종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그 때에 믿음의 능력이 회복된다. 하나님께 단순하게 순종하는 사람에게 믿음의 능력을 주신다. 행 5:29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다. 또 32에도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겁내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믿음의 능력이 사라진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경우를 보자.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변명하는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상 15:22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믿음의 능력이 회복되면 믿음의 산 증거가 나타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고 인정한다. 예수 믿는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은 내게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믿음의 증거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떳떳하게 그들에게 나서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잘못했으니 와서 사과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당신이 내게 와서 화친을 청해야 한다고 위협하거나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가 삶을 정리하고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을 드리니까 그의 삶에서 믿음의 증거들이 나타났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의 눈에도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 계시는 증거들이 보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두려워서 자기 발로 걸어와서 잘 지내자고 요청한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 중의 하나가 340장이다. 후렴에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라고 했다. 우리의 삶과 믿음에 산 증거들이 많이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 뜻대로 순종해서 승리한 믿음의 산 체험과 증거가 있어야 한다. 

딤전 3:9에 집사의 자격을 말씀하면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라고 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해서 모든 것이 회복된 경험과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충성한다.

딤전 3:7에 감독의 자격 즉 장로의 자격을 말씀하면서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고 했다. 교회의 지도자라면 함께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서 믿음의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더 나아가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도 저 사람은 과연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의 공격을 쉽게 받는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 권사, 안수집사로 피택을 받으면 임직하기 전에 담임목사와 당회원들이 그 사람의 가정을 방문해서 이 사람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도 좋으냐고 묻는다고 한다. 딤전 3:4,5에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라고 했기 때문이다. 가족에게서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동네 사람들에게도 이 사람이 우리 교회의 지도자가 될만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래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와야 임직을 한다고 한다. 성경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믿음의 산 증거들이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은혜를 받을수록 자만하지 말고 더 믿음을 기르고 더 성결해지기를 힘써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전 4:19,20에서 고린도교인들에게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믿음이 있다고 떠드는 말을 듣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믿음의 능력이 있는지를 알아보겠다는 것이다. 믿음은 말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장과 허세에 속지 않으신다. 마귀도 안 속는다. 내가 가진 진짜 믿음의 능력, 믿음의 실력으로만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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