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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무엇을 보느냐? (창 19: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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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한 상자가 있는데 그것을 먹는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제일 좋은 사과부터 먹는 사람과 썩은 사과 즉 제일 나쁜 사과부터 먹는 사람이 있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제일 좋은 사과부터 먹는 사람은 한 상자를 다 먹을 때까지 항상 제일 좋은 사과를 먹는다. 그러나 제일 좋지 않은 사과부터 먹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좋은 사과를 아끼는 것 같지만 한 상자를 다 먹을 때까지 항상 제일 나쁜 사과를 먹게 된다. 
똑같은 상황과 환경에서도 생각의 차이, 보는 관점의 차이 때문에 각기 전혀 다른 결과를 얻고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과 관점이 중요하다.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관점과 시각이 변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보고 현재의 삶을 고치기로 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다르게 보아야 한다.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보고 현재의 삶을 고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의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시간을 끌어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분명한 예측과 비젼과 확신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그러셨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과거의 문제를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매래의 문제를 생각하셨다. 그 사람의 현실을 보는 관점과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즉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나 사건을 미래지향적인 관점으로 보셨던 것이다. 

맹인으로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딴 강영우박사가 있다. 대학교수이며 교육학자인 그는 일리노이주 주지사 고문이기도 하고 존경받는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아들이 하바드대학에 입학시험을 치면서 쓴 에세이 즉 수필에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다.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나 일에 대한 글에서 그는 “우리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위대한 분이다”라고 했다. 강박사는 매일 저녁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책을 읽어주곤 했는데 시각장애자이기 때문에 점자로 된 책을 손가락으로 읽어서 들려주었다. 그런데 밤에 갑자기 전기가 정전이 되어도 아버지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는 것을 아들이 보게 되었다. 다른 아버지들은 전기가 나가면 책을 읽어줄 수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남과 다른, 남보다 위대한 아버지라고 한 것이다. 그 글 때문에 그는 하바드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이 자기가 당한 고통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사건을 보는 관점이 어떠한가,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어차피 벌어진 일인데 다시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면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관점이 바뀌는 것이 신앙의 성장이다. 신앙이 자랄수록, 신앙이 깊어지면서 모든 것을 보는 눈이 자꾸만 발전하고 달라지는 것이 정상이다.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물으셨다. 그는 쓰러져가는 나라, 바람 앞에 등불같은 나라를 보면서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았다.  오늘 우리는 내 앞에 일어난 일과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롯에게 있어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그의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비록 그동안 애써 모은 재산과 명예 등을 졸지에 한 순간에 다 잃어버렸지만 오히려 멸망 중에 생명을 구원받았다. 그로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더 이상 죄악세상에서 살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어야 한다. 

두 딸들도 마찬가지이다. 죄악에 빠져 사는 남자와 결혼해서 죄악된 생활을 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해 주신 것이다. 그들의 인생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그러므로 감사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그들의 생활을 보면 그런 깨달음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답게 그들의 삶이 달라진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롯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 이후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의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단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욕심대로 살다가 간 사람으로 기억될 뿐이다.

롯과 두 딸은 소알에서 나와서 산으로 올라가서 굴에서 지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산으로 올라가서 재앙을 피하라고 하셨었다. 그런데 롯이 너무 겁이 나서 그곳은 너무 멀다고 가까운 소알성으로 피하게 해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소알성에 들어가 보니 살만한 곳이 못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역시 낯선 지역인 소알에서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과, 또 그곳 역시 소돔성처럼 사악한 곳인 것을 알고 나서, 그곳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주석가 매튜 헨리는 소돔성이 유황불로 심판을 받은 후에 요단강이 범람하고 또 소돔성에서 흘러나온 노폐물들로 뒤섞여서 사해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소알성도 반드시 망하리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자기 뜻과 생각을 따라 선택한 정착지와 피난처는 결코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 한 가지 롯의 행동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 자기 삼촌이고 또 전에도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던 아브라함을 왜 찾아가지 않았을까? 그곳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고 아브라함이야말로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 아닌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가나안 이방지역에서 아브라함만이 그를 지켜 줄 수 있는데.

한 번 그 생각과 판단이 잘못되고 감각이 마비된 사람은 자기가 살 길을 찾지 못하고 계속 엉뚱한 길로 가곤 한다. 욕심과 죄악 때문에 지혜가 가려졌기 때문이다.

산 속 어두운 굴속에서 아내도 없이 두 딸과 지내야 하는 롯의 신세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처량하고 비참한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은 집에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세도를 부리면서 살았는데 말이다. 졸지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왜인가? 그가 잘못된 선택과 결단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 자신을 사랑하고 길러 준 아브라함을 떠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육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을 떠나고 신앙의 영적 교제를 떠나 세상으로 가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롯처럼 비참한 결과를 얻게 되고 고통을 당하게 된다. 오히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이익을 얻지 못하고 잃어버리더라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 믿음의 사람들과의 신앙의 교제를 버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 지혜로운 믿음이다.
믿음이 떨어지고 식어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 예배를 멀리 한다. 
2)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을 아까워한다.
3) 봉사를 싫어하고 주의 일을 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4)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자꾸만 꼬인다. 상대의 모든 것이 비뚤게만 보인다.
5) 기도하기가 싫어진다. 
6)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잡념이 생긴다.
7) 성경을 읽기가 싫어진다. 

원인이 무엇인가? 죄, 원망과 불평, 근심걱정 욕심, 조급함, 자기중심적 생각, 세상사랑 등이다. 믿음이 자랄 때는 이와 정반대이다. 즉 내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식어지지 않으려면 의도적으로 이 일곱 가지에 힘을 써야 한다. 그러면 믿음이 성장한다.

롯의 딸들은 산속의 굴에서 아버지와 지내면서 갑자기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 
31절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32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그래서 그들은 롯에게 술을 잔뜩 마시게 하고는 차례로 아버지와 동침해서 아이를 낳는 엄청난 죄를 짓고 말았다. 도대체 정상적인 사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롯의 딸들의 죄악의 원인이 무엇인가? “우째 이런 일이?”
1) 롯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소돔성으로 들어가 살았는데, 그의 딸들로 죄악에 물들게 했다. 그는 자신의 눈 앞의 유익을 얻기 위해 자녀교육은 생각하지 않았다. 
맹모삼천 :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 좋은 환경을 찾아가는 것이 바른 생각이다. 
롯이 자녀교육을 생각했다면 죄악의 도성 소돔성으로는 들어가지 않았어야 한다.
자녀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왔다는 한인들. 먹고 살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하느라고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오히려 죄악에 물들고 비뚤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나중에 깜짝 놀라 후회하지만 때는 늦었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많다.

2) 롯은 죄악세상에서 자녀들의 믿음을 바르게 가르치고 지키지 못했다.
혹 그런 곳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면 자녀들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믿음으로 바르게 자라도록 가르치고 지켜 주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했다. 
교육이란 때를 놓치면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른일 때와 전혀 다르다. 성인이 되면 늦었지만 다시 한 번 해볼 수 있지만 청소년 때는 다시 오지 않는다.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두려운 마음을 가졌었다.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인생의 중요한 때에 나를 만났는데 바른 믿음을 보여주고 바르게 인도해야 한다는 생각에.

3) 롯은 자녀들에게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자녀들은 부모를 보고 배운다. 아무리 말로 해도 보여주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다. 
부모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보여주고 바르게 사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롯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삼촌도 버리고, 은혜도 저버리고 소돔성으로 오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었다. 두 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만족을 위해서 죄악도 서슴치 않는 행동을 했다.

4) 롯은 평소에도 술을 잘 마시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웠다. 그런 모습을 늘 보아왔기 때문이다. 만약에 롯이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니면 딸들이 술을 먹일 생각을 못했으리라.
노아도 구원받은 후에 농사가 잘되니까 포도주를 먹고 취해서 잠들었다가 자식들에게 망신을 당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기 아들을 저주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술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술에 빠지면 나쁜 것이다. 술을 마신다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술에 취하면 죄를 짓게 되기 때문에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한다. 
엡 5:18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잠 23:29,30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평소에 좋은 삶의 습관을 가져야 한다. 좋지 않은 습관은 그 자체가 죄가 아니더라도 나로 죄를 짓게 하고 죄의 유혹에 빠지게 하는 올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 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5) 롯은 모든 재산을 잃고 아내까지 잃은 상태에서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못하고 있었다. 롯과 그의 두 딸은 깨닫지 못하는 짐승과 같았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유황불이 떨어져 멸망당한 것이 바로 성적 타락 때문이었다. 

자기는 좋은 줄 알고 살던 곳이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을 당했으면 정신이 들었을 텐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소돔성의 죄였는지 깨달을텐데 말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같은 죄를 범했다.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 깨닫고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
깨닫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라. 깨닫는 것이 은혜이다. 깨달음이 있을 때에 발전한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하셨다. 

6) 큰 딸은 자기만 죄를 지을 뿐 아니라 자기 동생에게도 같은 일을 하게 했다. 
죄는 또 다른 죄인 즉 공범을 만든다.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후에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한 것과 같다. 그래야 자기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위에 좋은 믿음의 사람들과 건전한 믿음의 교제를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믿음이 좋다가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바르게 살아가다가 주위 사람들의 유혹에 끌려가서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기도하며 사는 사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 너그럽고 온유한 사람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서로의 믿음과 생각과 삶을 건전하게 지켜주고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좋은 믿음의 동역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7) 이들이 낳은 모압과 암몬이 오랜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이들은 놀랍게도 바로 임신이 되어서 그들이 바라던 대로 아들들을 낳았다. 나쁜 방법으로 시도한 일이면 하나님께서 막아주셨으면 좋았을텐데 말이다. 악한 방법으로 시도한 일이므로 임신이 안되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잘된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은 아닌 것이다. 마귀는 우리가 죄를 짓는 일이 괜찮은 일이라고 안심하게 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일이 잘되게 한다. 그리고 방심할 때에 고통을 당하게 한다. 행 27: 광풍이 오기 전에 순풍이 불었다.  

하나님을 위한 일, 바른 목적을 가지고 하는 일도 마귀의 방해를 받아서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끝까지 밀고 나가면 성공한다.

반대로 좋지 않은 목적을 가지고 하는 일,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길도 당장은 형통하고 잘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패와 아픔과 손해와 환난으로 끝을 맺는다.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가나안땅으로 들어오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도 하고 그들의 가는 길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수시로 우상숭배로 이스라엘을 유혹해서 죄를 짓고 타락하게 만들었다. 롯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두고두고 괴롭히고 믿음의 길을 방해했던 것이다. 마치 이스마엘처럼 말이다.

그들이 자기들 앞에 일어난 사건 즉 하나님의 심판의 원인을 정확히만 알았어도 그들은 달라졌을 것이요 이런 끔찍한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기만 했어도 죄는 짓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이 경험한 엄청난 사건을 보는 관점이 달랐다면,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고, 한 번만 다르게 보았더라면 그들의 삶도 믿음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결단과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는 롯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잊혀진 존재, 사람들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가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어가고 롯은 그 반대가 되어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보는 관점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욕심을 버려야 한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내 생각과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힘써야 한다. 항상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쪽으로 생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생각하자. 생각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 하나님의 관점, 신앙의 관점으로 보기를 힘쓰자. 하나님은 나의 미래에 무슨 일을 하시려고 지금 이런 일을 겪게 하시는가? 내가 지금 겪는 이 일은 장차 나의 미래를 위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어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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