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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하시는 자의 죽음 (요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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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자의 죽음 (요 11:1-16)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1-4)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5-7)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8-10)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1-14)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11:1-16)


사랑하시는 자의 죽음과 탄원

이제 10장의 목자 이야기가 끝나고 11장의 나사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0장과 11장은 문맥상 중요한 주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0장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려는 것”(10:10)이라 말씀하신 주님께서 그 생명을 어떻게 주시는지 나사로 사건을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본문에 보면 먼저 나사로가 병들고 긴급히 주님께 알리는 모습입니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1-3)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여기에 첫 번째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병든 사람은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히브리말로 엘르아살이란 단어가 줄어서 된 말인데, 그 뜻은 ‘하나님이 도운 자’란 뜻입니다.  문자 그대로 나사로 가정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많이 받았습니다.  3절 말씀에 보면 병든 사람이 누구인지 이름을 말하지 않고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했습니다.  그냥 ‘사랑하시는 자’라고 하면 서로 통할 정도로 주님과 나사로 가족은 친근한 사이였습니다.  

5절에 보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는 사랑하셨다고 각각의 이름을 들어서 말씀합니다.  주님은 마르다가 손수 만든 음식을 맛있게 잡수셨고, 마리아가 머리에 부은 향유를 기쁨으로 받으셨습니다.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를 각각 사랑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나사로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곧바로 천국 생활이 시작되는 줄로 착각합니다.  마음의 평안과 천국의 영생을 얻었으니 이제는, 병들지 않고, 실패하지 않고, 손해나지 않고, 출세하고, 자녀는 모두 척척 박사로 대학에 가고, 남보다 앞서 승진하고, 말만 하면 다 소원은 이루어지고, 고통이나 환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큰 오해입니다.  이 세상은 결코 천국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악이 가득 찬 마귀의 세상에서 천국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는 이름이 붙은 우리에게도 예외 없이 환란 질고는 다가옵니다.  다만 그 의미가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성도가 당하는 고난을 무슨 엉뚱한 일을 당하는 것처럼 당황하거나 오해하지 말아야합니다.  예수 믿으면 무조건 내 마음대로 된다고 잘 못 생각하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사로의 생명이 위급해지자 마르다 자매는 사람을 급히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아마 이런 저런 응급 처치를 하다가 결국은 예수님을 불러 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보낸 메시지는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는 내용뿐입니다.  얼마나 다급하다든지 빨리 와 주셔야만 되겠다든지 하는 부탁은 생략했습니다.  아마 유대 땅에서 예수님이 어떤 위협을 당하셨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고 가고하는 일은 주님의 판단에 맡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멀리 보내서 주님께 알린 것만으로도 와 달라는 탄원은 충분히 전한 것으로 봅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장면에서 성도의 참 기도 모습을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매우 과장된 언어의 나열로 생각합니다.  자극적이고 강조적인 말들을 늘어놓음으로써 비로소 주님이 들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경쟁하던 바알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상달되게 하려고 온 몸을 칼로 긋고 괴성을 질러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단어의 나열에 있지 않고 상황을 솔직하게 알리는데 있습니다.  단 몇 마디의 말이라도 진실 되게 주님에게 전한다면 모범적인 기도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가르치기를 이방인들을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으시는 줄 알지만 너희는 중심에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로서 병들었습니까?  생명이 위독합니까?  나만 별 난 일을 당한 것처럼 생각지 말고, 먼저 주님에게 알리시기 바랍니다.  정직하고 진실한 말로 주님께 기도하십시요.  그것이 환란 당한 우리가 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응급조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다음은 신자가 당하는 질병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병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 주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4)  신자도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신자도 병들고 성도에게도 죽음이 다가 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불신자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많이 있습니다.  똑 같은 질병이요 똑 같은 죽음이지만 그 의미는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불신자에게 질병은 죽음으로 가는 공포의 시작입니다.  불신자는 죽음이 올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좌절합니다.  

그런데 신자는 다릅니다.  성도는 병든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오히려 건강할 때보다도 병들었을 때에 더 큰 영광을 체험합니다.  그 영광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성도로서 병들고 죽는 일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처럼 당황하고 낙담치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에게 질병과 죽음은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소식을 듣고 바로 쫓아가지 않으시고 이틀이나 더 묵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5-7)  생명이 위독한 사람을 놔두고 이틀씩이나 볼 일을 보신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주님께서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를 사랑하셨는데도, 나사로의 소식을 묵살하고 이틀이나 더 머무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께서 고의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다가 죽은 후에 가셨다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보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데 더 유리합니다.  병든 오라비를 고쳐 주는 것보다 죽은 오라비를 살려 주는 것이 더 짜릿한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별로 타당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굳이 나사로의 죽음을 수단 삼아서 능력을 과시하지 않아도 될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아니라도 이미 죽은 사람이 많은데 하필이면 앓는 사람이 죽기를 기다려서까지 이적을 보이실 필요가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얼마나 슬퍼할는지를 뻔히 아시면서 그 아픔을 수단으로 사용하실 예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틀을 묵으시는 바람에 나사로가 죽었다고 합니다만, 사실은 나사로는 이미 그 이전에 죽었습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주님이 나사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는 주님이 전달을 받을 무렵에 이미 죽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찾아오는 데 하루가 걸렸을 것이고, 주님이 찾아 가는데 하루가 걸렸을 것이며, 이틀을 묵으심으로 도합 나흘이 걸렸다면, 나사로를 장사 지낸 날짜는 이미 주님께 사람을 보낸 날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기왕에 하시던 일을 이틀 더 머물면서 하시고 출발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이틀을 더 묵으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따른 주님의 결정이라는 해석입니다.  타당성이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남의 요청대로 움직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단하고 움직이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어머니의 요청을 받으시고 나서,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다고 거절하시고, 그 후에 행동에 옮기셨습니다.(요2:4,11)  

장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자는 요청을 거절하시고 후에 홀로 가셨습니다.(7:3-10)  주님께는 행동하는 때와 시기가 있습니다.  그 때와 시기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었고, 주님 자신의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나사로의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머무신 것은 바로 이러한 원칙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행동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만드셨습니다.
  
가끔 우리는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일이 속히 해결되지 않음으로 이런 의심을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내 사정을 모르시거나 묵살하고 외면하신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알고도 이틀을 더 묵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로서 믿음을 지켜야합니다.  기다리노라면 주님의 역사는 나타납니다.


유대로 가자

이틀 후에 주님은 나사로에게로 향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7)고 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고 않으시고 ‘유대로 가자’고 하신데도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커다란 목적지는 베다니가 아니라 골고다 십자가였습니다.  또한 주님의 최대 목표는 십자가에서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지,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좀 더 큰 시야에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제자들은 유대로 가자는 말씀에 무조건 반대 입장을 표시했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  

방금도 그곳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는데 또 그곳에 가자고 하십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낮이 12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는 고로 실족한다.”(9-10)  낮이 12시간이 아니냐는 말은 하루 중에 낮12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를 낮과 밤으로 나눌 때 낮은 12시간이나 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낮 동안에는 계속 태양 빛이 있습니다.  넘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여기서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낮 12시간 동안 태양빛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곁에 계신 동안은 언제나 낮입니다.  겁낼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곁을 떠나면 밤이 옵니다.  특히 우리 마음에 주님이 없을 때 우리는 심령의 어두움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올바로 분별하여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넘어집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가는 한 지옥을 통과할지라도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유대 땅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의 많은 것을 두려워합니다.  도둑이 두렵고, 강도가 두렵습니다.  전쟁이 두렵고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렵고 죽는 것이 두렵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곁에 주님이 계신 한 우리 인생은 대낮입니다.  어떤 것도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가장 어두운 죽음의 순간을 변화시켜 영광의 시간이 되게 하십니다.  가장 큰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환란과 고통이 있다면 두려워 말고 담대히 전진하세요.  어둠의 시간이 영광의 시간으로 변합니다.  기대를 걸고 나아가세요.  할렐루야!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죽음의 의미입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가리켜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 하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죽음을 당하는 인간의 입장은 절망과 슬픔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이 다 반복될 수 있을지라도 죽음만은 두 번 반복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사랑하던 남편도 아내도 부모도 자식도 사별 하고 나면 두 번 다시 이 세상에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좌절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 죽음을 보는 주님의 입장은 전혀 다릅니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탄식하면서 말합니다.  “차라리 잠이나 들었다면 깨어날 터이니 오죽 좋겠습니까?”(12)  제자들은 주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잠자는 것으로 오해하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깨우러 가자고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주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4)  

내가 자는 것과 죽은 것을 분별하지 못할 줄 아느냐?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나도 안다!  주님께서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신 것은 문학적인 비유가 아닙니다.  실제적인 것입니다.  간혹 이교도들도 죽음을 잠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은 것을 가지고 ‘永眠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교도들이 말하는 永眠은 상징적인 의미뿐입니다.  잠이란 깨어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잠이라면 잠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부활을 기다리는 대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잠을 깨우듯이 죽음에서 깨우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  주님은 제자들에게 죽은 나사로를 함께 깨우자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하셨습니다.  

7절에 유대로 가자고 하실 때는 제자들과 함께 가자고 하셨지만, 나사로를 깨우는 일은 홀로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께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잠자는 자를 깨우는 것보다 쉽습니다.  주님 자신도 이 죽음을 이기고 스스로 깨어 나셨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정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나는 줄 알고 슬픔과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이 한 순간 잠자는 것에 불과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죽음도 한 순간의 잠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깨우실 준비가 돼 있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자를 일으키듯이 예수님이 죽은 우리를 살리실 날이 옵니다.  우리는 그 날을 내다보면서 소망 속에 죽음을 맞이해야 됩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게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게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3-18)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죽은 나사로를 통하여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일까요?  주님은 그것을 제자들의 믿음 증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15)  제자들은 이미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새삼스럽게 믿게 하려함이라는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를 믿는 믿음의 내용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 올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믿음 상태가 어떠했는지는 그들의 입에서 나온 몇 마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나사로를 깨우러 가겠다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들은 ‘주여 잠들었다면 낫겠나이다’ 했습니다.  그들은 땅의 법칙에 매여 있는 예수 정도로 알고 믿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끝장이다 생각했고, 죽음 앞에서는 예수님도 별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잠으로 오해하신 줄 알았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걷지 못하는 사람, 맹인, 나병환자를 고치고, 12년 혹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실지언정 죽음 앞에서야 별수 있겠는가?  그 정도의 예수로 알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사로의 상태를 時時刻刻 세밀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14절에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하는 말씀은 과거형(is dead)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11절의 ‘잠들었도다’ 하는 말씀은 완료형 시제로(has fallen asleep) 잠의 상태가 계속되기 시작한 것을 표현합니다.  주님은 전체적으로 나사로의 죽음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는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순간순간마다 나사로의 상태를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죽음을 다스리고 죽음을 극복하고 생명을 되돌려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아멘!
  
둘째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는 도마의 말입니다.  보통 이런 때에는 베드로가 앞장서서 질문하고 행동했는데 오늘 말씀에는 도마가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생각하기를 이때에 베드로를 비롯한 중요한 사도들이 나사로의 현장에 불참했던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나사로 부활 사건이 공관복음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있습니다.  아무튼 도마가 앞장 선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도마는 의심 많은 사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마란 이름은 쌍둥이란 뜻인데, 문자 그대로 도마 속에는 믿음과 의심이 쌍둥이처럼 함께합니다.  그는 항상 半信半疑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으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찌 됐든지 주님을 믿기는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가 설마 죽은 사람이야 살리겠느냐?  그러나 어찌 됐든지 예수를 따라가 보자.  유대 땅에서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는 따라가 보겠다는 결심인지 믿음인지 그렇습니다.  이것은 의심 많은 제자로서 최대의 결단입니다.  주님의 부활 능력은 못 믿어도, 일단 나만 홀로 살겠다 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죽겠다 했으니 믿기는 꽤 믿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제자들의 믿음을 바꾸어 주는 것이 본 사건의 목적입니다.  주를 위해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었으나 주님의 전능하신 신성을 믿지 못하는 상태!  이런 식의 믿음에서 반드시 탈피해야만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계신가요?  병든 자들은 고치실 수 있어도,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정도의 예수님을 믿습니까?  아니면 죽어 무덤에 들어가 진토가 된 사람까지 다시 살리시는 예수님을 믿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믿음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작은 믿음에서 큰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약한 믿음에서 강한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좁은 믿음에서 넓은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낮은 믿음에서 높은 믿음이 되시고, 순간의 믿음에서 영원한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의 증진이 언제 옵니까?  바로 우리가 당하는 죽음의 순간입니다.  병들고 죽음이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은 우리의 믿음을 무한대로 키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순간에 한 차원 높은 믿음을 심어 주십니다.  도마는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지만 실상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쳤습니다.  믿음의 질과 내용이 그 정도 밖에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는 모두가 기꺼이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주님이 죽음을 이기실 수 있다는 확신이 그들로 하여금 최악의 죽음도 기쁨으로 당하게 만든 것입니다.  
  
주님 앞에는 죽음이 문제없습니다.  잠자는 자를 깨우듯이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깨워 주실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은 바로 믿음을 최대로 키우는 시간입니다!  죽음은 성화가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담대한 믿음으로 죽음에 임하고, 죽음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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