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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항상 기뻐하라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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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빌 4:4-7)  

 
함석헌 선생님의 시 <얼굴>이란 시가 있습니다. 
시인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 하러 어디로 가는 얼굴들인가?’를 묻습니다. 
그런데 어느 얼굴 하나 곱질 않습니다. 
피곤과 권태로 찌든 얼굴들뿐입니다. 
시인은 ‘참 고운 얼굴’ 하나를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아,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 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얼굴> 부분)

여러분, 그런 얼굴 만나보셨습니까? 
아니, 여러분의 얼굴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스스로 돌아보십시오.

오늘 본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빌립보 교우들에게 세 가지 명령을 합니다.
‘기뻐하라, 관용하라, 기도하라.’
나 자신을 위해서는 항상 기뻐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관용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한번 그 반대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자신에 대하여 항상 슬퍼하고, 다른 사람에게 늘 까칠하고, 성도라곤 하지만 염려할지언정 가슴을 열고 목 놓아 기도하지 않는 모습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모습은 생각하기 조차 싫을 겁니다.
이제 우리도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길 바라면서 한 구절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항상 기뻐하라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쁨은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삶의 특징입니다.
주님도 그 기쁨을 강조하셨습니다.
요15:1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16:22절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베드로 사도도 그 기쁨을 강조했습니다.
벧전1:8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 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만일 그리스도인이 기뻐하지 못한다면 이상한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기뻐하지 못한다면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기뻐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믿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몇 가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장애물은, 자신에게 얼마나 구원이 필요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모르기 때문에, 
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완전히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빈손 들고 온전히 주님의 자비와 긍휼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오거스터스 탑레이디) 라고 진실하게 고백할 때 비로소 주님의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안 됩니다.

2) 두 번째 장애물은 상황입니다.

상황에 휘둘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흔히 기쁨을 빼앗기는 원인입니다.
앞이 깜깜해지고, 숨이 탁 막히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일들이 기쁨을 송두리째 빼앗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상황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으십시오.
삼상2:6-8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3) 세 번째 장애물은 반복되는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지면 성령의 지적을 받고 비참해집니다.
그러나 실패하거나 죄를 지었을 때에도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갑니다.
갈보리 언덕을 찾아, 그가 흘리신 보혈을 찾아, 여전히 나를 씻어 주는 보혈을 찾아 돌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을 깨끗이 씻어준 보혈을 깨닫고 기뻐합니다.

해변에 개구쟁이들이 장난을 치고 놉니다.
모래성도 쌓고, 그림도 그리고, 글자도 쓰고.......
그러면 파도가 밀려와 깨끗이 지워줍니다.
파도는 해변에 영원한 새로움(eternal renovation)을 줍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파도는 우리가 고백할 때마다 우리 영혼을 덮고, 심령을 덮고, 육체를 덮어 영원한 새로움을 줍니다.
eternal renovation!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참된 그리스도인, 성령이 거하시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기쁨을 회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2. 관용하라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 또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말하는 관용은 무엇입니까?

1) 관용은 자기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관용이란 정말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이며, 중요한 것은 굳세게 지키되 그렇지 않은 것은 양보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내 몫을 최후까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필요하다면 교회와 다른 이들을 위해, 주님을 위해 마땅히 누릴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2) 관용은 적극적으로 남을 배려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저 사람의 형편이 어렵잖아?’
‘젊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
‘힘든 상황이니까 저럴 수밖에 없을 거야.’
이렇게 감당하기 힘든 말과 거친 행동일지라도 이해해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단순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하지 않고,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이 곧 오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관용을 베풀 수 있습니다. 
자신이 순례자와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사실. 오늘 있다가 내일 떠날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관용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세상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세상에 집착합니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과 ‘땅 따먹기’란 놀이를 많이 했습니다.
장난감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사금파리를 깨서 동그란 말을 만들어 금을 그으며 땅을 따 먹어갑니다.
놀다보면 친구들과 다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고집도 부립니다.
금에 닿았느니 안 닿았느니 하면서....... 
땅 한 뼘 더 따 먹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집에서 밥 먹으라고 부릅니다.
“아무개야, 밥 먹어라.”
그러면 아이들은 훌 털어버리고 집으로 달려갑니다.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달려갑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훌 털어버리고 갈 걸 왜 그렇게 싸웠는지 바보스럽습니다.
자신이 순례자와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관용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야보고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약5:8-9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3. 모든 일에 기도하라

6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신앙은 이론이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로 힘든 처지에 빠지고, 실제로 힘든 상황에 처하며, 실제로 힘든 일들을 겪습니다.
문제는 그럴 때 신앙인으로서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반응이 달라야 되지 않겠어요?
똑 같을 순 없잖아요?

이제 6, 7절을 살펴봅시다.

1)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여기에서 염려란 걱정과 불안에 시달리고 초조해 하며 노심초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염려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통제 범위 밖에 있습니다.
여러분, 염려에 빠졌던 때를 회상해보십시오.
자기 의지로, 자기 지성으로, 자기 경험으로 그 염려를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잠만 잘 수 있다면 온 세상이라도 주고 싶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그 염려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2)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것이 바울 사도가 제시한 대책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 말씀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는 그 분의 지혜를 믿는 믿음으로, 어떤 장애물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그 분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이 세상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그 분의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3)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여기 주의하여 보십시오.
바울 사도가 ‘모든 걱정거리를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그 걱정거리를 다 없애 주시고 해결해 주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걱정거리에 대하여 입도 벙긋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걱정거리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염려에 대하여 대처하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방식입니다.  

다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이해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할 평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평강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지요?

다윗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시3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궁중반란으로 쫓길 때 고백한 내용입니다.
다윗은 갑작스런 반란에 신발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유대 광야로 쫓겨가게 됩니다.
그런데 5절을 보십시오.
시3:5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다윗은 지금 쫓기는 몸입니다.
언제 압살롬의 창끝이 자기 목을 겨눌지 모릅니다.
피곤이 몰려온 나머지 빨간 토끼눈으로 쪼그리고 앉아 잠을 청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누워 잘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누워 잔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그래서 다윗은 선포합니다.
6절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 하리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로마서에서 우리가 평강을 누릴 수밖에 없는 근거들을 보십시오.
롬8: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좋은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롬8: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최고의 사랑을 하셨는데 뭐가 아까워 이제 와서 우리를 외면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멘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의 관용을 알게 하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그저 마주 앉아 바라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지는 참 고운 얼굴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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