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한 숨결 안에 있는 세상 (행 17:22-28)

첨부 1


한 숨결 안에 있는 세상 (행 17:22-28)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습니다. 내가 다니면서, 여러분이 예배하는 대상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이들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 아테네와 예루살렘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주중에 성경 묵상을 하던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새삼스럽고, 감격스럽고,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망각하는 것이 우리 삶의 병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가 이 놀라운 고백을 한 것은 아레오바고 언덕입니다. 저는 오늘 바울 사도가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 그 마음의 결을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에 직면했던 바울은 신도들의 안내에 따라 아테네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실라와 디모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테네는 에개해 연안의 외항인 파라이우스에서 약 8km 떨어진 내륙도시입니다. 아티카의 영웅인 테세우스가 아테나 여신을 기념하기 위해 창건했따는 그 도시는 여러 모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이 활동하던 도시였고,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의 위대한 비극 작가들이 활동하던 곳이었고, 민주주의가 실험된 곳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아테네는 서양 정신과 민주주의의 고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3세기의 교부인 터툴리아누스는 신앙이 학문에 종속되려는 경향을 경계하면서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아테네’는 이성과 철학을 상징한다면 ‘예루살렘’은 계시와 신앙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아테네는 이처럼 서양 정신을 상징하는 도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서 있는 도리아 양식의 파르테논 신전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만, 고대 세계의 우주론이 다 담긴 걸작품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런 아테네의 모습을 보며 적잖이 놀랐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화려한 문화의 외피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문명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지혜자였습니다. 

그는 아테네 거리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도시 곳곳에 모셔진 신상들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신상들 앞에 제물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바울은 격분했습니다. 서양 사상의 뿌리요 민주주의의 고향이라는 아테네에서 바울이 본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간’이었습니다. 신들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인간 말입니다. 그 많은 ‘신상들’은 사람들의 두려움과 내적 공허함이 빚어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신들이 혹시 재앙을 내리지 않을까 싶어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 논쟁

종교는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하는 덫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거미줄처럼 얽어매 자유를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일체의 허위와 거짓과 공포와 우상들로부터 사람들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요11:44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며칠 전 우리교회 김지훈 기자가 쓴 기사를 보았습니다. 교회 부설로 영성 센터를 만들어놓고는 청소년들을 숙식시키면서 앵벌이까지 시키던 목사 부부가 수시로 폭력을 휘두른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남편 목사는 “나는 말세에 구원받을 14만4000명의 영혼을 깨우는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 

다른 교회에 가는 교인이 생기면 그의 사업이 망하고 죽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라며 교인들을 세뇌, 압박했다고 합니다(한겨레신문, 7월 13일자, 12면).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제가 거듭 강조하는 바이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자기가 특별한 사명이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믿지 마십시오. 그리고 두려움과 욕망을 자극하면서 신앙을 선전하는 이들을 믿지 마십시오. 저는 아테네를 둘러보면서 격분한 바울 사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아고라에서는 헬라인들과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에피쿠로스 철학을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쾌락주의로 번역합니다. 이 번역어 때문에 에피쿠로스학파는 상당히 많은 오해를 받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쾌락은 육체적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고통과 근심으로부터 해방된 경건한 삶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극단을 피하고 균형 잡힌 삶을 추구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감정이나 외적인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추구했기에 개인적인 수련과 자제를 중요시하던 철학 사조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훌륭한 가르침들입니다. 기독교인들도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철학은 완성된 삶의 가능성을 오직 인간 존재 그 자체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기독교와 달라집니다. 그 속에는 은총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지점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예수라는 어쩌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갈릴리 사나이의 삶과 부활을 전하는 바울의 가르침은 아테네인들에게는 낯선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말쟁이’로 치부하거나, ‘외국 신들’을 소개하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고전1:23)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는 말은 그만큼 전대미문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고전1:25)라고 말했습니다. 

• 알지 못하는 신

사람들은 바울의 생소한 가르침을 더 듣기 원한다면서 그를 아크로폴리스의 서쪽에 있는 바위 언덕 아레오바고로 데려갔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전쟁의 신인 ‘아르스의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그곳에서는 종종 재판이 열리기도 했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지혜를 겨루려는 이들로 늘 붐볐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모든 아테네 사람과 거기에 살고 있는 외국 사람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21)고 말합니다.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다는 것은 그들의 영혼이 여전히 닻을 내릴 곳을 찾지 못했음을 반증해줍니다. 바울은 그들 속에 있는 목마름을 알았기에, 주저 없이 그들의 초대에 응했습니다. 22절부터 나오는 바울의 연설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응축되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이 종교심이 많다고 말합니다. 종교심이 뭐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전도자의 말에 주목합니다. 자신의 유한함과 죽음을 의식하고 있는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있음’과 ‘없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문득 사로잡히는 영문 모를 불안감은 ‘없음’ 앞에 직면한 인간의 현기증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존재에 대한 그런 질문이나 느낌 자체를 억압하는 사회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많은 신상을 세워놓고 그 앞에 치성을 드리는 아테네 사람들은 매우 종교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지혜를 자랑하나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신들이 인생의 여러 영역들을 나누어 분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신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두려움도 다양하다는 뜻일 겁니다.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익히 알려지지 않은 신들의 노여움을 살까 무서워 사람들은 미지의 신들의 제단까지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표면적 질서 너머에 다른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를 자처했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은 ‘나를 어쩔 수 없이 끌어당기는 덫’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그는 그렇게 표현했을 겁니다. 그는 <미지의 신에게>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未知의 당신,
내 心靈 속 깊숙이 파고 든 당신을.
내 목숨을 폭풍처럼 정처 없이 떠돌게 하는 당신.
알 수 없는 당신, 그러면서 가까운 나의 血緣!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몸소 당신을 섬기고 싶습니다. 

신에 대해 알고 싶지만, 인식의 벽 앞에서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빚어내는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나는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23b)라고 말합니다. 지나칠 정도로 당돌하고 자신만만한 태도입니다. 

• 참 하나님

그는 먼저 하나님을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들리지만 아테네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만물의 근원(arche)을 자연 속에서 찾았던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탈레스는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고 말했고, 데모크리토스는 ‘원자’가 만물의 근원이라 했고, 피타고라스는 ‘수’가 만물의 근원이라 했습니다. 이런 논의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또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신전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놓은 상징적인 장소일 따름입니다. 해외에 나가 거대한 신전들의 잔해를 볼 때마다 시간을 견디지 못한 종교들의 운명을 상기하곤 했습니다. 거대한 신전, 화려한 성전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직 그 신전 혹은 성전을 통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만 영광스러워 할 따름입니다. 성전에 들어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셨던 예수님이 만일 오늘 이 땅에 오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님은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제물을 바쳐야 노여움을 푸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받음’과 ‘줌’이 충격적으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 이전에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살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기에 낭비와 파괴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주고 또 주십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어느 한 부족이나 민족에게 속한 신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만의 하나님도, 기독교인들만의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과 무관한 것은 없습니다.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라 해도, 불가지론자라 해도, 신성모독자라 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쉽게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지 없애버려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사는 곳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지만 모두가 한 호흡으로부터 태어난 존재입니다. 아프리카나 다른 빈곤 지역에서 태어나 극한 상황 속에 사는 이들이나 부유한 지역에 사는 이나 모두 하나님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대해 모른 척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만연한 고통에 눈을 감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대목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멘, 아멘입니다. 이 사실을 겸허히 인정할 때, 그리고 가슴 깊이 인식할 때 우리 삶은 신명나게 변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가 바다의 존재를 모르듯이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 삶의 순간순간은 하나님이 도래하시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머무시는 땅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생을 마음껏 경축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