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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귀한 것 (빌 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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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귀한 것 (빌 3:1-11)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 손익계산서를 만들어 어느 부분이 흑자가 되고 어느 부분이 적자가 되는지 따져봅니다. 그래서 이익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부서나 일은 과감하게 정리하거나 인원을 줄입니다. 인정에 이끌려 구조조정을 미루다 보면 기업 전체에 더 큰 손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이런 것이 필요할까요? 바울도 자신의 신앙 손익계산서를 만들었습니다. 예수 믿기 전과 믿고 난 후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는 것과 해가 되는 것을 비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전에는 만족을 주었으나 이제는 신앙의 발전에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들은 과감히 버렸습니다. 더 귀한 것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를 아무리 비싼 값을 주고 최신 모델을 구입하여도 일 년만 지나면 벌써 구형이 되고 값도 많이 떨어집니다. 세상에서는 항상 더 좋은 것, 더 비싼 것, 더 귀한 것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일만 찾고 그것만 붙잡으려 한다면 도무지 만족이 없고 피곤하고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아쉬움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현재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그것이 자기의 신앙생활이 유익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다른 것을 희생하더라도 그것만 얻으면 만족한다고 생각합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자기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말해주면서 빌립보 교회의 상황에 비추어 교우들에게 권면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내게 가장 귀한지 생각해 보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나아가며 주님 보시기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의 권면(3:1-3) 

“주 안에서 기뻐하라”(3:1)

빌립보 교회가 하나 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들 간의 갈등이요 또 하나는 외부에서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가 해결이 될 때만이 교회가 비로소 하나가 되고 기쁨을 회복할 수 있기에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하여 ‘기쁨’ 또는 ‘기뻐하라’라는 단어를 반복합니다. “주 안에서”라 함은 참된 기쁨의 근거가 세상적인 자랑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빌립보 1장에서는 주님이 자신의 생명이라 기뻐하고, 2장에서는 주님이 자신이 본받는 모델이라 기뻐하고 3장에서는 주님이 자신의 삶의 목표라서 기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기뻐하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을 전혀 번거롭게 생각하거나 귀찮게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기쁨은 신체적, 정신적, 영적 시스팀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누리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기뻐해야 합니다. 

“손 할례당을 삼가라”(3:2)

이어서 빌립보 교회를 혼란하게 하는 유대주의자들을 주의하라고 경고합니다. 개들을 삼가라,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 손 할례당을 삼가라 하며 개, 행악자, 손 할례당이라는 생생한 표현을 사용하며 ‘삼가라’는 동사를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이 교회에 들어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자 일부 교인들이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교제할 수 없는 더러운 자들이라는 의미에서 ‘개들’로 멸시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개들은 애완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처 없이 쏘다니면서 쓰레기와 오물을 먹고 자기들끼리 싸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개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가 이 복음을 내버리고 다시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는 처사이기에 개와 같은 짓이라고 경고합니다. 

또 그들을 가리켜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로 자부하며 자신들을 ‘선행자들’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해서 구원을 받으려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가르침을 전하는 악을 행하였기에 그들을 ‘행악자들’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증표로 할례를 하게 했습니다. 할례는 언약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할례를 왜 받아야하는지 그 이유는 잊어버리고 할례 자체만을 중시하면서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할례로 상징되었던 언약관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 완전히 이루어졌는데도, 유대인들은 할례 행위를 여전히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할례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고 단지 율법의 껍데기만을 붙들고 있는 무리들을 비꼬는 의미에서 ‘손할례당’, 즉 ‘살을 베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개” “행악자” “손할례당” 이라 불리는 무리들은 겉보기에는 일반 그리스도인들과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자기들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방법이 있다, 할례를 받은 것으로 부족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완전해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그들의 주장과 같이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보혈이 필요 없습니다. 육신의 할례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아 심령으로 거듭날 때만이 사함을 얻고 구원에 이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참 할례당이 되라(3:3)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마음에 할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참 할례당’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어떠한 모습을 보여줍니까? 

1)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는 의식적인 것이나 율법의 세부 사항만을 지키려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가운데 우리의 뜻과 정성을 모아 하나님께서 초점을 맞추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또한 예배는 교회당 안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구원 받은 성도들은 삶 전체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격이나 업적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엇을 했는가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주셨는지를 자랑해야 합니다. 갈 5:14,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하나님의 죄 용서를 자랑해야 합니다. 

3) 육체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자기 의지의 태도를 버리고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합니다. 여기서 ‘육체’라 함은 하나님 앞에서 나름대로 위치를 차지하려는 최고의 인간 조건들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나 자신이 가진 것, 경험한 것을 의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였습니다. 


바울의 과거(3:4-6) 

바울은 자신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부모들이 자기에게 물려준 것이요 또 하나는 자신이 이룬 업적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구원에 필요하지 않는 그런 것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 자신이 그들만 못해서 열등감을 가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요, 둘째는 자신이 과거에 자랑거리로 여겼던 것들이 이제 깨닫고 보니 하나님의 의를 얻는데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가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육체를 신뢰했던 자신의 과거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들

1)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증표로서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태어난 지 제 팔일에 행해집니다. 이삭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바울도 율법의 규정을 제대로 지키는 부모 때문에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니 출신 성분상 정통 유대인입니다. 

2)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바울의 부모는 그 당시 흩어져 살고 있던 많은 유대인처럼 혼혈된 혈통에 속하지 않았고, 또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에 귀화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이며, 하나님과 씨름 후에 '이스라엘'이란 칭호를 받은 야곱의 직계 후손입니다.

3) 베냐민 지파: 베냐민 지파는 작은 지파였지만 높이 평가되되었습니다. 야곱이 총애하는 라헬에게서 난 막내가 베냐민입니다. 열두 아들 중 유일하게 약속의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을 배출한 지파입니다.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된 후에도 다윗 왕조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에스더 때 유대 민족이 자칫하면 멸망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민족을 구한 모르드개도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4)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자신 속에 순수한 히브리인의 피가 흐르고 로마제국에 흩어져 살던 헬라파 유대인들과 달리 히브리어를 어릴 때부터 사용했고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자신이 이룬 것들 

바울은 정통 유대인이란 특혜를 안고 태어났을 뿐 아니라 자라면서 정통 유대인이라 자랑할 만한 업적을 많이 가졌습니다.

5)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바울도 유대땅에서 태어나지 않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지만 바리새인의 아들도 태어났습니다(행 23:6). 바리새파는 당시 소수였지만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는 그룹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렸을 때 누나가 있는 예루살렘에 유학을 가서 유명한 율법학자인 가말리엘 밑에서 교육을 받았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율법을 지켰습니다.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열심은 유대인들이 가장 자랑하는 덕목입니다. 율법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에 대한 충정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나기 직전까지 바울은 교회를 이단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핍박하였습니다. 스데반이 죽이는데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멀리 다메섹까지 가서 도망간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오려고 갈 정도로 극성스러웠습니다.

7) 율법의 의로는 흠 없는 자: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율법에 규정된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율법의 의를 흠 없이 세운 자였습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바울은 모든 것을 다 갖춘 자였습니다. 가문도 좋고 혈통도 좋고 최고의 학문을 배웠고 종교적인 열심도 대단하여 장래가 촉망되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 빌립보 교회를 어지럽히는 유대주의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통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소속된 엘리트 그룹인 바리새인들을 떠나고 자신이 누리던 모든 명예와 특권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범죄자로 낙인찍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의 도를 좇는 그룹에 참여하였습니다. 바울의 행동은 유대인들이 볼 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총독이었던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지 설명하고 또한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 말을 듣던 베스도 총독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행 26:24)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26:25, 29) 


변화된 바울(3:7-11)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후에 가치관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그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았거나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들을 과거에는 자랑스럽게 여겼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전에는 그의 손익계산서에 ‘이익’으로 평가되던 것들이 이제는 ‘손해’로 평가하고 심지어 배설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깁니다(3:7) 

바울은 자신의 지난날을 후회하였습니다. 자신의 열심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시작되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한 행동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세속화의 물결 속에 교회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습니다. 외적인 업적, 성과가 가치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할례의 표시를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느끼듯 많은 경우에 믿는 사람들도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 은혜를 말하면서도 은연중에 재력, 권력, 학력을 의지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려 합니다. 또한 자기의 한일이 알려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을 가지기도 합니다. 자신과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가치를 부여하고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지나치면 교만이 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은 바울이 위에서 지적한 모든 것들을 가리킵니다. 부모에게서 이어받은 것들이나 자신이 성취한 업적을 총칭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고 보니 이 세상에서 좋다고 귀하다고 붙잡았던 것들이 이제는 대단치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전에는 율법을 잘 지킴으로 자신의 의를 쌓으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자기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우리가 이룬 세상적인 것을 모두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던 일을 다 정리하고 전부 신학교로 가고 선교지로 가라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과 같이 과거의 자랑거리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평가하고 과거에 그렇게 얻으려고 목적으로 삼던 것들을 이제는 주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회심하였다고 하여 로마 시민권을 포기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을 복음 전파의 수단으로 유용하게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진 율법의 방대한 지식과 헬라의 학문이 성령의 인 치심 가운데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3:8)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전에 의지하던 것들을 포기하고 신앙생활의 발전에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여기서 ‘배설물’은 음식 찌꺼기나 몸 밖으로 나온 똥을 가리킵니다.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은 허무주의를 강조하거나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위하여 사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임을 깨닫고 보니 전에 그처럼 대단하게 여기고 자부심을 가졌던 것들이 시시해졌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어떻게 하면 자기의 노력을 인하여 의를 쌓으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으며 만족한 삶을 살 것인가 하였으나, 이제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 것인가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모두 바울을 본받아 이와 같은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왜 사는지 영적으로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과거의 경력이나 직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현재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항상 감격하여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기를 기뻐하며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얻기 위하여(3:8-11)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 하였는데 이것을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그리스도를 얻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안다” 이 세 가지는 바울의 기도의 제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들도 바울과 같은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1) 그리스도를 얻기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얻는다”에서 ‘얻는다’는 상업적인 용어로서 저울 양편에 각각 무엇인가 올려놓고 그 중에서 한쪽을 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덜 중요한 것으로 상대화시켰습니다. ‘얻는다’는 현재형으로 사용한 것은 바울이 지금도 그런 자세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을 때에 수액을 받아 열매를 맺듯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공급자요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능력을 받으며 삶과 인격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그를 날마다의 삶에서 경험하려고 하였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킵니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의롭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의의 기원은 하나님이고 방법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기를 위하여 얻는 의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의를 한번 받으면 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계속 추구할 것을 제시합니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 속에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아는 것”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체험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회심할 때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더구나 바울은 현재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려고 합니다. 

이런 부활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얻어집니다. 사즉생. 죽고자 하면 산다는 것이 기독교의 역설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감옥에 갇혀서도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의 삶 속에 부활의 권능이 역사하며 고난 속에서도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난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전도하는 과정에 자기가 당하는 고난을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바울은 수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바로 예수의 부활의 능력이 자기의 삶을 통하여 역사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때로 고난을 당하지만 그 결과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영생을 얻게 될 것을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중요한 것이고 귀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앞으로 계획하는 일이 과연 영원의 관점에서 과연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일인지를 살피며 보다 가치 있는 일에 우리의 생을 투자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평가보다 주님의 평가에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눅 12장에 농사를 지어 많은 소출을 거두는 한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무슨 계획을 세웁니까? 현재의 창고가 적으니 그 창고를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스스로 만족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무슨 말씀하십니까?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어리석은 부자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곡식을 거두고 창고를 짓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곡식도 내 것, 창고도 내 것, 얻은 재물로 내 육신의 쾌락만을 위하여 사용하려는 등 모든 삶의 중심이 나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원에 비하면 한 점에 불과한 이 땅에서 삶을 위하여 노후 대책을 세울 줄 알았어도 영원의 삶을 위하여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 취하신 자도 하나님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여 온 힘과 정성을 쏟은지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아무 것도 투자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 물으실 때 면목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전철을 밟지 맙시다. 보다 귀한 것, 보다 가치 있는 것에 우리의 시간, 달란트, 물질, 정성을 투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을 위하여 투자하는 것이 지혜 있는 성도의 삶입니다. 언제부터 준비해야 합니까? 자기가 언제 주님 앞에 선다고 확실히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부터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섰을 때 할 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방에서 어려움을 당해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이 가져올 유익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집니다. 서로 위로하며 믿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삶을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로 비췸을 받았기에 우리의 이웃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춰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다른 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던 것 같이 예수 때문에 버릴 것은 버리는 결단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살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맛보며 고난에도 동참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들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 가장 가치가 있는 것, 가장 고상한 것을 인하여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채우시고 넘치도록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앞에 섰을 때 점도 없이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설 수 있기를 소망 중에 바라며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주의 일에 힘쓰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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