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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 또 기도 (렘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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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또 기도 (렘 21:1-7) 
 
 
❚기적과 기도를 안 믿는 사람들

크리스천들에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은 하루에 기도를 얼마나 합니까?” 어떤 이는 매일 몇 시간 이상 기도한다고 대답했고, 또 어떤 이는 하루 세끼 밥 먹을 때 몇 분 기도하는 것 말고는 기도를 안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효자교회 성도 여러분은 하루에 기도를 얼마나 하십니까? 그래서 크리스천들에게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그렇게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답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제일 많은 답은? 1위가 “바빠서”였고, 그 다음이 “기도하는 법을 몰라서”였습니다. 

저는 이 답을 보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정말 바빠서 기도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루에 TV를 몇 시간씩 보고 잠을 몇 시간씩 자는데 기도할 시간이 없다? 이건 진짜 이유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핑계지요. 그렇다면 기도하는 법을 잘 몰라서 기도를 안 한다? 아니, 교회에서 얼마나 기도하는 법을 열심히 가르치는데 기도하는 법을 모르다니, 이것도 진짜 이유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은 이것입니다. “기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과격한 말이지요? 기도를 믿지 않는다니요.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를 안 믿는다니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어떤 책에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유가 너무 많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큰일은 너무 어려워서 기도 안 한다. 또 작은 일은 너무 시시해서 기도 안 한다. 그래서 늘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왜 안 하냐? 이유가 너무 많은 거지요. 

큰일은 너무 어려워서, 이런 기도가 정말 응답 받을까 걱정되고 안 믿어져서 기도 안 하고(이를테면 암 같은 중대한 질병이나 사업이나 가정에 생기는 심각한 위기 등 정말 기적이 필요할 때), 반대로 너무 사소한 일, 작은 일은 시시해서 “뭐 이런 걸 가지고 다 기도를 하나?” 싶어 기도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기도를 안 하는 이유가 너무 많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바빠서 안 하고, 기도하는 법을 잘 몰라서 안 하고, 기도를 유창하게 못 해서 등등 너무 이유가 많고 핑계가 많습니다. 하지만 정말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기도를 안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안 믿기 때문이고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기적을 안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시편 40:5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정말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래서 그 믿음으로 기도의 능력을 믿고 기적을 믿는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응답을 받고 셀 수도 없는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며 사는데 우리는 정작 기도를 안 믿고 기적을 믿지 못해서 기도 응답도 못 받고 기적도 못 일으키며 사는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오늘은 “기도 또 기도”라는 제목으로 기도를 왜 꼭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미리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이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겠다”(삼상 12:23)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를 안 믿고 기도를 안 하는 것은 죄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옵션(선택)이 아닙니다. 기도는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합니다. 또 기도를 하지 않는 죄 못지않게 큰 죄는 잘못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우리는 잘못된 기도의 전형적인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

주전 588년 강대국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대군을 거느리고 남왕국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4절). 그 까닭은 유다 임금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운 사람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인데 시드기야가 애굽 편에 서서 주변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이 때 선지자 예레미야는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애굽 같은 강대국이나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도 사람 의지하지 말고 권력이나 세상의 권세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 바랍니다. 세상 권세와 모든 사람은 언젠가 무너집니다. 

대통령의 형님도 감옥에 가고 막강한 권력자들도 다 언젠가 넘어집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만 영원히 의지하실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예레미야는 정말 시드기야가 살 길을 알려준 것입니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그 말을 안 듣지요. 그래서 과연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바벨론 왕이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고 배신자 시드기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니 이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안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오래 전부터 이런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리라고 경고할 때 시드기야 왕과 모든 사람들은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무시하거나 “괜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사회를 혼란시키는 불순분자”로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미움과 고초를 당해야 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예레미야가 경고한 대로 정말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이 되었으니 할 수 없지요.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어제까지는 예레미야의 말을 곧이 듣지 않고 예레미야를 위험분자로 취급했던 시드기야 왕은 급기야 신하인 바스홀과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 제발 도와달라고 사정사정 합니다. 염치고 체면이고 다 필요 없지요. 자기가 죽게 생겼는데,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부끄럽게도 그 기세등등하던 시드기야 왕은 지금 예레미야에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 안 들으면 우리도 이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십니다. 그분의 판단은 언제나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드기야 임금처럼 자신의 판단이나 주변 사람들의 말을 더 의지하면 우리도 시드기야처럼 한 방 얻어맞게 됩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반드시 당하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꼭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이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때론 그분의 뜻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반드시 순종하십시오. 그 길만이 우리의 살길이요 우리가 수치나 부끄러움이 아닌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는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드기야의 세 가지 잘못된 기도

자, 아무튼 시드기야 왕은 부끄럽지만 신하들을 예레미야에게 보내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입니다. 다함께 읽지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니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도하면 혹시 하나님이 기적으로 우리를 도우실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시드기야가 정말 믿음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믿음이 있어서라기보다 이때로부터 약 100여 년 전인 주전 701년에도 예루살렘이 앗수르 임금 산헤립에게 포위를 당했지만 하나님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기적을 일으켜 그들을 물리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사건을 기억하며 “예레미야, 너 같은 선지자가 기도하면 혹시 하나님이 그때처럼 기적을 또 일으켜주실 줄 아냐?”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라 혹시나 하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지요. 우리는 이 시드기야 임금의 말 속에서 잘못된 기도의 태도 세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설교 첫머리에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죄를 저지르고 있고, 기도하지 않는 죄 못지않게 잘못된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드기야의 태도가 바로 대표적인 잘못된 기도의 모습입니다. 그 잘못 세 가지가 무엇일까요?

첫째, 급할 때만 하나님 찾고 필요할 때만 기도하는 잘못입니다. 오늘 이 문제가 생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시드기야에게 이런 위기가 닥쳐왔습니까? 예레미야의 말을 안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레미야의 말을 안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었습니다. 이렇게 평상시에는 하나님 안 찾고 의지하지 않다가 자기 급할 때만 하나님 찾는 것 보세요. 이게 문제입니다. 평소에는 시드기야처럼 하나님의 뜻 아닌 자기 생각과 뜻을 더 앞세우다가 그 바람에 얻어맞아 위기가 오고 문제가 닥치면 그렇게 급할 때만 하나님 찾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요정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 아닙니까? 평소에는 요술램프 안에 조용히 들어 있다가 나 필요할 때 램프를 슬슬 문지르면 펑 하고 나타나 “주인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는 것이 램프의 요정이지요. 하나님은 평상시에는 별로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잘 나갈 때, 아무 문제없을 때는 하나님은 불필요하고 내가 급할 때만 찾는 것입니다. 아니지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달라야 합니다. 평상시에도 늘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창 5:24).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과 교제하고 그 뜻을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급할 때만 찾는 119 신고센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 필요할 때만 나타나는 분이 아닙니다. 기도는 급할 때, 필요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평상시에도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듯이 기도도 늘 평상시 호흡처럼 습관화 되어야 합니다.

둘째, 시드기야의 말이 잘못된 것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다시 볼까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뭐가 잘못입니까? 예레미야에게 “네가 선지자니까, 네가 하나님하고 직통이니까 네가 기도하라”고 한 것이 잘못입니다. 기도는 누가 하는 것입니까? ‘내’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남을 위해 하는 중보기도도 귀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는 중보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이 기도하지 않고 남에게 기도해달라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시드기야는 혹시나 하고 기적을 바라며 예레미야에게 “네가 기도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당장 자기 자신이 엎드려 금식하며 기도했어야 옳습니다. 임금이 금식하고 목숨 걸고 기도하면 신하들이 따라하고 그러면 온 백성이 금식하며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이 기도 왜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시드기야는 정작 자기는 기도 안 하고 예레미야에게 “네가 기도하라”고 했기에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기도하십시오.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부인은 기도의 아내로서, 기도의 어머니로서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는 자녀대로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와이프가 기도하니까, 우리 부모님이 매일 기도하니까”가 아니라 내가 엎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이 기도하겠지, 기도의 어머니 권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알아서 기도할거야”가 아니라 내가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응답받고 그래야 역사가 일어나는 가정과 교회 됩니다.

셋째, 여러분이 시드기야의 말에서 잘못된 것을 한 번 찾아보세요. 예, ‘혹시’입니다. 2절 뒷부분에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지요? 이 ‘혹시’라는 말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혹시’라는 말은 불신앙과 확신이 없는 모습을 뜻합니다. 시드기야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혹시나 하나님이 또 한 번 기적을 일으켜 우리를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래가지고 기적이 일어나겠습니까? ‘혹시’ 가지고 무슨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시드기야처럼 오늘 우리도 ‘혹시’ 하며 불신앙과 확신 없는 모습, 기적을 믿지 않으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다행이고 안 도와주시면 할 수 없고” 식으로 기대하지 않습니까? 기도의 응답은 ‘혹시’가 아니라 ‘반드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 또 기도

여러분, “기도 또 기도” 이 말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기도는 옵션이 아니고 선택이 아닙니다. 기도는 필수고 기도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몇 해 전 뉴스에 아주 황당한 사건이 났어요. 아이가 생일잔치를 해서 엄마가 아이가 좋아하는 미니 컵 젤리를 사주었는데 아이가 그만 그것을 먹다가 목에 걸려서, 기도가 막혀 질식사 한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기도가 막히면 죽습니다. 우리 목의 기도, 숨 쉬는 관이 막히면 질식사 하는 것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기도가 막히면 죽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늘 열려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적 호흡입니다. 그러므로 늘 기도하십시오. 기도 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필요할 때만 기도하고, 급할 때만 하나님 예수님 찾지 말고 늘 평상시에 기도를 통해 생명의 호흡을 이어가고 하나님을 매일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삽니다. 기도가 끊어지는 순간 우리의 영적인 호흡은 중단되고 우리의 영은 죽고 맙니다.

오늘 본문 3절부터 보니 결국 하나님은 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앞장 서 유다와 시드기야 왕을 심판하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럼요. ‘혹시’라는 기도가 어떻게 응답 받겠습니까? 잘못된 기도가 어떻게 응답 받습니까? 하지만 반대로 ‘혹시’가 아닌 ‘반드시’라고 믿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 받습니다. 바른 기도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엎드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요즘 힘드십니까? 고민거리나 해결할 문제가 있습니까? 기도로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꽉 막힌 문제가 있습니까? 속 터지고 답답한 일이 있습니까? 바벨론 군대에게 포위된 것처럼 사방을 에워싼 문제로 답답하십니까? 기도로 뚫으시기 바랍니다. 기도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놓고 끙끙대며 씨름할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

그렇습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 받습니다! 기적은 반드시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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