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마음의 고통 (롬 1:9-13)

첨부 1


마음의 고통 (롬 1:9-13) 

여름이 가까워지면 산에 아카시아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아카시아 꽃이 끝날 무렵이 되면 밤꽃이 피고 그 밤꽃이 지고나면 밤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밤에는 벌레가 많습니다. 그만큼 영양이 많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밤을 보면 구멍이 많은데 다 벌레구멍입니다. 옛날에는 밤을 먹다가 밤 속에서 벌레가 나오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밤을 먹다가 벌레가 몇 마리 나올 때 가장 기분이 나쁜가?’ 라는 질문인데 어떻습니까? 반 마리라고 합니다. 그 까닭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미 내 배속에 나머지 반 마리가 들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반 마리가 제일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캄보디아 방문 때 캄보디아의 시골마을 스텅트랭에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거의 아침부터 국수를 먹다가 그 날 저녁은 맛있게 밥을 먹었습니다. 그릇에 담은 밥을 번쯤 먹었을 때 맛있게 먹던 중 지금까지 씹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 씹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씹던 것을 뱉었더니 바퀴벌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 마리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릇을 다 찾아보아도 나머지 반 마리가 없었습니다. 호들갑을 떨 수 없어서 찜찜했지만 그냥 먹고 있던 중이었는데 한참 먹다 보니 또 좀 이상했습니다. 바퀴벌레 다리 하나가 나왔습니다. 반 마리 중 다리 하나는 겨우 찾고 나머지는 찾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함께 있던 교우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분이 그런 일이 있어서 주인에게 밥에 바퀴벌레가 있었다고 항의했더니 주인이 느긋한 표정으로 “반 마리만 있는 밥 밖에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온 마리가 들어있는 것으로 바꾸어드릴까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나라에 우리 교회 아이들 네 명을 보냈습니다. 보낸 지 거의 1년이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 아이들을 보낸 곳은 그런 바퀴벌레가 들끓는 시골이 아니라 도시입니다. 그런데 시골은 조금 괜찮지만 도시는 매연 때문에 매우 덥습니다. 그 더운 곳으로 우리 아이들을 보냈습니다. 이번 방문 때에도 조금 괜찮은 날은 40도 또는 41도였다고 합니다. 공기가 따끈따끈합니다. 그래도 견딜만하니 미리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다들 그런 곳에 가게 되면 또 견디게 됩니다. 이런 나라에 우리 교회의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아이들 네 명을 1년간 보냈는데 부모님들은 오죽 했겠습니까만 저도 걱정이 많았고 마음을 참 많이 썼습니다.

이번에 가서 그 아이들을 만났는데 너무 반가웠습니다. 일주일 동안 캄보디아의 오지라고 할 수 있는 시골인 스텅트랭 그리고 라오스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저는 늘 그 아이들과 같이 지냈습니다. 40도가 넘었지만 손을 잡기도 하고 남자아이들은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옆에 끼기도 하고 여자아이들은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더운 날씨였지만 손을 잡고 껴안는 것이 조금도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어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에게 이 아이들이 왜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내놓고 1년 동안 저로서는 참으로 그 아이들을 자주 생각했습니다. 매일 이라고 한다면 약간 지나칠 것 같고 거의 매일 그 아이들을 생각했습니다. 기도도 했습니다. 몸으로 만나거나 눈으로 직접 보거나 귀로 아이들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늘 마음으로 그 아이들을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가깝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 자신은 그렇다 할지라도 그 아이들도 나 못지 않게 저를 반가워하고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덥겠습니까?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습니다. 목에 땀이 흘러 목에 수건을 감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아이들도 손잡고 안는 것을 전혀 싫어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저들을 좋아하니 그 아이들도 좋아한다고 생각했었지요.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매일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서 30분 정도는 정신을 가다듬은 후 4시부터 5시까지 한 시간 동안 기도하고 5시부터 6시까지 예배를 드립니다. 그때 매일 저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지만 매일 저를 위해서 기도하다 만났기 때문에 저도 반가웠고 그 아이들도 반가운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많이 컸습니다. 목사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했다면 자기 부모 형제들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아이들이 힘든 점도 많았겠지만 참으로 감사한 바가 많았습니다.

여러분, 꼭 몸으로 만나야만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꼭 내 것으로 소유해야지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몸으로 만나지 못해도, 내 귀로 소리를 듣지 못해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아도 내가 누릴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마음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도 모자라고 저것도 모자라는 상황,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참으로 모자라게 산다고 생각할 상황 가운데서도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음에도 누리지 못하고 소유하고 있음에도 고마운 줄도, 좋은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으로 누리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이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의 길이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 신자들은 기도라는 길이 있지 않습니까? 어디든지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기도라는 길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만날 수 있고 누구든지 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을 만나고 싶습니까? 기도를 통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한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아셔야합니다. 만약 세상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자들의 탓입니다.

‘Touch the world through the prayer.. 기도를 통해서 세상을 만져라, 주물러라 마음대로 움직이라!’ 우리는 기도를 통해 얼마든지 세상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만약 정치계가 잘못 되었다면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만약 우리들의 자녀들이 잘못 되었다면 상황이 잘못되거나 친구가 잘못하거나 학교 선생님들이 잘못 가르쳐서가 아니라 부모들이 아이들을 기도를 통해서 제대로 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길이 있고 기도에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누렸으면 참 좋겠습니다. 소유하면 더 좋겠습니다. 그러나 소유하지 않아도 보지 못해도 심지어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우리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로마서 1장입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기독교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내용 자체에 대단한 기독교 진리가 있습니다. 로마서는 한편 대단한 기독교 진리 못지않게 내용이 참으로 따뜻합니다. 자상함과 친밀한 그리고 사랑이 넘칩니다. 이 편지를 보면 바울이 로마 교회 교우들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음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부탁할 수 있는 무척 가까운 사이임을 틀림없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구제 헌금을 요청합니다. 우리 교회도 오늘 구제헌금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구제헌금을 부탁할 때에는 혹시 시험에 들지 않을까 하여 조심합니다. 그러면서도 저 스스로 그 문제에 대해 왜 이렇게 조심하는지에 대해서 늘 걸리고 눌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 교회에 저 멀리 있는 예루살렘의 교회의 교우들을 위해서 구제헌금을 요청하는데 부탁차원이 아니라 아예 명령조 입니다. 


여기에 대한 기록을 함께 보겠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롬15:23-24) 라고 합니다. 여기 24절의 ‘얼마간 가쁨을 가진 후에’ 라는 말씀은 만나서 기쁜 것도 있지만 하나 더 있습니다. 로마 교회 교우들이 사도 바울이 선교 여행하는데 필요한 돈을 주어 스페인으로 가서 선교하기 바란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여러분들이 나한테 선교비를 주는 것은 여러분들의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25절에서는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어 교우들이 아주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예루살렘에 간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26절에서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유럽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하여 지금 그것을 가지고 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7절에서는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럽 교회는 유대가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이라고 부릅니다. 저들이 기쁜 마음으로 구제헌금을 했지만 그것은 저들이 기부한 것이 아니라 빚진 것을 갚는 것밖에 안 되므로 당연하게 구제헌금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로마 교회도 마찬가지로 이방인이므로 빚 갚는 심정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구제헌금을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런 명령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십 수 년 또는 몇 년간 저와 함께 한 여러분들에게 제가 구제헌금을 부탁할 때에도 조심스럽게 하고 있는데 바울은 로마 교회 교인들과 얼마나 가까웠으면 이렇게 명령조로 구제헌금을 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바울은 로마 교회 교우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롬15:30)..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또,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롬15:31-32).. 

내가 여러분들에게 갈 때 여러분들이 나를 위해서 내가 쉴 곳을 다 준비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내가 갈 테니 내 잠자리와 먹을 것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대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명령을 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마지막 16장에는 구절마다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먼저 1절과 2절에서,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롬16:1-2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을 2절에서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롬16:2).. 뵈뵈가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나의 빚을 여러분들이 대신 갚는 심정으로 뵈뵈를 잘 섬기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당부와 같습니다. “얘야, 나는 이제 저세상으로 가는데 나를 도와준 사람들을 나 대신 잘 섬기고, 아버지처럼 모셔라.” 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3절)라고 말하면서 그 까닭을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4절).. 바울을 위하여 그들이 헌신했으므로 그 빚을 로마교회가 갚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요즘 같으면 자식에게도 부탁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11절).. 나는 여러분들 보기를 간절히 원하고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13절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13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보낸 편지는 여러분들이 나를 그렇게 보고 싶어 하고 나를 그토록 원하지만 내가 가지 않은 것은 안 간 것이 아니라 사정이 있어서 못 간 것이니 잘 양해해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대단히 가까운 사이임이 틀림없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로마 교회 교인들과 바울이 함께 하여 너무 정이 들어 피차 보기를 몹시 원하지만, 멀리 헤어져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만나기를 너무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중요한 사실은 이 편지를 한 이때까지 바울과 로마 교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교회를 세운 것도 아니었고 한 번도 그 교회에 가본 적도 없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적어도 로마 교회와 바울과는 생면부지입니다. 물론 교인들 가운데 옛날에 바울과 만난 적이 있었던 사람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생면부지의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 교인들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9절에 단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9절).. 바울 자기는 항상 쉬지 않고 로마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 교우들은 바울을 잘 알지 못할지 모르지만 바울은 그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항상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 사람들을 만났고 오랫동안 보았고 그 사람들과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 아니라, 어색한 사람들이 아니라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가 이렇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과 서먹서먹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아직 먼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좀 섭섭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밤낮 여러분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집 나간 탕자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못된 아들은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은 아버지 재산을 받아 나가 탕진하면서 방탕하게 보내는 동안 아버지를 새까맣게 잊었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그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 아들이 재산을 다 탕진한 후 고생을 견디지 못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연세 드신 아버지가 뛰어가지 않습니까? 눈도 별로 좋지 않았을 것임에도 다른 사람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아버지는 멀리서 알아보고 뛰어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항상 아들을 보고 있었고, 생각하고 있었고, 손을 잡고 있었고 그 아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그러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그러하시고 성령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늘 기도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또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의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간구하시는 것은 곧 성부 하나님께서 간구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여러분들을 생각하고 계시고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34절에서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4절) 성자 하나님을 말씀십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여러분을 늘 보고 계시고, 늘 생각하고 계시고 여러분의 손을 잡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을 얼마나 잘 알고 계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섭섭하고 서럽고 가슴 아픈 것을 너무 잘 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너무나 좋아하십니다.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얼마나 기다리시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늘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지 않고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찬송가 315장 가사에서는 하나님 마음을 그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돌아오너라,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어둡고 매우 험악한데 돌아오너라’ 라고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우리가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2절에서는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우리 아버지께 돌아오너라.’ 해가 져도 등불을 켜놓고 기다리십니다. 3절에서는 ‘환난이 있는 곳과 죄를 범함 데와 미혹 받는 데서도 돌아오라’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또 4절에서는 모든 것 풍성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큼 하나님을 보지 않고 만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잘못했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좋아하지 않고 나를 미워하고 받아주지 않을 것 같다는 못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식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터지고 깨지고 엉망진창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고통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환란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면 되는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장탄식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 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렘8:18-20)..

구원이 하나님께 있지만 가지 않습니다. 죄송해서 가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을 것 같아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까 하여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딸 내 백성이 상하였음으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렘8:21)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괴로움을 당할 때 하나님도 함께 괴로움을 당합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렘8:21-22)라고 탄식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혹시 큰 잘못을 했을지라도, 혹시 큰 죄, 무서운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을 피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늘 그 자리에 계십니다. 하나님께 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을 떠난 자가 있으면 돌아가십시오. 

우리 모두 늘 하나님 가까이 가십시다. 더 자주 가십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기다리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오기만 하면, 여러분이 부르기만 하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가면 풍성함이 있습니다. 평안함이 있습니다.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