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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세상 만들기(7) : 효도 문화가 계승되는 세상 (룻 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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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세상 만들기(7) : 효도 문화가 계승되는 세상 (룻 1:15-18)

오늘은 우리 교회가 설립된 지 15주년이 되는 주일이고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네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성숙한 성도, 둘째는 행복한 가정, 셋째는 건강한 교회, 넷째는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어버이 주일이어서 좋은 세상 만들기 일곱 번째로 “효도문화가 계승되는 세상”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성숙한 성도가 되면 가정은 자동적으로 행복한 가정이 될 것이고, 가정이 행복하면 그 가정 구성원들로 만들어진 교회는 건강해 질 것입니다. 교회가 건강해 지면 세상은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말을 합니다. 

효도가 기본 근간이 된 나라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미풍양속을 지녀왔습니다. 전통 윤리의 핵심은 경로효친(敬老孝親)의 정신이었습니다. 물질보다는 인간을 중시하고 향락보다는 청렴하고 절제하는 삶을 추구하며 이해타산과 상호경쟁을 앞세우기보다는 인정과 상호존중을 더 귀하게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물밀듯이 흘러들어 온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경로효친의 인륜질서는 퇴색되어 갔으며, 우리의 전통윤리도 그 자취를 잃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술과 능률을 앞세우는 서양의 산업윤리가 등장하면서 효도 문화는 그 설 자리를 잃어 버렸습니다. 효도 문화는 현대 사회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평등, 개성과 인권 존중의 윤리 규범과 상충하기 때문에 구시대의 유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청소년의 과격한 폭력과 성범죄의 급증, 10대 미혼모의 증가, 부모의 이혼으로 탈선하는 청소년의 증가, 남아선호 사상에 따른 낙태로 성비의 불균형, 가정 폭력과 존속 살해의 급증, 부모 봉양의 기피 등 윤리적 위기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효도 문화를 계승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비용을 엄청나게 지불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전체 살인사건에서 존속살해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강원지방경찰청 정성국 박사에 따르면 전체 살인사건에서 존속살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미국이 2%, 영국 1%, 프랑스 2.8%인 반면, 한국은 약 5% 전후라고 합니다. 특히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2008년 1월부터 2009년 6월 사이 일어난 72건의 존속살해 중 아들이 어머니를 죽인 게 37건으로 50%가 넘는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부모의 소득이 낮을수록 자녀들의 발길이 줄어든다는 충격적인 조사결과도 나왔습니다. 정재기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교수의 '한국 가족. 친족간 접촉빈도와 사회적 지원 양상: 국제 간 비교' 논문에 따르면 부모 소득이 1% 높아지면 부모가 자녀와 1주일에 한 번 이상 대면 접촉할 가능성이 2.07배나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른 14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국만이 부모의 소득이 높아야 자녀들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부모도 친족도 '도구적'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어머니날이 되면 어머니 은혜 감사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낳실재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재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높다하리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낳실재 무통분만 쉬 낳으시고 기르실재 할머니가 다 키우시고 하기스 남양분유 갈아 주시며 어머니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아가씨 몸매를 가꾸고 계시네 하늘아래 엄마 기대 끝이 있으랴 어머니의 잔소리 가이 없어라” 

부모의 은혜를 모르고 당연히 생각하고 버릇없는 아이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효도 문화가 계승되고 발전되어 사회가 안정되고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 할 텐데 버릇없는 아이를 가정에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부모님께 인사드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존댓말 보다 반말을 하고, 부모님 옆에서 바른 자세로 앉아 텔레비전 보기기보다는 리모콘을 가지고 제 마음대로 화면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아이가 없고 부모님의 물건을 함부로 다루고, 학교에서 돌아와도 부모님께 인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식사할 때 부모님보다 먼저 수저를 들고, 맛있는 것은 저 혼자 다 먹는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일 시키실 때 찡그리고 즉시 행동하지 않고 부모님께 다 해 주기만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아내를 일찍 여의고 3형제를 애지중지 기른 아버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없이 자란 아들이라고 아버지는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주었답니다. 방에 늘어져 있던 아들이 시원한 물이 먹고 싶으면 거실에서 TV보고 계시던 아빠에게 큰 소리로 "아빠 물 좀 갖다 줘"라고 한답니다. 

아버지가 "냉장고에 있으니까 네가 갖다 먹으렴."하면 5분 후 
"아빠 물 좀 갖다 주라니까!" 
"네가 직접 가서 마시라니까!" 또다시 5분 후 아들은 
"물 안갔다 줘!" 그런답니다. 아버지가 화가나 
"갖다 먹어! 한 번만 더 부르면 혼내 주러 간다!"라고 말하면 다시 5분 후에 
"아빠, 저 혼내 주러 오실 때 물 가지고 와”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학교에 갔다 온 큰아들이 안방 문을 활짝 열면서 아버지에게 책가방을 던졌답니다. 
"야! 나 학교 갔다왔다." 

둘째 아들도 그랬답니다. 
그런데 막내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큰절을 하면서 
"아버지. 학교에 다녀왔습니다."라고 공손하게 말했답니다. 

아버지는 
"음. 그래. 너밖에 없다"며 흐뭇해했답니다. 
그러자 막내아들이 두 형을 쳐다보면서 말했답니다. 
"제, 좋단다." 

식사시간이 되자 큰아들이 방문을 걷어차면서 아버지에게 
"야! 밥줘." 했답니다. 

둘째 아들도 똑같이 했답니다. 
아버지는 시름에 빠졌답니다. 

그러자 막내아들 밥상을 들고 와서 
"아버지. 식사하시죠."라고 말했답니다. 

아버지는 너무 감동해서 그만 울음을 터뜨렸답니다. 
그러자 막내아들이 말했답니다. 
"쟤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울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버릇없는 아이들을 풍자한 유머입니다. 

좋은 세상 살려면 효도하는 자녀로 길러야 합니다. 우리가 효도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효도는 모든 도덕의 근간으로서 사회의 기초 집단인 가정을 안정시키고, 가정의 안정에서 사회의 안정으로, 그리고 국가의 안정으로 연결시키는 기본적 윤리개념입니다. 하나님은 효도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주시면서 인간에 대한 첫 번째 계명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잘되고 건강하게 장수하는 비결이 효도라고 하나님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신 5:16)" 믿습니까?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효도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면 축복을 주실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의 효도는 그것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따라서 선민(選民)으로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는 사람으로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멸망할 존재가 되느냐 하는 긴장과 준엄함이 내포된 계명인 것입니다. 효도하지 않는 자는 신21:18-21에서는 성 밖에서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잠 30:17)"라고 했습니다. 객사하는 이야기입니다. 효도는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효도 문화를 계승하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효도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절대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효도 문화를 계승해야 합니다. 

사람은 유익과 편리, 쾌락에 따라 윤리적 판단도 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효도도 자신에게 유익이 되면 합니다. 자신에게 편리를 주면 합니다. 자신에게 기쁨을 주면 합니다. 조금 더 편한 삶을 살기 위해, 조금 더 기쁨을 누리기 위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합니까? 아버지가 효도하면 100억을 유산으로 주겠다면 효도하지 않겠습니까?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이익이 없다고,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효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나의 기쁨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효하는 것입니다. 

며느리가 5년 효도 잘하면 승용차 갈아 주어 보십시오. 대부분 효도합니다. 효도해 보았자 손해만 되고 힘만 든다고 생각하니까 효도하는 체만 하는 것입니다. 늘 잔소리를 하지만 남편과의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가 있었답니다. 

어느날 인질범이 시어머니를 납치해 간 것입니다. 그리고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답니다. 
“너희 시어머니, 내가 데리고 있다. 1000만원을 가져오면 풀어주마.” 

그 때 며느리가 
“어림없는 소리, 니 맘대로 해.” 

그러자 인질범이 다시 말했답니다. 
“좋다. 그럼 너희 시어머니 도로 데려다 놓겠다.” 

그러자 당황한 며느리는 황급한 목소리로 
“여보세요. 은행 계좌 번호가 어떻게 되죠?” 라고 물어 보더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세태를 풍자한 유머입니다. 

그 시어머니가 성지순례를 갔답니다. 그런데 그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무덤을 보시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비용을 다 대고 장례를 치루어 준다고 했답니다. 그러자 며느리가 극구 반대하며 한국에 모셔 오겠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처럼 다시 부활할까 봐서 였답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2-3)” 믿습니까? 인권을 무시하는 계명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계명입니다. 세상을 좋게 만드는 기본이 되는 계명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효도해야 하겠다고 작정해야 합니다. 조건이나 상황, 이익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 시어머니 나오미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남편은 엘리멜렉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두 아들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모압 땅에서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아들 둘을 모압 여인과 결혼시키고 살았는데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죽었습니다. 아들 둘을 결혼 시켰는데 또 한 아들이 죽었습니다. 잘 살려고 이민을 갔는데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까? 10년 만에 남편도 죽었고 아들 둘도 다 죽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극한 상황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때 나오미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 갈 것을 결심합니다. 두 자부를 보낼 것을 결심합니다. 사실 그가 전격적으로 이런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은 모압으로 이사 온 것이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자신을 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할 땅이 이방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었음을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신 23:3)"라는 말씀을 아마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진정 복받는 길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부터 나오미의 인생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며느리들에게 가라고 합니다. 큰 며느리는 떠났습니다. 그런데 룻이라는 며느리가 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 당시 문화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녀는 모압 여인입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그모스 신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외국인과 결혼하면 손가락질을 당할 때입니다. 남편이 죽었고, 시어머니가 이제 가라고 하니 이제 잘 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시어머니를 따라갑니다. 자신의 유익을 쫓는 세상 풍조에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짐이 될 뿐입니다. 미래가 보장된 것이 아닙니다. 남겨줄 유산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에게 효도하기로 작정을 해 버립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머니에게 효도해야 하겠다고 작정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룻이 그렇게 효도하게 된 근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나오미 가정에 시집을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불신 가정에 산 여인이었지만 믿는 가정에 시집와서 하나님 말씀이 부모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 지를 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효도하면 잘되고 장수한다고 말씀하시지만 만약 불효하면 무서운 형벌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잠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신27:16 부모를 경홀이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신21:18-21 성밖에서 돌로 쳐 죽임" "등불이 꺼짐(잠20:20), 객사(잠30:17)"을 말씀합니다. 

룻이 이렇게 효도할 것을 결심하고 효도함으로 유익을 잃었습니까? 편한 생활을 잃었습니까? 기쁨을 잃었습니까? 아닙니다. 

베들레헴에 와서 보아스를 만납니다. 아이를 낳습니다. 결국 다윗을 가문에 들어왔고 이방 여인으로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족보에 드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손해를 보았습니까? 이삭이 결혼할 때 결혼할 배우자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는데도 순종합니다. 결국 이삭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창 26:12-14)" 잘 되었습니다. 잘 되었을 뿐 아니라 장수하였습니다. 아브라함 175세, 야곱 147세에 비해 이삭은 1백 80살까지 장수합니다. 기운이 진하여 죽습니다(창35:29).

감리교위 창시자 요한 웨슬리 어머니 수산나는 19명의 자녀를 출산하였습니다. 가난한 가운데 이 많은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아이들을 훌륭하게 양육하였습니다. 그녀는 순종 교육을 철저히 시켰답니다. 두 살 전에 순종을 가르치는 것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두 살 전에 순종을 배우면 부모에게도, 선생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순종할 수 있다고 합니다. 두 살 전에 순종을 가르치는 길이 그 자녀가 영원히 효를 행하며 살게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최종적 사고보다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과 관련시키는 관련적 사고로 효도하여 효도 문화를 계승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의 어려운 상황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만 분리시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사고에는 최종적 사고(terminal thinking)와 관련적 사고 (relational thinking)가 있습니다. 

최종적 사고란 한 사건 한 사건을 별도로 분리시켜 생각합니다. 단편적으로 생각합니다. 눈앞의 것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관련적인 사고라는 것은 모든 것을 목적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사고입니다. 입체적 사고, 초월적 사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 사람과 관련시켜 생각합니다. 결혼식 계획, 신혼 계획, 자녀 양육 계획 등 모든 것을 자기 혼자 세우지 않고 다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시켜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모든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여 신앙인이 되면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련시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효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어려움 당한 부모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길러 주시고 나를 위해 희생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지금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어려움 당한 부모님에게 어떻게 해 주시기를 원하시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효도는 단순히 인간관계의 윤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약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출19:5). 

언약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계명을 지키는 한에서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절대 명령인 효에 관한 계명이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십계명). 즉, 효의 실천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한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하나님 대하듯 하라는 명령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에서 '공경한다' 라는 히브리 동사인 '카베드'입니다. 

'존경하다', '영광되게 하다', '깔보지 않는다', '무겁다', '존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할 때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리킬 때도 똑같이 사용됩니다(잠3: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부모공경이 하나님 공경과 동일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되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듯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외모로 볼 때 별로 볼품이 없는 부모일지라도 하나님과 관련하여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룻을 보십시오. 참으로 처절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시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룻은 어머니 가는 곳에 자신도 가며 어머니가 유숙하는 곳에 자신도 유숙하겠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관련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16절을 읽어 보십시오. 하반절에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련시켜 생각하는 것입니다. 효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하게 어머니 아버지로만 보시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그 아버지 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부모님을 모시며 눈앞에 있는 것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다 시든 꽃 잎처럼 떨어지는 꽃잎처럼 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그 길을 갑니다. 노아가 술취해 실수했습니다. 그 때 노아의 아들들 중에 함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함은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아버지를 비난했다가 그의 아들 가나안이 형제들의 종이되는 벌을 받았습니다. 다윗 왕의 아들 중에 압살롬을 보십시오. 아버지 다윗을 죽이고 왕이 되기 위해서 역모를 꾸몄습니다. 

다윗 왕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서 군대를 모집하였고 이스라엘의 민심을 끌기 위해서 백성들을 속였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잘 되었습니까? 압살롬은 상수리나무에 그 잘 난 머리털이 걸려서 공중에 매달려 있다가 다윗의 부하 요압에 의해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어떤 경우도 하나님과 관련시켜 효도하여 효도 문화를 계속적으로 가정에 계승해야 합니다.

“치매어머니는 주님 주신 선물”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김달근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장모님은 30여년 동안 신경안정제를 복용해 2년전부터 치매가 급속도로 빨리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첫째 딸아이의 교육으로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만 치매에 걸린 장모를 자진해서 모셔왔답니다.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행동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어머니 앞에서 사모님은 자신의 어머니이지만 감당키 어려운 짜증과 분노와 싸워야 했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것이 선물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장모님의 치매로 내 속에 어떤 문제가 숨어있는지를 보여주셨어요. 또 하나님은 그 문제를 내게 보여주셨을 뿐아니라 그 문제를 건드리려고 작정하고 계셨죠" `하나님의 치매작전'은 위장된 분노와 미움을 감춘 채 그럴 듯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거듭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느날 장모를 향해 끓어오르는 분노와 미움을 삭이지 못한 채 손찌검을하는 우를 저지르고 말았답니다. 김목사는 그때 통회의 눈물을 흘렸답니다. 정신을 수습한 후 장모의 손을 잡고 용서를 구했답니다. 그때 "괜찮아. 그때뿐이야"라고 장모님이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해맑은 웃음을 짓는 장모 앞에서 엉엉 울었답니다. 그 후 장모님이 측은하게 보였고 보기 싫던 장모의 얼굴이 예쁘게 보였답니다.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답니다. "어머니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팔아서라도 기어이 파헤치고 캐내야만 하는 보화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김목사님은 `치매어머니와 행복만들기'(국민일보사)를 펴냈습니다. 


3. 우리는 비교 의식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의식을 가지고 효도하여 효도 문화를 계승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효도를 못합니까? 자꾸 비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형은, 누나는, 친구는, 동생은...등으로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왜 내가 해야 하느냐는 식입니다. 사람의 의식에는 비교의식과 절대의식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사 비교하여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면 우울해지고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나으면 우월감에 사로잡히고 교만해집니다. 비교의식으로 살기 때문에 신앙인들이 세상에서 실패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불행이 무엇입니까? 두달란트 다섯달란트 받은 자와 비교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 한 달란트도 어머 어마한 것인데 자꾸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여인들이 만만이라고 말하든 천천이라고 말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누가 왕을 세워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세워주었습니다. 키는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다윗과 비교합니다. 결국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로 살면 절대의식을 가지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남은 어떻게 하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에 감사하며 절대의식을 가지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입니다. 

효도하는데도 비교의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의식으로 해야 합니다. 남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룻을 보십시오. 시어머니 나오미가 동서와 비교하여 말합니다. 너의 동서는 갔는데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합니다. 15절 읽어 보십시오. 이 때 룻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동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와는 비교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이제 모압의 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딸이 된 것입니다. 앞날에 어려움이 오든 기쁜 일이 오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효도하는데도 이런 의식으로 효도를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환경을 초월한 효도를 할 수 있습니다. 

조건적인 효도가 아닙니다. 형편이 되면 효도하고 어려우면 그만두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효도를 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부요를 누리는 효도를 할 수 있습니다. 불행한 어머니와 동거하는 효도를 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마음을 가지고 효도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필요를 채워주는 효도를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효도를 할 수 있습니다. 어버이를 높이고 어버이를 욕보이지 않는 효도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모님을 잘 봉양하는 효도를 할 수 있습니다. 

효도에 핑계는 없습니다. 인류의 구속사를 이루시는 예수님도 육신의 부모에게도 순종으로 효를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 시절부터 목수였던 아버지 요셉을 도와드림으로써 효를 실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앞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보이셨습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있게 될 고통과 허전함을 생각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모셔 주도록 부탁하셨습니다(요19:26,27). 

'고르반' 즉 '하나님께 바친 물건'이라고 하면서 가련한 부모들을 도와드리고 모셔야 할 의무를 외면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마15:4-6)”.라고 꾸짖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보고 비교할 것없습니다. 세상 문화가 어떻게 흘러가든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절대의식을 가지고 효도해야 합니다. 

효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창조질서의 근원입니다. 신앙인이 마땅히 가르쳐야할 것입니다(딤전5:4) 인간 중심의 효도가 아니라 하나님 경외의 효, 순종의 효, 공경(恭敬)의 효, 화목(和睦)의 효를 삶의 현장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요셉처럼 소망을 이루어 효도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셈과 야벳처럼 부모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부모님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잠23:22). 부모님에게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부모님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님의 노후를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요19:27).
우리 부모는 어떤 상황에 있는지 우리에게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비교할 것없습니다. 

링컨은 구두 만드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의 대통령이되었습니다. 귀족들은 당황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통령이 구둣방 아들이라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링컨이 상원에서 대통령 취임연설을 하는 첫날, 단상에 서자, 늙은 귀족이 링컨에게 모욕을 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답니다.

"미스터 링컨, 어쩌다 당신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예전에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와 함께 우리 식구들의 구두를 만들기 위해 우리 집을 드나들곤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기 바라오. 또한 여기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만든 구두를 신고 있는 상원의원들이 있소. 그러니 당신의 출신을 잊지 마시오." 이 때에 링컨은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대답을 하였답니다.

"내가 상원에서 첫 연설을 하기 직전에 나에게 아버지를 생각하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매우 멋진 창조적인 예술가였습니다. 아버지보다 더 아름다운 구두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정치를 하든, 내 아버지가 위대한 예술가였듯이 그런 위대한 대통령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나는 결코 나의 아버지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들 귀족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나의 아버지가 만들어 드린 구두가 여러분의 발에 잘 맞지 않거든, 나도 아버지에게서 배운 기술이 조금 있으니 나에게 말씀하십시오. 나는 훌륭한 제화공은 아니지만, 최소한 여러분의 구두는 수선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연락만 주십시오. 그러면 언제라도 여러분의 집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상원의원들은 쥐죽은듯이 잠잠해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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