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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상 : 보고 듣게 하는 묵시 (잠 29:18, 행 1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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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 보고 듣게 하는 묵시 (잠 29:18, 행 16:6-10)  

환상을 본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육의 눈으로 계시되는 것을 볼 수 있는가? 히브리인들은 시각적 표현을 좋아한다. 본다는 것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라아(???)’다. 이 ‘라아’는 헬라어인 호라오(?ρ?ω)가 400회, 에이돈(ε?δον)으로는 670회가 사용되고 있다. 또 블레포(βλεπ?)가 있다. 이 단어는 종종 관찰할 수 있다. “지각하다, 경험하다, 보다”와 같은 의미에서 영적 지각을 가리킨다. 

아모스 선지자는 환상을 보았다. 암8:2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니이다.” 아모스는 여름 과일과 한 광주리의 환상을 본 것이다. 그것은 겉만 그럴 듯 하지만 속은 썩어서 곧 심판을 받게 될 시대를 말해준다. 

스가랴 선지자는 슥4:2~3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라고 하였다. 

스가랴 서는 온통 보는 환상이다. 슥5:2에도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본다. 여기서 두 감람나무는 주 앞에 모셔 서게 될 기름부음 받은 두 증인들이다. 또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은 온 땅에 내리는 저주를 말한다. 집을 살라버리는 저주의 환상이다. 

환상은 나름대로 메시지가 있다. 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들어야 할 메시지가 담겨 있다. 신약의 복음의 시대에도 시각적으로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그 속에서 메시지를 전해주신다. 요한계시록은 온통 성령에 이끌리어 천상의 세계, 천상의 보좌를 보는 장면이고 장래에 일어날 메시지를 환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요한계시록만큼 시각적인 책이 어디 있으며 환상으로 가득 찬 메시지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환상을 말할 때 일고의 가차없이 외면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나의 방법이 끝났을 때, 나의 노력과 나의 능력으로 길을 찾지 못할 때 하나님 편에서 인도가 필요하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은 일하신다. 환상으로 삶을 인도하고 환상으로 미련한 복음 전도자를 깨우치고 환상으로 영혼을 구원케 하는 일을 하신다.   

바울의 삶을 보자. 그의 삶을 바꾸어놓고 삶을 지탱해가는 방법이 환상이라는 방법이었다. 환상은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1. 율법의 사람을 복음의 사람으로 바꾸어놓을 때 환상이 있다. (행9:3~19)

행9:3~19을 보면 사울이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변화되는 회심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다메섹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하늘로부터 빛이 사울을 둘러 비쳤다. 땅에 엎드러진 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였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순간이었으나 이 회심의 과정에 빛이 비치는 환상 속에 사울이 있었다. 

그리고 행9:10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환상 중에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기도하는 사울을 찾아 안수해주라는 음성을 듣는다. 교회의 원수, 그리스도인에게 원수 같이 행하던 사울을 안수하는 사랑의 손, 그 손의 터치가 있었기에 사울을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다. 성령 충만하여 세례를 받고 행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를 전하는 증언의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초자연적 빛이 비추이는 역사, 들려지는 음성, 환상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이끄심, 그것이 율법의 사람을 복음의 사람으로 바꾸어놓았다. 

사람이 바뀌는 것은 기적이다. 머리의 사람이 가슴의 사람이 되는데 30년이 걸렸다고 한다면 율법의 사람이 복음의 사람이 되는 변화는 몇 년이 걸릴 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면 어느 순간에 되어 버린다.   

2. 여기가 아니고 저기를 가야할 때 환상을 주신다. (행16:6~10)

행16:6을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다. 바울은 무던히도 애를 썼다.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쓴다. 현재의 터키인 소아시아를 전도하겠다고 혼신을 다한다. 그러나 행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한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보았을 때 곧 소아시아를 마음에서 내려놓고 마게도냐로 가기로 힘쓰게 된다. 나의 생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여기가 옳다. 그러나 마게도냐로, 저기로 복음의 발을 향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이다. 복음 실은 바울 일생을 구라파로 옮겨 싣고 떠나게 한 것은 환상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 저쪽인 빌립보, 데살로니가, 아덴은 꿈에서 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환상이 있을 때 거기로 가게 하도록 부르셨음을 인정하게 되고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빌립보로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환상은 삶의 여정이 막힐 때 그것을 알게 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삶의 인도의 방법이다. 

환상을 조롱하지 말라. 환상은 내 영혼의 네비게이션이다. 보여주고 들려주는 환상은 길을 보게 하고 길을 알게 하며 길을 찾아 달리게 한다. 이 환상이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을 보면 곳곳에 비전(Vision)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3. 대적자들의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의 삶이 필요할 때 환상이 있다. (행18:9)

바울의 전도 여행은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서 옥에 갇히는 고난을 겪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들은 소동을 일으키고 야손과 몇 형제를 끌고 갔다. 이유는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바울 일행의 전도팀을 맞아들였다는 점에서다. 

결국 행17:10에서 바울과 실라는 밤중에 뵈뢰아로 간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뵈뢰아로 가서 거기 있는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한다. 바울은 다시 아덴으로 떠나갔다. 아덴에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변론하고 쟁론했다. 말쟁이란 말도 듣는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설교를 하는데 이 설교의 반응은 조롱과 다시 들어보자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울은 사실 전도자로서 지역 지역을 밟고 있으나 어떤 면에서는 대적자와 맞부딪쳤다. 참으로 힘들게 만드는 도전이었다. 탈진하다 못해 혼절할 대적이었다.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은 다시 고린도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니 그 유대인들은 대적하여 비방을 한다. 바울은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으로 옮겨간다. 그때 회당장 그리스보를 비롯해 수많은 고린도인들도 믿고 세례를 받는 열매가 있었는데 행18:9을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그래서 바울은 힘을 내고 1년 6개월을 고린도에서 흔들림 없는 용기로 머물렀다. 

사역이란 탈진과 혼절의 지경에 떨어질 수 있다. 다 내팽개치고 어디론지 달아나고 싶을 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환상을 주실 때 삶의 용기가 살아난다. 사역에 대한 새로운 확신과 강력한 파워가 살아난다. 

박세록 장로, 그는 서울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전문의로서 학회 회원이 된 이다. 그는 1988년부터 20년 넘게 내 동포 돕기를 위한 샘복지재단을 만들고 의료 선교를 하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데 힘을 썼다. 북한의 진료소 5,000군데에 왕진 가방 10,000개를 보내어 약을 공급하고 병원과 약 공장을 평양 단동에 세웠다. 왕진 가방에 이어 2편 왕진 버스란 책을 보면 북한 당국으로부터 4번이나 출입 금지를 당했는데 200여는 이름 모를 안가에 끌려가서 남한에 들어가 북조선의 가난과 어려운 현실을 강연한 것에 관한 자료를 다 공개를 하며 추궁받게 되었다. 그때 어떻게 될지 모를 때 환상으로 새 힘을 얻고 두려움을 이긴 바울의 행적 때문에 자신도 담대하게 섰다. 북한 당국자에게 설 수 있게 되었음을 간증한다. 

환상에 대한 이야기만 믿어도 용기가 생긴다. 하나님의 개입과 용기를 주시는 일이 직접 경험된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하물며 환상을 본다면 분명 용기의 메시지를 듣게 될 것이다.   

4. 안전한 평화를 누리게 하려고 환상이 있다. (행27:25)

바울은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로마로 간다. 배에 탄 276명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14일간 파도에 시달린다. 구원의 여망도 없고 여러 날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파도와 씨름하며 지쳐간다. 그러나 바울은 275명의 사람을 위로한다. 먹지도 못하고 사망의 그늘에 던져진 선원과 승객들에게 선포한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였다. 그 말씀의 요지가 무엇인가?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섬에 도착하게 될 것이며 배가 난파되어도, 파도에 표류하여도 결코 죽지 않기에 안심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14일을 파도와 싸우는 사람들! 어찌 죽음에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바울의 평안을 보라. 위로하는 바울의 심령 상태를 보라. 절대 평화를 지닌 바울이다. 이는 어제 밤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자를 환상 중에 보았기 때문이다. 환상이 있을 때 사망의 파도도 평화를 깨뜨릴 수 없다.   

바울의 사역을 이끌어가는 하나님은 결정적일 때마다 환상을 주셨다. 그 환상을 부인하지 말라. 그 환상을 보는 자가 되라. 환상을 보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처음 환상을 보았다. 교회의 기도실에 엎드려 있을 때 나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림을 보는 자가 되었다. 보는 환상이 내게 나타났다. 장엄하고 찬란하며 가슴 뛰는 그림이었다. 그 한 번의 그림, 지구를 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을 보는 환상이 나를 오늘도 이끌어 가고 있다. 하나님이 이 우주의 주인이시다. 하나님 손 안에 만물이 다 있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아들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사역이 잘 되느냐, 못 되느냐,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등 이런 고민거리가 아니다. 아들로서 내가 하나님의 집인 우주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어린 아이가 큰소리치고 논다. 조금도 굴하지 않는다. 승객들이 “야, 너 왜 이렇게 떠드냐? 가만히 있어라.” 그래도 너무 신나게 논다. 승객이 물었다. “네 아버지가 뭐하는 분이기에 이렇게 노냐?” 아이가 대답한다. “우리 아버지요? 우리 아버지가 이 기차를 끌고가는 기관사예요. 우리 아버지가 저 앞에 운전대를 잡고 운전하는 기관사예요.”  

그렇다. 환상은 막연한 신비적 현상이 아니다. 보게 하므로 듣게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 특수 묵시다. 잠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고 하였다. 삶의 고비마다, 만 가지로 얽혀 있는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은 묵시를 통해 나를 방자히 행하지 않게 하시고 나를 지치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도록 그리고 사역을 잘 다듬질해 가도록 역사하신다. 

기도향연축제, 이 기도 축제의 날은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묵시의 환상을 보고 그 메시지를 귀로 듣는 날이다. 성도들의 영혼이 살아서 움직이는 영혼의 대축제가 되고 주님과 교제한 기쁨이 파도처럼 충만한 한 주간이 되어 승리의 한 해를 만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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