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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을 풍성케 하려면 (눅 24: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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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풍성케 하려면 (눅 24:21-27)

(눅 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눅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눅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눅 24: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눅 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얼마전 어떤 단체에서 가진 이민박람회에 수 만명이 몰려드는 기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2-30대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코리안 드림을 품고 이 땅에 몰려드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줄을 잇고 있는 가운데 왜 이 땅의 젊은이들은 이 땅을 떠나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을 개발하여 위협하는 상황이 불안으로 작용한 것일까요?  교육비가 지나치게 많이 들고 입시 과열로 인한 자녀들의 교육환경이 열악하여 젊은이들을 밖으로 내모는 것일까요?  대학을 졸업하고나서도 취업이 되지 않아 딱히 갈데도 없어 다시 도서관을 기웃거리는 대학교 5학년들이 많아지고 있는 현실이 미래에 대한 큰 불안으로 작용하는 것 때문일까요?  정치, 경제, 사회 전분야에 짙은 안개가 서리어 답답한 현실이 개선될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일까요?  그렇게까지 이 땅은 소망이 없고 모든 것이 불투명한 그래서 젊은이들이 탈출할 수 밖에 없는 땅일까요?  
  
오늘 젊은이들이 떠나려는 현실을 보며 이 땅에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여겨  포기하겠다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물론 이해도 됩니다.  그러나 이 땅을 벗어나 선진국으로 알려진 새로운 땅으로 이민을 가면 무엇이 더 나아질까요?  그곳에는 정말 소망이 있고 이 곳은 소망이 사라지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여  이리 저리 방황하는 동안 오히려 소망은 더 멀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려고 하는 이 땅에 더 큰 소망이 우리를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눈에 앞이 보이지 않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소망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손을 들어주시면 한순간에 역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붙들어주시면 전 세계에서 이 땅이 가장 평화롭고 안전한 땅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이 땅이 모든 젊은이들에게 가장 기회가 많은 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려고만 하면 이 땅에서 젊은이들이 큰 꿈을 실현시키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본래 우리나라가 자원도 별로 없었고 땅도 좁고 지정학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  주변 나라의 잦은 침략으로 문화 유산도 남아 잇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소망적인 요소가 거의 없었지만 전세계가 놀라는 기적을 이루어낸 민족이 아닙니까?   그렇게 축복받은 땅으로 이 땅이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낙심할 때 소망이 가득찬 사람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자신들이 오랫동안 정을 붙이고 살던 도시를 등지고 시골로 먼 길을 떠나던 두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불안과 근심이 가득찼고 그들의 얼굴에는 슬픈 빛이 역력했습니다. 그것은 최근에 그들이 살던 도시에서 있었던 우울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부당하고 불의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들은 그 일로 인해 오랫동안 품고 있던 소망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소망이 깨끗이 사라졌고 더이상 그 도시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두 사람은 그 도시를 떠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바로 그 젊은이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불안과 슬픔으로 인해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서 그들의 소망이 사라졌기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은 아직 소망이 예루살렘에 남아있음을 발견하고 급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갑니다. 이제 어두운 눈이 밝아지고 답답한 가슴이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축 처진 모습으로 도시를 떠날때와는 달리 의욕과 열정에 사로잡혀 급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확신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경험과 믿음을 나누어 주기 시작합니다.  

아주 행복한 모습들입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포기했던 도시를 다시 찾게 만들었습니까?  무어이 이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행복을 찾게 하였습니까?  무엇보다도 이 젊은이들에게 꿈과 소망을 회복시켜준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과의 동행입니다.(15)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와 동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너희가 주고 받은 이야기가 무엇이냐?"  

두 젊은이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대화를 하는 중에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떠 올리게 되었습니다.  두 젊은이는 예수님과의 동행하며 대화하는 가운데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두 젊은이는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낙심중에 예루살렘을 떠나왔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하면서 슬픔이 씻겨 나가고 두려움도 사라지며 예루살렘에 대한 애착과 그들이 떠나온 자리에 대한 사랑이 솟아났습니다. 
   
우리 나라가 일제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아무 소망이 없을 때에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실망하고 세월을 탓하며 술과 도박에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런때에도 예수님을 만난 젊은이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망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야학을 열고 어린이들과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한글과 더불어 꿈을 가르쳤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할 일을 찾고 확신을 갖고 소망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들에게 예수님이 소망을 주시고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음을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가 전쟁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잃고 엄청난 상처로 신음하고 있을 때에도 예수님을 만난 소수의 젊은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나라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그런 소망이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기적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문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결코 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뒤의 문장만을 배웠고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미국 정부를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로 정부가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역사에 길이 남게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나라 이 민족에 소망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에게 수없이 기대를 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기대가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 땅의 그리스도인 지도자, 유력자들에게 수없이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탐욕을 앞세우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까?  무늬만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름만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지 않기에 유혹앞에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너무 바쁩니다. 바쁜 것은 나쁜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면 안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며 살 때 소망이 솟아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이들을 통해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소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만나며 동행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동행하면 예수님이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새 힘을 예수님께 받아 다시 돌아가서 슬픈 빛이 사라진 모습으로 말하고 우리의 소망과 믿음을 드러내면 세상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2. 성경에 대한 깨달음입니다.(27)
   
1847년 영국 스코틀랜드에 있는 에덴벅 대학교의 한 의과대학 교수가 '클로로포름'이라는 약품을 발견했습니다.  이 클로로포름은 최초의 마취제입니다.  현대 의학에서 마취제의 발견은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취제를 사용함으로 고통없이 수술을 할 수 있게 되고, 많은 귀한 생명들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클로로포름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제임스 심프손 교수입니다.
  
이 위대한 발견을  한 제임스 심프손 교수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심프손 교수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교수님의 생애에 가장 위대한 발견이 있다면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학생들은 이 질문에 대해 클로로포름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으로 응당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심프손 교수는 한참 창 밖을 바라보고 나서 학생을 향하여 정색을 하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내 생애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내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며, 나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위대한 발견이었던 것이다.

시 49:20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깨달음은 열림입니다. 깨달음이란 영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깨달음이란 지각이 열리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영적 감각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깨닫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십니다(고전 2:10).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야선지자는 50장 4절의 말씀을 통해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들을 만나 동행하면서 그들에게 성경을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두 젊은이는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밝아져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생기고 확신이 솟아나 발걸음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디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오랜 시간을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수없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어야 하며 다시 살아 날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으나 귀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식은 있었으나 아무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어두운 현실앞에 맥도 못추고 멀리 도망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다보니 믿음이 슬픔을 밀어내는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아무리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육안으로 보여지는 것 이상을 보지 못합니다. 도무지 믿음이 결정적인 때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배울 때, 성경에 대해 들을 때 깨달음이 있습니까?  '아하! 이 말씀이 그 뜻이구나!' 하는 반응이 절로 나옵니까?  성경속에서 예수님이 걸어나오는 것을 느낍니까?  성경속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느낍니까? 
  
이 땅에 밀려오는 더러운 세상 문화를 이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을 삼켜 버리려고 밀려오는 폭력과 탐욕과 불의와 맞설 수 잇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일고 잇는 심각한 갈등과 미움, 다툼을 잠재울 수 잇는 것이 무엇이 잇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이 땅은 먹을 것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땅은 돈이 없고 환경이 나빠서 불행하고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의 간교한 계략에 사람들이 속아 그저 부수고 때리고 쉽게 흥분하여 스스로를 해치고 있습니다.  정치인이 타협점을 찾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시원한 해결책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만이 소망이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깨닫기 시작할 때 증오는 사랑으로 바뀝니다.  말씀을 깨달을 때 탐욕은 절제로 바뀝니다.  말씀이 깨달아지면 폭력이 용서와 사랑으로 바뀝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속에서 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부터 말씀을 깨닫고 변화되기 시작할 때 이 땅이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몇 가지 현상을 보고 마구 떠들어댑니다.  이제 소망이 없다고,  이제는 어렵다고,  여기서는  꿈을 이루기에는 불가능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덩달아 같이 요동해서는 안됩니다.  소망은 주님께 있습니다.  아무리 불가능해보이고 상황이 악화되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믿음을 굳게 붙잡고 성령님을 통해 뜨거운 마음을 품고 살면 언제든지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미리 패배자가 되지 말고 어려운 상황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더욱 기도하고 말씀에서서 믿음으로 전진하며 성령님이 주신 뜨거운 마음으로 도전하여 소망을 확산시키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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