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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이여! (마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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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되어라, 가난한 사람이여! (마 5:3)
  
요즘 매스컴을 통해서 많이 듣는 말 가우데 하나가 ‘하우스 푸어’(house poor)라는 단어입니다. ‘하우스 푸어’라는 말은 자기 집을 가지고 있지만, 집을 살 때 받은 대출에 대한 이자를 갚느라 살림이 굉장히 힘든 사람을 말합니다. 집을 살 때에는 집값이 오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대출을 많이 받았는데, 집값은 오르지 않고 금리만 올라 수입의 많은 부분을 이자로 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쓸 돈이 거의 없습니다. 서울에 비싼 아파트 갖고 있다고 다 부자가 아닙니다. 하우스 푸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2012년 국내 10대 트랜드’ 보고서에 따르면 이런 하우스 푸어가 108만 가구에 이른다고 합니다. 
  
또 ‘렌트 푸어’(rent poor)도 있습니다. 집이 없어 전세나 월세로 사는데, 전세나 월세가 너무 많이 올라 소득의 대부분을 전세나 월세로 내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캠퍼스 푸어’(campus poor)라는 말도 있습니다. 비싼 등록금에 학자금 대출을 받지만 높은 대출이자까지 겹쳐 아르바이트 생활로는 대학생활을 할 수 없는 가난한 대학생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워킹 푸어’(working poor)라는 말도 있습니다. 일은 하지만 비정규직이기에 낮은 월급에다 치솟는 물가 때문에 여전히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소호 푸어’(SOHO poor)라는 말도 있습니다. 가난한 생계형 사업자를 말합니다. 직장에서 조기 퇴직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개인 사업을 하는데, 요즘 같은 불경기에 개인 사업을 한다고 금새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웨딩 푸어’(wedding poor)라는 말도 있습니다. 결혼하면서 신혼집 장만하느라, 또 결혼 비용 지출하느라 빈곤해진 신혼부부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베이비 푸어’(baby poor) 라는 말도 있는데, 아이를 낳고 아이의 분유값, 기저귀 값 등 비싼 육아 비용 때문에 빈곤하게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에듀 푸어’(education poor)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식들의 사교육비가 너무 많이 지출되어서 내가 쓸 돈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 달에 몇 백만 원의 학원비나 과외비를 지출하기 위해서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두세 개의 직장을 갖고 일한다는 투잡(two jab) 쓰리잡(Three jab) 족들이 많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실버 푸어’(silver poor) ‘리타이어 푸어’(retire poor)라는 말도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 자녀교육에 신경쓰느라 노후대비를 하지 못해서 은퇴 후에 빈곤하게 사는 노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게 노년에 더욱 빈곤하게 사는 가구가 무려 102만 가구나 된다고 합니다. 이제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시기를 맞고 있는데, 이들이 은퇴하면 실버 푸어나 리타이어 푸어는 엄청난 숫자로 늘어날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하우스 푸어나 실버 푸어들이 대부분 중산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먹고 사는 것에는 별로 걱정할 것 없이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어느 날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대학에 들어가 캠퍼스 푸어로 대학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일을 하지만 소득이 적은 워킹 푸어로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결혼하면서 웨딩 푸어를 거쳐,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는 베이비 푸어가 되고,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사교육비를 대기 위해서 에듀 푸어가 되고, 좀 살만하면 집을 산 후에 하우스 푸어가 되고, 그러다가 직장에서 조기 은퇴하면서 소호 푸어로 살다가, 은퇴를 하면 실버 푸어-리타이어 푸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우리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하우스 푸어인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에듀 푸어나 베이비 푸어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실버 푸어나 리타이어 푸어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이 비단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것만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 개인적인 책임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좀 더 부유해지고, 좀 더 부자가 되겠다는 우리들의 욕심이 때로는 우리를 더 가난한 자가 되게 만들고 맙니다. 집에 대한 욕심이 하우스 푸어를 만들고, 자식에 대한 욕심이 베이비 푸어나 에듀 푸어를 만들기도 합니다.

여러분, 가난이 복이라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가난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가난하기를 바라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가난을 행복하게 여기거나 복되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 역시 거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서 ‘당신은 가난하기 때문에 복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귀싸대기를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이여!” 오늘 본문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같은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6장에서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에 의하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입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태복음 19:23-24) 그렇다면 왜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그렇게도 어렵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청년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미 거의 다 얻은 사람입니다. 젊은 나이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관원입니다. 당대 최고의 권력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는 자신 정도면 영생을 얻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께 반문합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있는 부족함을 보셨습니다. 그의 마음을 굳게 동여매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그가 가진 재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부자 청년은 근심하는 얼굴로 예수님 곁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자 청년에게는 영생을 얻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는 재물이 그에게 영생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자들의 모습입니다. 자기들이 소유한 부유함이 영생을 얻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데 그런 재물의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 재물입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이렇게 말합니다. ‘돈 주머니가 회개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다.’ 재물을 내 인생에서 예수님이나 영생, 천국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한 그는 아직 회개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생을 얻는데 발목을 잡는 재물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약속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라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서 천국이라고 표현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래의 의미는 어떤 지리적인 영역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통치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자에게 임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가난하다는 것은 네 단계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가난입니다. 먹을 것이 없고 손에 쥐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 다음은 가난하기 때문에 권력도 없고 명예도 없는 상태입니다. 세 번째는 권력이 없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짓밟히고 억압받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을 받고서 모든 희망을 하나님께만 두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가난하다는 말 속에 담겨진 참된 의미는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결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진다면 그 곳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오늘 본문에서는 그냥 가난한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지 않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난입니다. 가난한 사람 가운데는 가난에 매여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지 못한 채 사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생활은 가난한데 그 마음이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거나,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런 사람은 마음이 가난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모두 복된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복됩니다. 재물에 대해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이 돌아간 후에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태복음 19:26) 우리 스스로 재물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돈과 관계를 맺고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모든 생활이 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의 그런 삶 가운데서 돈에 얽매여 살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돈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돈이 다른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장사를 하더라도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가게를 찾아온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함에 감사하며 장사를 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일을 하더라도 이 직장 때려치우면 월급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배알이 꼬일지라도 참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오늘도 내가 한 일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생각으로 직장생활을 해야 합니다. 돈에 목을 매면 모든 것이 돈으로 보입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찬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모실 마음의 자리가 없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기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전적으로 신뢰하듯 말입니다. 젖 먹는 어린아이는 ‘엄마가 가난하기 때문에 내게 먹일 분유를 사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가난하든 부하든 엄마는 언제나 내가 배가 고플 때 젖을 주고 우유를 줄 수 있는 분으로 신뢰합니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웁니다. 울면 엄마가 먹을 것을 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배가 고파 울면 이웃집 아주머니가 분유를 타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없습니다. 내가 신뢰하는 대상은 오직 내 엄마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 신뢰합니다. 내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굳게 믿습니다. 내가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서 부유해지는 것도 아닐 뿐더러, 내가 뭔가를 해서 돈을 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주인이 된 상태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오직 엄마만 생각하고 엄마로부터 모든 것이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내 필요가 채워진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제정구 의원(1944-1999)을 기억하십니까? 빈민운동가요 노동운동가의 룰모델로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그분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게 살고 싶다는 꿈입니다. 그분은 가난하게 살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가난하게 사는 능력을 구했습니다. 물질이 아닌 다른 거룩한 가치에 자신의 삶의 기초를 놓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제정구 선생의 그런 꿈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아내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자기는 굶을 수 있었지만 배가 불러오는 아내가 굶주리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와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자 그는 가난이 두려워지고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자리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습니다. 그러나 이력서를 낸 곳마다 빈민 운동의 경력이 있다는 것 때문에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빈민 운동’을 포기하면 일자리를 주겠다고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일자리 찾는 노력을 포기하고, 그때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인 3천 원으로 성경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에 ‘(하나님께) 축 취직 기념, 1976년 9월 1일’이라고 썼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취직했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하나님께 취직한 뒤로 1999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의식주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뒷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의 생전에 김수환 추기경이 그의 생활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의 집을 찾아갔다가, 화장실이 너무 허름해서 용변을 보지 못하고 참다가 돌아갔다고 합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면 마음에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삶에 채우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매일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오늘 내 필요를 채워주신 하나님이 너무너무 고맙다는 것을 압니다. 내 작은 필요가 채워지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기뻐하며 삽니다. 그게 바로 천국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욕심은 오늘의 필요가 채워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합니다.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하고, 내년에 먹을 것을 걱정합니다. 은퇴 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 걱정하면서 오늘 더 많이 쌓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더 많이 쌓기 위해서 정신없이 끌어 모읍니다. 심지어 자식들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통장에 돈을 쌓아놓습니다. 내가 쓰지도 못할 것을 쌓기 위해서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가난한 자로 살기 위해서는 마음에 욕심을 먼저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욕심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한 우리 마음에는 결코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지배하는 곳에는 다툼과 싸움만이 존재하고, 불안과 걱정을 가득 안고 살게 됩니다. 
  
욕심은 우리의 영혼을 혼탁하게 만듭니다. 영혼의 판단력을 무디어지게 만듭니다.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다가는 손해를 보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고 내 욕심에 끌려 살게 만듭니다. 지금보다 더 가져도 더 많이 가지지 못한 것에 이내 속이 상합니다. 내가 많이 가졌더라도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보면 질투가 나고, 나도 저 사람만큼 가져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욕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이, 더 많이’ 라고 외치며,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달려가게 만듭니다. 마음에 여유도 없고, 지금 가지고 있고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시간도 갖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에 어찌 천국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해 할 수 있는 사람이 천국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을 조금씩 덜어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한꺼번에 욕심을 다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욕심을 조금씩 덜어내고,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만족해 하는 삶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모든 것으로부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돈에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만족할 만큼의 돈이 내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 가운데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 정도면 만족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한 지금보다 몇 배 더 많이 가진다 하더라도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정치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정치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권력에 욕심을 비운 사람은 윗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그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버리지 못한 그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은 재물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버릴 수 없었던 그 재물이 그 청년의 발목을 잡아 그로 하여금 영생을 얻지 못하게 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욕심을 비웠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얻기 위해서 아등바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오늘 주신 것으로 만족해하며 사셨습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 권력에 기웃거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해서 발버둥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그러실 수가 있었습니다. 돈에 대해서도 가난하셨고, 권력에 대해서도 가난하셨습니다. 그 어떤 권력도 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랬기에 권력자들을 향해서 무엇 하나 거칠 것이 없이 날카로운 말씀들을 쏟아내실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그것이 재물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성공에 대한 욕심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가족이나 자녀 심지어 지나친 행복에 대한 욕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 욕심을 우리의 마음에서 덜어내고 비우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것으로부터 가난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늘의 행복을 내 것으로 누리며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복된 사람이냐를 말씀하시면서 가장 먼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행복의 첫 열쇠가 ‘가난한 마음을 갖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난하십니까? 부자가 되려고 안달하지 마십시다. 지금의 가난이 나를 자유롭게 하고, 내게 행복을 담보해 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부유하십니까? 내가 누리고 있는 그 부유함이 내 마음의 행복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하십시다. 그것이 우리의 욕심이 되지 않게 하십시다. 그러면 지금의 내 모습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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