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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리는 비전, 죽이는 비전 (창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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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는 비전, 죽이는 비전 (창 11:1-9)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영어로 비전(Vision) 이라는 말은 사전을 보면 세 가지 의미를 말합니다. 일반적 의미로는 시력이나 시각을 말합니다. 뜻으로 보면 앞날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나 미래지향적 낙관적인 통찰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보면 환영이나 환상 그리고 꿈이나 계시라는 뜻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비전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참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젊은이 일수록 이 단어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현실일수록 미래지향적인 슬로건으로 사용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교회 이름으로도 대학 이름으로도 사용 중입니다. 이 비전이라는 말은 기독교적으로는 환상이라는 개념입니다. 신약성경에 이 비전이 많아 나옵니다. 

신약성경의 비전 

누가복음1장22절을 보면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환상을 봅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네 아내가 잉태하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합니다. 누가복음1장26절을 보면 6개월 후 가브리엘 천사가 꿈에 마리아에게 나타납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고 합니다. 고린도후서12장1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환상으로 낙원에 이끌려가서 낙원 즉 천국의 모습을 봅니다. 사도행전2장17절을 보면 누가가 요엘서를 인용하여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10장9절을 보면 베드로와 고넬료가 환상을 봅니다. 

이 환상은 미래 이방전도의 문을 열게 합니다. 신약의 비전은 막연한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기대나 꿈이 아니고 환상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미리 보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신약성경에서의 비전은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미리 길을 제시하시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런 비전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같이 미래가 불투명하고 안개 속과 같은 때에 이 같은 비전을 통해 길을 제시하고 방향을 제시받으면 얼마나 편리하겠습니까. 오늘은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비전이나 환상이나 계시는 없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그런 환상이 왜 없습니까. 오늘은 그런 환상을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환상이나 비전은 모두 성경 속에서 일괄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 속에서 그 비전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비전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비전의 핵심은 막연해도 안 되고 비현실적이어도 안 됩니다. 비전에는 하나님이 들어가야 합니다. 계시가 들어가야 합니다.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는 비전은 인간의 성을 쌓는 비전이 되고 그 결과는 반드시 무너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비전 

그러면 하나님이 없는 비전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사람들이 말하는 비전은 대부분 하나님이 없는 비전입니다. 순 인간적입니다. 그런 비전은 뜻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비전은 처음은 굉장하고 거창하게 시작되지만 오래 못가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비전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본문 창세기11장을 보면 11장이 시작하자마자 바벨탑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 바벨탑에도 비전이 들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시날 평지에 이르렀습니다(2). 사람들은 그때 뜻을 모읍니다. “탐을 건설하자, 꼭대기가 하늘에 닿기까지 쌓자, 우리 이름을 내자, 똘똘 뭉쳐서 흩어지지 말고 함께 살자.” 이것이 그들이 탑을 쌓게 된 동기입니다. 그 내용은 순전히 인간적입니다. 무신론적인 발상이고 인본주의적입니다. 

“하늘 꼭대기까지 닿게 높이 쌓자”, 이사야14장13절을 보면 “내가 하늘에 올라...나의 보좌를 높이리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 고백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자만의 목소리입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 당시 사람들이 탑을 쌓기 위해서 벽돌을 구웠습니다. 그리고 그 벽돌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흩어지지 말자”,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유리방황하도록 운명 받았습니다. 이 흩어짐을 면하자고 뜻을 세운 사람들은 모두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왕성하여 세상으로 퍼져나가 세상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뜻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 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때로 흩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왕성하여 세상에 충만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뜻입니다. 우리들이 이 탑을 중심하여 흩어지지 말자는 것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자는 뜻입니다. 

이것도 모두 하나의 비전일 수 있습니다. “하늘 꼭대기까지 쌓자” 오늘 사람들도 이런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랜드마크, 동양최대, 세계 최대”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이름 내기를 좋아합니다. “우리 회사 이름을 걸고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세우자” 이것이 인간의 뜻입니다. 지방에 그리고 해외에 교회를 개척하면서도 자기 교회 이름을 붙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니는 욕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비전 속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순 인간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계시가 없습니다. 오직 나만 있습니다. “내 이름을 내자” 이것밖에 없습니다. 비전에는 계시가 들어있어야 하고 뜻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바벨탑에는 그런 뜻이 전무합니다. 그래서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이 뭘 하는가 보시려고 내려와 보시니 탑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 의도를 보니까 순 인간적이고 자만스럽고 교만이 가득하고 무신론적입니다. 그래서 심판하시고 무너트리시고 흩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탑을 바벨탑이라고 부릅니다. 바벨이라는 말은 “흩으리다. 혼잡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왜 비전인데 무너트리신 것입니까. 그 비전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에게 영광 돌리자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스스로 이름 내고 지면에서 흩어짐을 면하자는 비전은 하나님이 받을 수 없는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지면에 충만하라는 창조의 뜻과 배치됩니다. 그리고 교만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무너진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비전을 보십시오. 가룟 유다도 큰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유다가 무엇 때문에 예수께 충성을 다한 것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이고 구주로 오셨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그의 비전은 아주 건강한 비전입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 속에는 예수께서 출세하는 날이면 나도 크게 성공한다! 이것이 그의 생각의 전부입니다. 그것이 유다의 믿음이었고 목표였고 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온갖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예수의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무력하였습니다. 그 모습에 유다는 너무 실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배반하고 팔아버렸고 그것이 잘못되어 그는 마침내 자살하여 그가 쌓아온 인생의 성이 무너져 내렸던 것입니다. 바벨탑 무너지듯 무너진 것입니다. 오늘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정말 일자리가 없는 것입니까. 대기업, 더 좋은 곳, 내 이름과 내 자존심을 살릴만한 곳을 찾아 가자니까 자리가 없는 것 아닙니까. 오늘 내 이름, 내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사람들은 너무 많은 출혈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결혼풍속도를 보면 또 가관입니다. 신성하고 성결한 예식이 결혼식입니다. 거기에 물질이 개입되면 안 됩니다. 자존심과 체면이 너무 개입되면 의도가 어긋납니다. 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 시댁에 갈 때 가지고 가는 음식이 이바지입니다. “힘들여 보내주는 음식”을 순 우리말로 이바지라고 부릅니다. 양가 가족들이 서로를 잘 모를 시절에 그 음식을 보냄으로 예를 갖추고 정을 보내는 데서 비롯된 풍습입니다. 오늘은 이 음식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도 그 음식 보내는 일에 자존심을 겁니다. 또 거기에 상혼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모듬전이 50만원, 부침이 55만원입니다. 모두 2,500,000원 합니다. 왜 이렇게 거품이 들어갔는가 하면 양가의 자존심과 체면 때문입니다. 그 음식을 보내주어도 먹지도 않습니다. 음식은 정성이 들어가야 하고 따뜻할 때 음식이지 며칠씩 지나버려 다 식어버린 그 음식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오늘 이 음식 보내는 일에까지 문제가 되는 것은 내 집, 내 가문이라는 자존심과 체면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은 불필요한 이 바벨탑을 쌓는 일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최고층 빌딩인 6·3빌딩은 높이가 63층으로 264m입니다. 그 빌딩 아래에 서 있으면 두려움이 일어나고 현기증이 일어납니다. 삼각지에, 강남에 100 층 높이의 빌딩을 짓겠다고 합니다.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 빌딩은 6·3빌딩보다 100층이 더 높은 163층에 높이가 828m입니다. 6·3빌딩의 3.5배의 높이 입니다. 이 높은 빌딩을 세울 때 사람들은 무슨 생각 무슨 뜻을 세웠을까요. “우리 이름을 내자”였을 것입니다. 

그런 빌딩을 보고 그런 빌딩을 지은 인간들의 의도를 생각해 보면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언제가 그 꼭대기에서 화재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완벽하게 지었다고 말하지만 언젠가 큰 지진이 발생하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요. 이미 수천 년 전에 바벨탑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언젠가 실제로 바벨탑이 무너져 내리듯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또 다시 21세기의 바벨탑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서 꿈을 갖고 비전을 세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비전이 무슨 비전이냐가 문제입니다. 미래 성공하고 돈 많이 벌고 출세하는 비전이라면 그 비전은 바벨탑을 쌓는 비전입니다. 그러니까 그 비전이 생명이 길지 못한 것입니다. 비전에는 반드시 계시가 있어야 하고 약속이 들어가야 하고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비전이 오래가고 복을 받는 비전이 되는 것입니다. 

복을 불러오는 비전

창세기 11장을 보면 바벨탑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바벨탑 이야기는 하나님을 향한 아주 불순종의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아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창세기12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의 비전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아브라함의 순종의 비전 이야기와 바벨탑의 불순종의 이야기는 서로 정반대의 이야기로서 우리에게 비교되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우리에게 잘못된 비전과 복을 받는 비전을 비교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 12장은 시작하자마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는 비전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3대 복을 제시하십니다. “네가 큰 민족이루고 네 이름이 창대하게 될 것이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이 비전은 사실 막연한 비전입니다.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오늘 내일의 것이 아니고 아주 먼 훗날에 이루어질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그 비전을 믿고 고향을 떠납니다. 아주 대단한 순종입니다. 당시 고향의 개념은 오늘의 고향 개념과 다릅니다. 

당시 고향을 떠나는 일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당시 고향은 지연공동체였고 혈연공동체였습니다. 그 말은 고향은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보호 영역이라는 말입니다. 당시 고향 떠나는 일은 그 보호영역을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혈연이나 지연이 없는 사람을 나그네 혹은 객이라고 불렀습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객과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특히 고대사회에서 지연과 혈연공동체로부터 추방됨은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이 과감히 그 혈연공동체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야기는 그 후에 나옵니다. 그냥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1)고 하셨습니다. 떠나면 큰 비전이 주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거룩한 비전을 품고 자신이 의지할 인간적 공동체와 안락한 공동체를 떠나는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의 약속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비전을 품고 과감히 고향을 떠납니다. 지금까지는 데라의 자손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과의 계약 속에서의 새로운 운명과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평안은 물질이 준다고 믿습니다. 오늘 부머세대(boomer generation) 특히 55년에서 62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를 부머세대라고 말합니다. 이 세대가 노후준비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세대라고 해서 부머세대라고 부릅니다. 염려가 가장 많은 세대입니다. 

사람들은 노년에는 물질이 있어야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정말로 물질만 준비되면 안락한 삶이 보장되는 것입니까. 오늘 자꾸만 그렇게 몰고 가니까 물질이 준비 안 된 사람들의 걱정이 커지는 것입니다. 물질이 준비된 사람들은 그 말이 정말인줄 알고 안심합니다. 그러다 인간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낭패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은 그 무엇도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들을 보호해 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어떤 것이 궁극적인 문제에 부딪친 나를 보호하고 보장해줄 것입니까. 오직 보장은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만 가능합니다. 내가 하나님 품안에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살아갈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음으로서 스스로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벨탑이 그들에게 무슨 힘이 되고 무슨 보장이 되어준다는 것입니까. 오히려 무너져 내릴 때 더 많은 허탈함만 가중시켰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장받은 근거는 전무하였습니다. 그때는 고향만이 마지막으로 나를 보호해줄 근거지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때입니다. 혈연공동체만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비전은 구체적이지 않았습니다. 아주 미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그 새로운 비전을 과감히 믿고 그 보호 공동체를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약속과 계시만 믿고 떠났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아브라함은 이 계시의 약속을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오늘 현재는 아무 근거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환상만 믿고 떠났습니다. 그것이 비전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비전을 안고 세상 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들을 과감히 떨쳐 버리고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비전들이 있습니다. 그 비전들 속에는 살리는 비전도 있고 죽이는 비전도 있습니다. 바벨탑 비전은 죽이는 비전입니다. 우리는 바벨탑 비전을 가지면 생명이 짧아집니다. 그리고 결국은 무너집니다. 심판받습니다. 내 비전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비전이어야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 약속만 믿고 결단으로 본토와 고향을 떠났듯이 우리도 세상적인 것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겠다는 거룩한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건강한 비전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비전을 너무 남발하는 시대입니다. 별 것을 다 비전이라고 말 합니다. 비전은 믿음이 전제된 비전이어야 합니다. 약속이 전제된 비전이어야 합니다. 계시가 들어있는 비전이어야 합니다. 아니면 바벨탑처럼 도중에 심판받아 무너집니다. 너무 인간적인 비전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영광을 구하는 비전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비전을 꿈꾸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비전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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