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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후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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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고후 12:7-10)
 
한계를 경험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잘 살고 싶어 합니다. 현실은 힘들고,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 매몰되거나 미래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왕이면 현실을 이겨내고 싶고, 내일을 철저히 대비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은 버겁습니다. “하면 된다.” 라는 말이 주변에 만연해 있지만, 이것은 사실 해도 안 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나온 반대 표어이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해보지만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장벽 앞에 부딪히고, ‘이 길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거야’라며 스스로 다독이지만 길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결국, ‘이게 내 한계구나. 내 인생의 한계구나’ 가슴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삶의 다양한 자리에서 한계를 경험합니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성적은 안 나오고 시험에 계속 떨어집니다. 취업의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직장에 다니며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데 경제적 어려움에서 헤어날 기미가 안 보입니다. 내 성품의 모남과 부족함 때문에 사람들과 부딪힙니다. ‘나는 왜 이럴까?’ 후회막급하기도 합니다. 좋은 시간을 더 갖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일이 아직 많이 있는데 사랑하는 가족이 속절없이 먼저 떠납니다. 

결혼생활은 실망의 연속입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이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갈등은 점점 깊어집니다. 때로 헤어짐의 아픔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해서 귀하게 키운 자녀가 부모인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합니다. 남도 이러진 않을 텐데 싶을 정도지만 부모로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늘 승승장구했는데 어느 날 보니 뒤쳐진 자신을 발견합니다.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아 착잡합니다. 새롭게 일을 시작해 보지만 일이 잘 풀리지가 않습니다. 

건강 하나만은 자신 있었는데 이제는 감기에만 걸려도 며칠씩 끙끙 앓습니다. 급기야는 병에 걸려서 병원이 집인지, 집이 병원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때마다 챙겨먹어야 할 약들이 수북이 쌓이는 것을 보면서 ‘이런 건가?’ 슬퍼집니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주변에서 하나둘씩 세상을 떠납니다. ‘얘, 너도 머지않았어.’ 마음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러한 한계는 단순히 불편함을 넘어서 나를 괴롭히는 고통입니다. 자신감도 없앱니다. 용기를 내려고 술병에 손을 대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몸만 불편할 뿐입니다. 한계를 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쉽게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한계는 두려움이고, 좌절감이고, 외로움입니다. 

모든 사람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방법을 찾습니다. 

바울에게도 인생의 커다란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7절에서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합니다. 어떤 병인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는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병이 자신의 신앙적 자존감과 진실성을 헤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사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까지 합니다. 그는 이 가시가 없어지길 세 번 기도했다고 고백합니다. 

세 번이란, 간절함의 표현입니다. 간절히, 아주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병 없어져야 합니다. 제가 이 병을 앓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라고 울부짖었다는 것입니다. 병은 사도바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닐진대, 왜 이렇게 힘들어했을까요? 그 이유를 보여주는 성경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2절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사도행전 19:12)

쉽게 말하면 이런 상황입니다. “이 약을 먹으면 100% 당신의 병이 낫습니다.” 라고 자신 있게 소개했는데, 막상 내가 그 병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겠습니까? 얼마나 불신을 낳는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치료와 회복과 위로의 구원자이시다.” 담대하게 선포하면서 사람들을 치유했습니다. 때론 그가 쓰던 손수건만 얹어도 사람들이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병에 걸려 있는 겁니다. 이러니 누가 바울을 신뢰하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학문적으로, 신앙적으로, 가문적으로 남과 비교할 수 없이 출중했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더욱 자괴감이 들었고, 절망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을 당할 때 절망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망을 이겨내려고 자기만의 방법을 찾게 됩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이것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습니다. 
첫 번째는 절망에 무감각해지려는 사람입니다. 절망을 거듭하다보면, 절망에 길들여집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절망에 빠진지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무기력에 빠지고, 삶의 목표도 이유도 찾지 못하게 됩니다. 왜 공부하는지, 왜 일해야 되는지 동기가 부여되지 않습니다. 거듭되는 절망 때문에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동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을 탓하게 됩니다. 내가 공부 못하는 것도 남의 탓, 일이 안 되는 것도 남의 탓, 실패하는 것도 남의 탓, 이렇게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이렇게 남의 탓에 익숙해지면 냉소적인 사람이 됩니다. 아무 생각없이 일탈행위를 하고, 스스로 몸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반대로 지나치게 활기가 넘쳐 보이는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옆 사람이 볼 때, “저 사람은 늘 활기차.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아.”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속은 울고 있습니다. 절망의 깊이는 점점 깊어집니다.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도피하는 사람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유형을 ‘약함의 절망, 여성적 절망’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성찰이 없습니다. 대신 늘 남과의 관계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남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저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 아, 저 사람이 이렇게 행동했대. 이거 먹었대. 

여기에 갔대” 이런 말을 하며 시류에 휩쓸리는 중심인물이 됩니다. 내가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도, 반성하지도 않고 그냥 남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배역에 따라 연극을 하듯이 중심을 못 잡고 살아가게 됩니다. 

세 번째는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들려는 사람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고집의 절망, 남성적 절망’이라고 말합니다.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 명목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은, 내 지식과 경험과 이성으로 절망적인 상황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는 자기 확신에 빠집니다.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닦달합니다. 일 중심주의와 완벽주의에 빠집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상황을 가장 심각하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절망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절망적인 상태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에게는 육체와 영혼, 마음을 뛰어넘어 스스로를 온전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망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절망을 스스로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처음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사탄이 유혹한 내용은 ‘인간의 진보’였습니다.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이 말을 듣고 인간이 죄를 범합니다. 사실 모든 반신앙적 유혹의 본질은, 사람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피조물 이상의 존재가 되려는 욕망입니다. 

사도바울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절망적 상황을 이겨낼 수 없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붙잡고 간구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바울아, 없는 것을 보지 말고 내가 너에게 준 것을 보아라. 네가 없는 것이 있다하여 내가 너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너를 사랑한다. 충분히 사랑한다. 네가 약했기 때문에 나를 본 것이 아니니? 그래서 더 겸손해 진 것이 아니니? 그래 잘 했다. 맞다. 네가 약했기 때문에 나를 붙잡은 것이다. 너의 약함이 내가 거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바울아, 걱정하지 마라. 너의 약함, 너의 한계, 너의 절망 속에 내가 함께할 것이다.” 

이 음성을 들은 바울은, “육체뿐만이 아니라 외부에서 오는 그 어떤 핍박과 능욕과 궁핍과 곤고까지도 기쁘게 받겠다”고 고백합니다. 이전까지는 자신의 문제 때문에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다시 붙잡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니, 자신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깥에서 오는 어떤 고통까지도 기쁨으로 맞이하겠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드리겠다 하는 고백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바울은 병이 낫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후에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더 많은 핍박을 받고 더 많은 한계와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길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길임을 알고 사도의 길을 담대히 나아가게 됩니다. 

신앙에는 나의 전체를 인정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절망적인 상황은, 한탄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하는 놀라운 축복의 시간입니다. 나의 잘남도 못남도, 배움도 못 배움도, 부유함도 가난함도, 좋은 조건도 나쁜 조건도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잘못된 것을 합리화시키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호도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존귀함’은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임을 고백하게 하고, ‘비참함’은 하나님 안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보석 회사를 운영하시는 분과 대화를 하다가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 눈에는 다 똑같은 다이아몬드인데, 전문가들은 이 다이아몬드가 비싸다, 싸다를 쉽게 구별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것을 누가 커팅을 했느냐, 어떻게 커팅을 했느냐에 따라서 그 값이 천차만별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과 절망이 있지만 희망이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의 가치는 성취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능력이나, 지식, 건강, 재물의 유무에 따라 인간적 존엄성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존귀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일렬로 쭉 세워 놓고, “넌 1등, 넌 꼴등”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어제의 어두움과 절망적인 상황이 어제로 끝나게 하시고, 오늘은 다시 환한 태양을 맞이하며 새롭게 출발하게 만드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격노하는 갈릴리 호수의 풍랑 속에서 평안히 주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반면 제자들은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사실 풍랑을 더 많이 경험한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베테랑 어부들이 몇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풍랑은 너무 커 보이고, 상대적으로 하나님은 너무 작아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작게 보이면 보일수록 두려움과 근심은 점점 커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풍랑이 작았습니다. 이 풍랑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하셨습니다. 그래서 평안히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나중에 베드로가 갖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생각에 자책감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베드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 결과, 그의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다가 잡혀서 옥에 갇히게 됩니다.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불안과 공포 속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처형 날짜가 다가오자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구하기 위해 천사를 보내십니다. 그런데 천사가 베드로를 찾아와 한 일이 놀랍습니다. 사도행전 12장 7절의 말씀입니다.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메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사도행전 12:7)

천사가 와서 자고 있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툭 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십니까? 내일 죽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처럼 쿨쿨 자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지실 거야. 내 앞길을 인도하실 거야’하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크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이 사실을 믿고, 거룩하고 전능하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붙잡고 신뢰할 때, 내게 있는 절망적인 상황은 작게 보일 것입니다.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엄청난 크기의 한계와 고통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 앞에선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놀라운 신앙의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집안에 가득한 손자들을 보시면서 이런 고백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 손자 손녀는 늙음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인 것 같아.” 저는 그 말을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바꾸어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의 약함과 한계는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학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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