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좋은 세상 만들기(9) : 축복하며 복받는 세상 (민 6:22-27)

첨부 1


좋은 세상 만들기(9) : 축복하며 복받는 세상 (민 6:22-27)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고의 작은 시골마을 천주교 성당에서 신부가 미사를 집행할 때에 수종드는 아이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잔을 떨어뜨려 포도주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신부는 그 아이의 뺨을 때리면서 "다시는 제단에 나타나지 마라."며 꾸짖었답니다. 저주의 말을 한 것입니다. 그 후 그 아이는 신앙을 버렸는데 그 아이가 바로 커서 유고의 대통령이 된 무신론자 티토라고 합니다. 

비슷한 사건이 또 일어났답니다. 신부가 미사를 집행하였는데 수종드는 아이가 잔을 떨어뜨려 포도주가 엎질러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커서 신부가 되겠구나."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축복의 말을 한 것입니다. 그 아이는 신앙을 떠나지 않고 신부의 말처럼 훌륭한 신부가 되었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유명한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사실까(THE LIFE OF CHRIST)]를 쓴 풀턴 쉰 신부라고 합니다. 

사람의 말은 큰 영향력이 있습니다. 저주의 말을 하느냐 축복의 말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미래가 달라집니다. 세상이 달라집니다. 가정이 달라집니다. 자녀가 달라집니다. 말은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재판정에서 판사가 사형 선고를 하면 죄인은 그 순간부터 사형수가 됩니다. 낯선 남녀로 살다가도 어느 날 상대가 청혼하여 그것을 "예"라고 받아들이면 남남이 부부가 됩니다. 말은 보이지 않지만 태양 에너지처럼 생명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은 살아 움직이는 에너지입니다.

말은 성취력이 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의 주택 속에서 인간은 산다."라고 말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말의 중요성을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6:2)"라고 말씀합니다. 말은 사람의 사고체계를 지배합니다. 말은 감정의 열쇠가 됩니다. 말 한마디가 인생을 즐겁게 하기도 하고 슬프게도 합니다. 말 한 마디가 듣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기도 하고 낙심하게도 합니다. 말이 얼마나 힘이 있는가를 실제로 실험하여 MBC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한글날 563돌을 맞이하여 MBC 텔레비전에서 '밥풀 실험'과 '인체 변화 실험', '언어 지배 실험' 등의 다양한 실험을 소개하였습니다. 

햅쌀로 지은 밥을 유리병에 담아 아나운서들이 2병씩 나눠가졌습니다. 한 병에는 '고맙습니다.'가 쓰인 종이를 붙이고 고운 말로 매일 말을 걸었고, 다른 한 병에는 '짜증나'를 적어놓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4주 후 뚜껑을 열었더니 '고맙습니다.' 병에서 하얀 곰팡이가 구수한 냄새를 피우는 반면, '짜증나' 병에선 거무스름한 곰팡이가 심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말의 힘을 보여 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축복의 말과 저주의 말의 결과가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긍정적인 말(축복의 말)과 부정적인 말(저주의 말) 중 어떤 말을 더 기억하는가도 실험하였습니다. 피실험자에게 15개의 좋은 말과 15개의 나쁜 말을 보여 준 결과 66%가 나쁜 말을 더 많이 기억하였습니다. 막말은 감정을 주관하는 뇌의 번영계를 활성화시켜 오래 남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말을 합니다. 한살이 되었을 때에는 5단어, 2세 때에는 260단어, 3세 때에는 8OO단어, 5세 때에는 약 2000여단어의 말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성인이 되면 하루에 한 남자가 쓰는 단어가 평균 2만 5천 단어나 된다고 합니다. 여자는 말이 더 많아서 3만 단어쯤 사용한다고 합니다. 1년 동안 자신이 사용한 단어로 책을 펴내면 4백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132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평생 이야기하는 시간을 따로 모아보면 대략 13년을 꼬박 말하는 데 소비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수없이 말하고 듣는 말이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 이 말들이 가정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 우리 성도님들이 사용하는 말이 축복의 말이 많습니까? 저주의 말이 많습니까? 지금 우리 학생들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말이 축복의 말이 많습니까? 저주의 말이 많습니까? 그 말대로 인생은 흘러갑니다. 짧은 말 한 마디가 긴 인생을 만듭니다. 말 한 마디는 마음에서 태어나 마음에 씨를 뿌리고 생활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성경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라고 말씀합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축복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 아이들을 보면 욕을 달고 사는데 욕하지 말고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축복의 말 중 가장 고상한 말 중의 하나가 오늘 성경에 나온 “아론의 축도”입니다. “제사장의 축도”라고도 말합니다. "사도의 축도"(고후 13:13)와 함께 교회 예배 시에 널리 사용 되어 온 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아론에게 이 축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축도를 듣는 지상의 청중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자손"(민6:23) 곧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너"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믿는 우리이고, 우리의 자녀들입니다. 이 축도를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론과 그의 아들들"(민 6:23)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입니다. 이 축도에서 세 번 반복되는 "원하며, 원하며, 원하노라"라고 하는 동사의 주어는 바로 제사장입니다. 오늘날 바로 왕같은 제사장이 된 우리입니다. 축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 외에도 계속 동사가 나옵니다. "복을 주시고(예 바레크카)", "백성을 지키시고(이슈므레카)", "백성에게 얼굴을 비추시고(야에르)", "은혜 베푸시고(익후네카)",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시고(잇사)", "평강 주시고(야셈)" 여섯 개의 동사가 나오는데 보호, 은혜, 평강입니다. 

이 동사의 주어는 누구일까요? 누가 보호해주고 누가 은혜 주시고 누가 평강을 주시겠습니까? 바로 여호와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언약의 백성으로 가나안 땅에 가서 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장이 이 축도를 늘 하시길 원하십니다. 이런 복이 임하는 세상을 만들기 원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축복의 기도를 당시의 제사장 뿐 아니라 왕같은 제사장이 된 우리가 늘 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이런 축복이 넘치는 세상이 되길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축복하며 복받는 세상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복받는 세상을 만들려면 우리가 축의 통로가 되어 축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아버지와 아들들에게 동시에 말씀합니다. 오늘날로 해석하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왕같은 제사장이 된 우리 부모와 우리 자녀들에게 동시에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예수 믿는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를 대하는 모든 사람으로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친구, 이웃 모두로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을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축복이라는 말은 “빌 축” 자를 사용하여 “복을 빌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은 복을 주는 것과 복을 비는 행위 사이에는 동사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축복과 복을 혼용하여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축복이라는 말 자체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영어에서는 “bless”는 동사로 “축복하다.”라는 말로 번역했고 “blessing”은 복으로 번역했습니다. 복 자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하나님의 뜻을 대리하는 왕, 족장, 제사장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수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복을 비는 사람입니다. 축도가 선포와 기원냐는 논란이 있지만 선포적 기원으로 선포적 의미와 기원적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은 제물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 복을 받아 전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축복의 전달자로 제사장을 세웠습니다. 제사장의 축복권은 하나님이 특별이 위임한 것입니다. 레위 자손을 특별히 성별하여 세운 것은 회막에서 봉사를 위한 것이지만 그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축복하도록 세운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축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축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의 통로, 하나님의 복의 전달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좋아지려면 언어 순환이 되어야 합니다. 축복의 말을 많이 하는 세상이 좋은 세상입니다. 좋은 가정은 축복의 말을 많이 하는 가정입니다. 좋은 교회는 축복의 말을 많이 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보면 악의적으로 비방과 욕설이 얼마나 난무합니까? 욕을 달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초중고교생의 73%가 욕을 사용하며 이 중 32%는 습관적으로 욕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3명 중 1명은 욕을 입에 달고 산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의식하지 않고 통제하지 않으면 축복보다 저주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16세까지 자신에 관해 17만 3천개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긍정적인 메시지는 1만 6천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29.6개의 부정적인 메시지에 겨우 2.7개의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는 셈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대로 방치해 두면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보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의 통로로 쓰임받기를 원하십니다.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하루에 한 번 자녀를 축복하라”를 쓴 롤프 가복은 “자녀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는 자녀를 축복하는 부모의 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축복은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고 그 속에서 전인성을 회복시키는 장(場)이 될 뿐만 아니라 이 땅에 행복을 창조하는 고귀한 사역이다. 하나님은 그 축복권을 부모에게 허락하셨다. 축복은 실로 부모의 특권이요, 거룩한 임무다.”라고 말합니다. 축복받는 자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존 트렌트ㆍ게리 스몰리 “축복의 언어”를 통해 자녀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축복할 것인가를 다섯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꽃이 자랄 때에 토양, 공기, 물, 햇빛, 그리고 자라기에 적당한 장소가 필요하듯 축복에도 다섯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애정 어린 접촉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입맞춤, 안아주기, 안수 등의 축복을 베풀 때에 수반되는 행위입니다. 신체적인 접촉은 축복을 베풀 때에 수반되는 필수 요소라는 것입니다. 

둘째, 마음속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축복은 말로 표현할 때에 효과가 발휘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인정과 칭찬을 선한 말로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축복을 받는 자에게 높은 가치를 심어주라는 것입니다. 

넷째, 축복을 받는 자의 특별한 장래를 말해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름을 부를 때 아이들의 장래의 소망을 담아 부른다고 합니다. '의사 베니, 변호사 르우벤'처럼 부른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축복을 이루기 위한 적극적인 헌신을 하라고 합니다. 축복을 받는 자녀가 성공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예수님께 나아오는 어린아이들은 안고, 안수하고 축복하셨습니다.(막10:16) 가족의 축복은 자기 정체성,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 사랑과 인정을 받고 산다는 의식을 심어주기에 많은 유대인들은 지금도 매주 아버지가 자녀에게 축복을 베풀어 준다고 합니다.

노랫말 따라가는 가수운명이 결정된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가수 권혜경씨는 1957년 데뷔곡 '산장의 여인'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있네…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그는 가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불과 2년 뒤 28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판막증에 걸리고 이후 후두암까지 얻었습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를 불렀던 차중락씨는 낙엽이 지는 11월에 32살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를 부른 배호는 안타깝게 29살에 요절했습니다. 반면에 '쨍하고 해뜰 날'의 송대관은 문자 그대로 '쨍하고 해 뜬' 삶을 맞았습니다. 

헨델은 후기 바로크 음악의 거장이지만 한때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의 곡이 발표되는 공연장에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공연을 방해했답니다. 그 일로 헨델은 충격을 받아 앓게 되었답니다. 그때 무명의 한 시인으로부터 "그리스도는 사람들로부터 버린바 되었으나 하나님이 부활시켜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힘을 내십시오."라는 축복의 편지를 받게 되었답니다. 그는 그 편지를 읽고 힘을 얻어 23일간 금식하며 메시아 중 42번 할렐루야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한 소년이 작곡가인 아버지 곁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답니다. 아버지는 작곡을 하다가 상상력을 잃고 긴 한숨을 토해냈답니다. 그때 소년이 "아빠, 내가 한번 해볼게요."라고 말했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작곡을 맡겼고 제멋대로 적어놓은 악보를 보고 격려해주었답니다. "이것 참 대단한 작품인걸." 아버지의 축복의 말에 힘입어 소년은 세계적인 작곡가가 됐었답니다. 그가 바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작곡한 요한 슈트라우스입니다. 축복의 말 말 한 마디가 재능을 살려내게 한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네가 자랑스럽구나! 괜찮아, 넌 할 수 있어. 엄마 아빠는 널 믿어. 힘내."라고 축복해 준다면 자녀의 재능은 춤을 출 것입니다. 남편에게 "오늘도 수고했어요. 당신이 최고에요. 내가 결혼 하나는 잘 했지요. 다 당신 덕분이어요."라고 축복해준다면 남편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아내에게 "난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최고 예뻐요. 당신 없었으면 난 아무것도 못했을 거요."라고 축복해 준다면 아내는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을 것입니다. 


2. 우리는 복받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 평강을 빌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구체적인 축복 기도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에게 무슨 내용의 축복기도를 원하십니까?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 보호에 대한 기도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민 6:24)”입니다. 영적 육적 보호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들은 광야길을 가고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외부적인 세력과 내부적 기근과 질병과 싸워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보호가 있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온갖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낮에는 타는 듯 한 사막의 열기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밤에는 심한 일교차로 추위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악한 세력으로 부터의 보호(시37:8) 받아야 합니다. 가난과 재앙과 각종 질병 및 전쟁으로부터 보호(시33:19; 76:3)받아야 합니다. 

누가 보호해 주시겠습니까?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갖가지 좋은 것으로 달콤한 것으로 광명의 천사로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한 때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보호해 주셔야 하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우리 자녀를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북한은 핵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이미 3만 7천 여기의 핵탄두가 있고 만약 핵전쟁이 일어나면 미국과 소련이 가진 핵탄두만으로도 지구를 41회나 파괴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1mt 규모의 전략 핵폭탄이 서울 시청 상공에 터진다면 열복사로 서울시청을 중심으로 반지름 약 3km의 거리의 모든 것이 폭발과 동시에 증발해 버린다고 합니다. 

하나의 원자 폭탄으로 서울의 모든 80~90%의 건물이 파괴되고 서울인구 천만명중 약 200만 명은 즉사, 약 2백만 명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사망하고, 약 300만 명은 2주내지 6개월 안에 사망하게 되며 결국 우리나라 인구 중 천만에서 천 이백만명 정도가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바이러스와 사고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광야같이 험한 세상이지만 능히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니까 다니엘이 사자굴에서도 살아나 총리로써 임무를 무사히 수행하였습니다(단6:16-23). 하나님이 보호하니까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지만 풀려나 복음을 전했습니다(행12:7).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시 121:4)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시 121:5)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시 121:6)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시 121:7)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8)” 이 복이 우리에게 임하여야 합니다. 


둘째, 은혜에 대한 기도입니다. 

2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민 6:25)”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는 것은 인간 편에서는 절망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얼굴 방향은 인간 생존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이 외면하면 인간은 끝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죽은 영혼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반석에서 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쓴물이 단물로 변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요단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여리고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카르마 경영이라는 책을 쓴 이나모리 가즈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27세에 3,000만 원으로 교세라를 창업하여 세계 100대 기업으로 일궈낸 사람입니다. 일본에서 도덕 경영, 정도경영의 원조로 가장 존경받은 경영자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는 소원성취의 공식, 즉 성공의 공식을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일)의 결과 = 사고방식 × 열의 ×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이나 일의 결과가 이 세 가지 요소를 곱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공식이 삶의 현장에서 꼭 통합니까? “성공하는 기업의 8가지 습관”이라는 책에서는 "비전 기업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이 이룩한 최고의 업적들이 상세한 전략적 계획에 의해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이것저것 하던 중에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성공적인 기업 전략은 ‘기회주의적인 실험’과 '우연한 발견'의 산물이었다고 합니다. 존슨&존슨에서 회사 전체 매출액의 44%를 차지하게 된 베이비 파우더 사업은 계획에 의해 된 것이 아니고 의약용 석고를 팔았는데 한 내과 의사의 의약용 석고가 일으키는 피부 질환에 대한 항의를 받고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끼워주는데서 출발했답니다. 

학자들은 세렌디피티란 말을 사용합니다. '우연히 운 좋게 예상 밖의 발견을 하는 재능' 이라는 말입니다. 백신을 이용한 예방 주사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연히 발견된 것입니다. 매직테이프, 페니실링, X선, 테플론, 다이나마이트, 사해문서 등도 우연한 발견이었습니다. 천연두에서 인류를 해방시킨 왁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의 아들인 젠너는 "우유를 짜던 여인에게서 자신은 우두에 걸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결코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발견하였습니다. 옥외 엘리베이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도 우리는 우연이나 세렌디피티라는 말을 쓰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포함시킵니다. 태양이 위치를 바꾸면 음지도 양지가 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우리가 진전 복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건강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우리의 직장도, 우리의 가족도, 우리의 교회도, 우리의 나라도 번영과 안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와 우리의 가정, 교회,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여야 합니다. 


셋째, 평강에 대한 기도입니다. 

2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 6:26)”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점령이라는 전쟁을 앞둔 상황입니다. 거친 광야 길을 걸어야 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광야길입니다. 여기에서 평강을 갖고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평강하기를 원하십니다. 환경을 초월한 평강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여호수아 리프맨의 소설,「마음의 평안」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젊은 청년이 어느 노인을 찾아가 자기 소원을 부탁하였습니다. 노인은 무엇을 갖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물이며, 셋째는 미모이고, 넷째는 재능이며, 다섯째는 권력이고, 여섯째는 명예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노인은 말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그러나 평안이 없이는 아무것도 즐길 수 없다네." 이 모든 것이 있다하여도 평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도 평안이 있을 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평안이 없으면 쌓여진 명예도, 재물도, 성공도 제대로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평안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조건적 평안이 아닙니다. 조건적 평안은 그 조건 사라지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워서 이루어지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 평안도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면 없어지는 평안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평안은 다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바울과 실라는 이 평안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죄사함 가운데 주시는 구원의 평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하여도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감정의 문제로부터 오는 불안을 성령 충만으로 누리게 만듭니다. 

마음의 평안이란 단순이 감정 조절이나 적극적인 사고 훈련이나 명상, 마인드 컨트롤, 요가, 최면요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평안은 육체의 문제나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심령의 문제입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있는 불안과 공포를 쫓아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요한복음 20:22). 

우리의 내면세계의 평정은 성령님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감옥에서도 평안하게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성령님이 함께 하신 것을 체험하기 때문에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에 아버지와만 함께 걸으면 두렵지 않듯이 하나님과 함께하면 평안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이런 평안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우리의 축복 기도를 통해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 이시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복은 궁극적으로 누가 복을 주십니까? 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 6:27)”라고 말씀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축복기도를 할 따름입니다. 그러면 누가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까?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우리의 축복을 통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신으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유일한 복의 주체자이십니다. 

누구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누구나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인류의 공통된 꿈은 이상적인 사회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일 것입니다. 시대마다 유토피아를 꿈꾸어 왔습니다. 플라톤은 이상 국가를 꿈꾸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율도국이라는 이상의 나라가 나옵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공동체 주의도 일종의 이상나라를 꿈꾸는 과정 속에서 나왔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가 실현되면 이상적인 나라가 될 줄로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에덴의 복을 원합니다. 영생의 복,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 눈물도 고통도 질병도 차별도 아픔도 죽음도 없는 지복을 원합니다.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는 초월자를 통하여 이 복을 누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복을 주시는 주체가 초월자라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머니즘이 발달되고 주술 행위가 어디에든 있습니다. 우리 문화를 보면 복의 문화입니다. 수와 복자가 집대문이나 문갑이나 은수저나 옷무늬나 베개나 방석에나 밥주발에 쓰여 있습니다. 오복을 중요시 생각했습니다. 수, 부, 강녕, 유호덕, 고종명을 중요시 생각했습니다.

이 오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삼재팔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재, 수재, 풍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질병과 가난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기근과 불안과 파괴를 가져오는 난리를 피하고 연명장수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평강 안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정령들이 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머니즘이 발달되고 주술신앙이 발달되었습니다.

그런데 과학 문명이 발달하자 사람들은 무엇으로 그 유토피아를 이룰 것으로 생각했습니까?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이 만든 과학 문명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기술문명과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면 이상적인 나라가 될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의식에서 하나님을 추방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유토피아를 만드는 방해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점점 이상적인 나라가 되어 가고 있습니까? 문명의 발달로 편리는 누리지만 그 문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각종 산재로 죽어갑니다. 암으로 죽어갑니다. 환경 파괴로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차가 없었으면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각종 문명으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사고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인간에게 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범죄로 말미암아 그 복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 복을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참 복을 받는 하나님나라를 증거해 주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올 때 참 복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복을 누리는 가정이 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질병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가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진정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자유, 평등, 박애, 경제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것은 죄입니다. 그것들은 다 죄로 인해 파생된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 해결없이는 아무리 좋은 땅, 아무리 자유로운 땅, 아무리 평등한 땅에 살도 진정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해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사함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간음한 여인도 예수 앞에 나와 용서받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도 예수님 앞에 나와 고침 받고 행복한 삶을 누렸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예수님 앞에 나와 복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허천 국회의원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강원도 도의원(11년) 도의장(4년) 제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장로님입니다. 장로님은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성공한 하나의 비결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춘천에서 제법 다복한 가정의 맏이로 태어났지만 6·25 전쟁은 풍비박산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제외하곤 아버지와 누이까지 모두 빼앗아갔고 피난을 떠난 동생 둘도 세상을 떠났답니다. 추위와 배고픔, 뭐하나 변변한 게 없는 궁핍한 생활. 어머니 화전을 일구며 살았답니다. 

그런데 4H 활동을 하다가 미국의 한 평범한 집배원의 집에서 1년 남짓 생활하게 되었는데 참으로 행복한 가정이었다고 합니다. 주일만 되면 온 가족이 교회에서 찬양하는 단란한 집배원 가정을 보면서 그 가정이 꿈꾸는 가족모델이 되었답니다. 귀국하면 교회에 나가리라 마음먹었지만 나가지 못했고 서른 네 살에 믿는 아내를 맞이했답니다. 

그러나 세상 일에 취해 신앙생활은 하지 못하고 술과 함께 살았답니다. 79년부터 아내의 손에 이끌려 수동적으로 교회에 출석했지만 거듭난 기독인보다는 세상의 성공주의자를 추구했답니다. 그럴수록 아내는 기도의 불을 지폈는데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두컴컴한 길을 재촉, 40분거리의 적막한 산길을 걸어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답니다. 아내는 과일장사다 옷장사를 하며 기도했지만 어머니와 자신은 소주로 연명했답니다. “민이 아빠, 우리 기도원에 가요. 살 길은 하나님밖에 없잖아요. 민이 아빠, 함께 기도해요.”형식적인 신앙인으로 살았는데 아내의 금식기도로 술에서 해방되었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 우반신마비가 되고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야 했는데 5일 동안 금식하며 주야로 눈물을 쏟으며 회개하여 신비하게도 어머니와 자신이 완전히 술에서 해방되었답니다. 아내는 질병에서 치유받고 어머니는 지금은 권사가 되었답니다. 

자복 회개하고 성령세례를 받게 되자 근심 낙담 방황이란 단어는 더 이상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답니다. 감사가 습관화됐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변했고 얼굴은 언제나 싱글벙글했답니다. 성경공부가 재미가 있고 새벽기도 용사가 되었답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새벽기도를 거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은 나이 60에 국회에 파송된 선교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6)" 1대가 30년이면 천대면 3만년입니다. 이것을 수사적인 표현도 되겠지만 영원히 하나님이 은혜와 인애와 인자를 베풀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를 통해 진정한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온 가족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는 매일 매일 이 축복기도를 자녀들을 위하여 드려야 하겠습니다. 네라는 말에 자녀의 이름, 남편의 이름, 아내의 이름을 넣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00게 복을 주시고 00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00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00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김필곤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