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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최고입니다 (출 20:4-6, 롬 1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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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최고입니다 (출 20:4-6, 롬 13:8-10)

가난하지만 행복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무엇 하나 줄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넘쳐흐르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런 그들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덮쳐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누워있는 아내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남편은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여러 날을 골똘히 생각하던 남편은 마침내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를 속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남편은 이웃에게 인삼 한 뿌리를 구해 그것을 산삼이라고 꿈을 꾸어 산삼을 구했다고 아내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남편은 말없이 잔뿌리까지 꼭꼭 다 먹는 아내를 보고 자신의 거짓말까지도 철석같이 믿어주는 아내가 너무나 고마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삼을 먹은 아내의 병세는 놀랍게도 금세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기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아내를 속였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내의 건강이 회복된 어느 날, 남편은 아내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미소를 띠우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저는 인삼도 산삼도 먹지 않았어요. 당신의 사랑 삼만 먹었을 뿐이에요.”

세상에는 진실보다 아름다운 거짓이 있습니다. 거짓도 진실로 받아들이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사랑이라는 선물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만사를 형통케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압시다. 오늘은 출애급기20:4-6, 로마서13:8-10 두 본문을 중심으로 “사랑이 최고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왜 사랑이 최고일까요?

1)사랑은 빚을 져도 좋을 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빚을 지고 산다는 것은 큰 짐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 주간에 인터넷 기사 중 빚 독촉을 하는 사체업자를 죽인 기사가 있었습니다. 빚 독촉으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저지른 살인 사건이었습니다. 빚을 지면 사람 사이의 사랑도 깨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고, 관계가 깨집니다. 빚 때문에 부부싸움이 일어나고 이혼하는 경우가 있고, 절친한 친구 간에도 다툼이 생기게 되고, 자녀들에게 아픈 기억을 남길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빚지지 않는 것이 사랑의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절제의 미덕도 필요합니다. 수입에 맞추어 지출하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또한 위기 상황을 대비하여 저축하는 절제도 필요합니다. 대책 없이 살다보면 자신은 물론 가까운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어주게 되고, 신앙의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이 시대가 빚을 권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휴대전화 메시지로, 전화로, 편지로 시도 때도 없이 대출을 받으라고 합니다. 급전이 필요한 자영업자들, 생활에 쪼들리는 서민들이 급한 마음에 대출해 주는 사람을 믿고 대출을 받았다면 그 다음부터는 엄청난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대출해 준 사람은 그것을 돌려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 본문 8절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빚을 지면 더욱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해 생명까지 주신 예수님의 엄청난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항상 사랑의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강권하는 것을 의식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사랑을 받고도 배은망덕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에 보답하는 고귀한 삶을 삽니다. 

2)사랑은 율법의 성취요,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계명이 사랑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이 무어냐고 질문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면 하나님과 관계된 계명도 다 이루고, 사람들과 관계된 계명도 다 이루는 것입니다. 신약 본문 9절에서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바울은 사람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대표적 율법 조항들을 제시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이게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이런 율법 조항들을 지키는 일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한 교회의 성도들이 전도도 잘 하고 봉사도 잘합니다. 그러한 교회가 부흥합니다. 사랑이 충만한 가정이 행복하고, 사랑이 충만한 가정의 구성원들이 사회적으로도 성공합니다. 

신명기 23:24-25에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율법도 사랑으로 배고픈 사람의 마음을 이해 할 때 이룰 수 있지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왜 남의 것에 손을 대느냐고 큰 시비와 다툼 거리가 될 것입니다. 

3)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은사에 대해 말하면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면서 13장에 사랑의 은사를 말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고전13:8에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했습니다. 

사랑은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토록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어떠한 죄도, 배신도, 원수도 용서하는 힘이 있습니다. 월남전에서 크게 부상을 입은 어떤 상이군인이 군대에서 제대를 하고 보니 자기 부인이 아기를 놓아두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다른 남자하고 바람이 나서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 아기를 등에 업고 직장도 없이 구걸하면서 삼천리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잃어버린 자기 아내의 얼굴을 그리면서, 밤이나 낮이나 찾아 헤매고 헤매다가 기진해서 돈도 없어지고 마음도 쇠해졌습니다. 3년이 지난 후에 그는 부산의 어떤 거리에서 행려병자로 죽어갔습니다. 어린아이는 계속 그의 등에 업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몸에서 사진 한 장과 유서가 나왔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간 아내의 사진 뒤에다가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여, 나는 그대를 사랑했었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앞으로 영원히 사랑하겠노라.”

모든 율법을 성취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어떤 것 보다 가치 있고 소중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도록 부어지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합시다.

1) 하나님을 떠난 그 자체가 큰 불행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은 영적인 고아요, 영적 생명이 없는 살았으나 죽은 자들이요, 심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셨고,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고, 영혼이 살게 하시어 영생에 참예하는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외면하는 그 자체가 심판입니다. 

요3:17-18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주님을 믿기 전의 모습에 대해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었다고 말하면서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2-3)라고 말합니다. 

2)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우상 숭배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면 멸문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출애급기 본문에 우상 숭배 하고 하나님 떠나면 죄를 삼, 사대까지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미국에 유명한 케네디가(家)가 있습니다. 케네디 가문(家門)은 가난한 아일랜드 출신 선조에게서 시작해서 세계적인 명문이 되었습니다. 보통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존 F. 케네디 정치학교에 기부도 많이 했습니다. 부와 권력과 인기와 매력이 넘치는 케네디 가문은 “미국의 로이얼 패밀리”로 잘 알려졌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명문 케네디 가문이 “케네디가(家)의 저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재앙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1941년부터 로즈마리 케네디는 정신 지체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1944년 조세프 케네디 2세는 항공기 폭발로 사망했습니다. 1948년 카틀린 케이브디쉬도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습니다. 1956년 재클린 케네디는 죽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1961년 조세프 케네디 3세는 언어장애와 반신장애를 앓기 시작했습니다. 1963년 패트릭 케네디는 생후 이틀 만에 죽었습니다.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당했습니다. 1964년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항공기 추락으로 조종사와 보좌관이 사망하고 본인은 허리, 폐, 갈비뼈를 다친 채 내장 출혈이 있었습니다. 1968년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은 암살당했습니다. 1969년 테드 케네디가 운전하던 자동차가 채파퀴딕 섬 다리에서 떨어져서 동승한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그 때 케네디는 텔레비전에 나와서 “어떤 무서운 저주가 케네디가 모든 사람들 위에 실제로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 마약 복용으로, 항공기 추락 등으로 계속 불행한 사건이 줄을 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그 가문에 일어나게 될까?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작가 에드워드 클라인은 “케네디가의 저주: 150년간 미국 최고 가문에 왜 비극이 출몰했는가?”라는 책에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케네디 가문의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전능 환상이 차갑고 험악한 현실과 충돌하여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가문을 자랑하면 가문 우상 숭배입니다. 지나친 오만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천대까지 은혜 주십니다. 구약 본문 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했습니다. 윈쉽(A. E. Winship)이 에드워즈가를 연구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에드워즈는 목회자겸 신학자였습니다. 에드워즈가는 후손들에게 물질적 유산은 남겨주지 못했지만, 지력, 활력, 인격, 열정,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3남 8녀 중 부모에게 욕을 돌리는 자녀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75명의 손자손녀들과 그들의 남편들과 부인들 중에도 욕을 돌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들 3명과 사위 8명 중에 1명은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 1명은 유니온 대학 총장, 4명은 판사, 2명은 하원의원, 1명은 주의회 의원, 1명은 헌법위원, 1명은 탁월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에드워즈가의 1400명 후손 중에 대학 총장 13명, 교수 65명, 변호사 100명(1명은 법대 학장), 판사 30명, 의사 66명(1명은 의대학장), 상원의원 3명, 대도시 시장 3명, 주지사 3명, 부통령 1명, 재무상 1명, 선교사 목회자 100여명이 나왔습니다. 

에드워즈가(家)는 정말 신앙의 명문입니다. 자손들 모두의 혈관 속에 명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모든 자손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즐겁게 순종하여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최상의 실력과 인격의 유산을 받았지만, 건방지게 굴지 않았다.” 에드워즈의 자녀들 속에는 돈 권력 쾌락 인기 등 일체의 우상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믿음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누구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여 대대로 복을 받는 가문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합시다. 

1) 보이는 이웃을 사랑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요한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되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대가를 바라지 말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성도가 됩시다. 

한 부인이 길을 가는데, 한 청년이 바닥에 앉아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요?” “불량배에게 맞고 지갑까지 빼앗겼어요.” 청년의 얼굴에는 심한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부인은 청년에게 선뜻 5만 원을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이 돈으로 우선 가까운 병원에 가 보세요.” 청년은 몇 번이나 머리 숙여 감사했습니다. “전화번호를 알려주세요. 반드시 이 돈을 갚겠습니다.” 부인은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너그러운 부인이었지만 속이 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이 화장을 하려 할 때 편지가 든 봉투 하나가 화장대에 놓여 있었습니다. “여보, 당신의 착한 마음이 행여 상처를 받을까 걱정이오. 청년 대신 내가 갚는 것이오.” 

지혜로운 사람은 이해관계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어진 마음으로 대합니다. 친절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훈훈하게 하고, 살맛이 나게 합니다. 또한 그것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일이 되고, 주님을 대접하는 일이 됩니다. 

2) 이웃 사랑은 소극적으로는 악을 행치 않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악을 행하는 일입니다. 이웃과 관계된 계명에서 부모 공경하지 않으면 부모에게 악을 행하는 일이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살인하는 행위가 악을 행하는 일입니다. 요즈음 사고사를 위장해 보험금을 노리고 살인하는 악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간음하는 일도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한 일이지만 사실은 자신과 남에게 악을 행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계셔야 할 성전인 우리 몸을 타락케 하여 몸과 영혼을 함께 멸망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김으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불로 소득을 원하는 자들은 타인의 물건에 탐욕을 품게 되고 그 탐욕은 사람들로 하여금 재물을 탈취하는 도둑이 되도록 만듭니다. 도적의 유형을 보면 사기성 도둑질, 남에게 유익을 주는척하는 위선적 도둑질, 법의 후광을 엎고 하는 도적질, 법을 악용하는 도적질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십일조 드리지 않는 것도, 안식일 지키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는 것도 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입니다. 거짓 증거는 남을 속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진실이 아닌 것을 고의로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탐내는 것도 악을 행하는 일입니다. 탐욕을 품고 있는 것도 죄지만 탐욕이 발전하면 도둑질도, 간음도, 살인도 하게 되기 때문에 아예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3) 이웃 사랑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곧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가 주님을 본받아 진정으로 사랑을 하면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하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행하게 됩니다. 

하늘나라 천사 둘이서 세상에 내려왔는데 한 천사는 가난한 노동자의 모습으로 또 한 천사는 부잣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의 모습으로 변했다. 몇 해 후,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두 천사는 서로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저 세상은 참으로 살 곳이 못되는 곳이야. 하루 종일 일을 해도 잘 사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힘들고 어렵게 살 수밖에 없었거든.” 이 말을 듣고 있던 두 번째 천사는 이상하다는 듯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상하다. 난 강아지의 모습이었는데도 사람들은 내게 고급 음식을 아끼지 않고 늘 보살펴 주던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기와 어우러져 살아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첫 번째 천사의 탄식이었다. 

우리 주변에는 생각보다 많은 외로운 이웃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최소한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라도 이웃을 위한 관심을 보이며 살 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보이는 이웃을 소극적인 면으로나 적극적인 면으로 사랑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왜 사랑이 최고일까요? 사랑은 빚을 져도 좋을 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요, 사랑은 율법의 성취요, 완성이기 때문이요,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성도가 되자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그 자체가 큰 불행이요,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우상 숭배와 같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천대까지 은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자 했습니다. 보이는 이웃을 사랑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요, 이웃 사랑은 소극적으로는 악을 행치 않는 것이요, 이웃 사랑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최고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사랑이 여러분을 통해 가족과 성도들과 이웃에게 흘러가 대대로 복을 받아 복의 근원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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