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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아오는 사람들 (사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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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사람들 (사 2:2-4)         

예루살렘 시온산은 사방 어디에서 보아도 잘 보입니다. 해발 700미터 이상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온, Zion>이란 말의 어원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바위>, <산성>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본래 시온은 예루살렘의 기드론 골짜기 근처의 절벽으로 된 남쪽 봉우리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후에는 예루살렘 자체를 시온성이라 불렀습니다. 다윗이 이곳을 수도로 삼은 후에는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고, 성전을 세운 후에는 영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유다 왕국이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된 후에는 시온은 그들이 잃어버린 조국의 땅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가 된 후에 그들은 시온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면서 살았습니다. <고국 땅으로 돌아가려는 꿈>은 유대인들의 역사 속에 계속 나타났습니다. 18세기 말에는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발로서 <호베베 시온, 시온을 사랑하는 자들>이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유대인 농민들과 기술자들을 팔레스틴으로 이주시키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후에 이 운동은 <시오니즘>으로 연결되었고, 러시아를 비롯한 사방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오늘의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시온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여기서 <여호와의 산>에 대해 3절 후반부에 보면 <시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라고 했지요. 그러므로 백성들은 시온으로 가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온으로 돌아가는 일>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이 예언은 다양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선 가깝게는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던 백성들이 고레스 왕의 허락으로 예루살렘에 귀환하던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아주 멀게는 세상의 종말에 구원받을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이나, 세상 끝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길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즉 하나님의 산으로, 하나님의 전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가까이 가길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돌아가는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본문의 백성들 중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제 돌아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의 산, 즉 시온이 세상 모든 산보다 높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알았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세요.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마치 히말라야 산맥의 에베레스트가 모든 산 위에 우뚝 선 최고봉인 것처럼, 시온이 온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높이 우뚝 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장 높은 산으로 가자>고 하면서 시온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시온산을 왜 떠났습니까? 그 때 그들은 시온산이 주변 산들에 비해 형편없이 낮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시온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최대의 착각이었습니다. 

여러분, 등산을 하다보면 착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앞 봉우리가 정상처럼 보입니다. <조금만 힘 내, 저기가 제일 높은 곳이야. 자 힘내라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틀렸음을 금방 알게 됩니다. 그 봉우리에 꼭대기에 가서 보면 저 멀리에 더 높은 봉우리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정상에 서려면 표지석이 있는 곳까지 가야 합니다. <천왕봉 1915미터>, <대청봉 1,708미터>라는 표지석이 눈에 들어오기까지는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 표지석이 없는 봉우리는 정상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은 시온산보다 더 높은 산, 더 큰 복을 줄 산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시온을 떠나 우상의 산당들이 있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아무리 많이 경고하고 말씀하셔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오른 산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곳에는 정상을 알리는 표지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온을 떠난 그들을 찾아온 것은 복이 아니라, 멸망이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했고, 남 왕국 유다도 바벨론에 멸망했습니다. 열심히 산에 올랐지만, 백성들은 거기서 멸망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온산의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리고 세상의 속임수에 속아, 허영에 빠져 헛수고를 합니다. 그 결과는 비참한 멸망입니다. 역사상 가장 악독한 지배자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는 로마의 네로 황제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최고로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의 왕궁은 복도의 길이만 1마일 이상 되었고, 모든 벽은 상아와 자개로 장식되었고, 천정에는 찾아오는 손님에게는 향수가 뿌려지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노새에게도 은으로 장식된 신발을 신겼고, 한 번 출타할 때면 천 명의 군사들이 뒤따랐으며, 낚시질을 할 때에는 금으로 만든 바늘을 썼다고 합니다. 한 번 입었던 옷은 두 번 다시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거나 만족한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늘 우울증에 시달렸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다가 결국 자살했습니다. 

인간의 과학 문명도 그렇습니다. 지난 몇 십 년은 인류 문명이 최고도로 발전했다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과연 행복했을까요? 한 사회학자는 그 몇 십 년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그는 1950년대를 <허무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데이비스 리이즈맨의 말처럼 <고독한 군중>이 넘쳐나던 시대였습니다. 그는 1960년대를 <새로운 시대, New Generation>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쾌락입니다.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쾌락에 빠져든 것입니다. 또 그는 1970년대는 <방황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쾌락은 결국 삶의 긍정적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사람들은 결국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 1980년대는 <이기주의의 시대, Me Generation>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이 수십 년에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사람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의 쾌락에 빠져 사는 이들, 레저에 빠진 이들, 돈 맛, 권력의 맛에 취해 사는 사람들을 볼 때 아슬아슬한 생각이 듭니다. 언제 하나님의 철퇴가 떨어질지 두렵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기는 존재는 없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이는 없습니까? 본문은 우리에게 강력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가까이 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 그 무엇을 다 준다고 해도 하나님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시온산에는 정상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우선 그 곳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신명기 28장 1절 이하에 언급된 복이 시온산을 사랑하고 가까이 나아가 그 말씀을 청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 모두가 이 복을 받게 되길 기원합니다. 

또 시온산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어 거기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돌아가는 백성들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6장 24절 이하의 축복이 선포되는 곳이 진정한 정상입니다. 

사람들은 시온산이 낮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산, 하나님의 보좌는 한 번도 낮아진 적이 없습니다. 2절에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라는 말씀은 시온산이 과거에는 다른 우상의 산들보다 낮았었는데, 이제야 높아진 게 아닙니다. 시온산은 한 번도 다른 산보다 낮아진 적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가장 높은 산이었는데, 백성들이 처음엔 그 산을 낮게 여기다가 나중에 눈이 열린 후에야 비로소 그 산이 가장 높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최고이십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언제나 최고의 자리에 펼쳐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되, 영원히 위대하십니다. 전능하시되 영원히 전능하십니다. 전지하시되 영원히 전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되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거룩하시되 영원히 거룩하십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그 어떤 영적 존재도, 그 어떤 군왕과 권세자도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선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최고이십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착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보다, 세상의 즐거움보다, 세상의 쾌락보다 못해 보였습니다. 시온산을 낮게 보고 멸시한 것,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떠난 것, 하나님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이것이 그들의 죄였습니다. 

그러기에 돌아오는 자들은 눈물로 돌아옵니다. 하나는 기쁨의 눈물입니다. 돌아갈 수 있음에 기뻐하면서 올 것입니다. 또 하나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시온을 낮게 여겼던, 하나님을 멸시했던 어리석음과 죄를 회개하는 눈물입니다. 

울면서 돌아오는 백성의 모습에 대해 예레미야 31장 8-9절을 보면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길로 가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기뻐서 울고, 회개하면서 울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좌표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요즘엔 GPS가 있어서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어도 어디서 찍었는지 기록됩니다. 문제는 영혼의 위치를 알려주는 GPS가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과 멸망의 낭떠러지 앞에 서 있으면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각자의 위치를 깨닫길 원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산에 오르고 있다면 속히 하나님께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다면 가까이 나아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마십시오. 가장 쉬운 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옆집에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가는 방법입니다. 모진 고생을 하고, 가다가 죽겠지요. 그러나 방향만 돌리면 한 걸음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가장 높은 곳에 축복을 손에 들고 서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화장하고 몸단장하고 옷 갖춰 입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믿음으로 <아멘!> 하면 바로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할 일은 돌아가는 사람들은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아멘!  

무슨 말일까요? 그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율법, 그 귀한 말씀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간교한 유혹의 소리, 마귀의 속삭이는 말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꼬임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긴 후에야 비로소 그 말씀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사실은 축복이요 사랑임을 뒤늦게 깨닫는 어리석은 자녀처럼  돌아오는 백성들은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시길 원한다면 말씀으로 나아가십시오. 말씀은 하나님께로 바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요, 안내자입니다.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알려줄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처세술이 필요 없습니다. 성도는 처세술에 따라 성공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말씀에 따라 성공합니다. 말씀이 처세술 교과서요, 가정교사요, 상담자요, 인생 안내자입니다. 

더구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라고 했지요? 한 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무시되고 버려졌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따라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그 뜻이 말씀 안에 들어있습니다. 결국 말씀은 모든 심판의 기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떠나 자기 꾀와 세상의 방식으로 산 사람들은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직하게 말씀을 따라 산 사람들은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 공정하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억울함은 사라질 것입니다. 더 이상 상처받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전에는 너무 억울해서 원수를 갚으려고 무기를 준비했습니다만, 이제 무기를 쓸 데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따라 억울함을 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무기를 폐기처분하게 되고, 드디어 평화가 옵니다. 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할렐루야!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평화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교회가 오늘의 시온산이 되길 바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람들이 시온산으로 몰려오듯이, 우리 교회로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모여 오길 원합니다. 매 주일마다 교회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꿈꾸어 보십시오. 우리도 그 가운데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교회로 모여오다가 언젠가는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기쁨으로 <주 앞에 빨리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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