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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 (엡 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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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의 화평 (엡 2:11-19)
    
지난주간에는 ‘홀리 스피치’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11년 동안 KBS 뉴스 여성앵커였던 신은경씨가 지은 책이었습니다. 1981년에 KBS 아나운서로 입사하여 첫 방송하는 날부터 9시 뉴스 진행자로 무려 11년 동안 일하신 분인데, 기독교인이요, 권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 분의 강의를 DVD로 들어보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정확한 발음에 공감할 수 있는 전문적인 내용에, 시종일관 웃음을 유지하는 명강의였습니다. 말을 잘하려면 먼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말을 잘하려면 칭찬하는 말을 하라고 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인용합니다. 아이들은 칭찬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칭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작게는 무엇 잘한 일을 놓고 잘했어요 라는 칭찬이 있고, 찾아서 ‘훌륭하다’는 칭찬이 있다고 합니다. 작게는 ‘잘 했어요’, 크게는 ‘훌륭해요’라는 칭찬이 있다고 합니다. ‘잘 했어요’라는 칭찬은 그 때 그 때 칭찬하면 되지만, ‘훌륭해요’라는 칭찬을 하려면 잘 찾아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강의하다가 옛날 대중가요지만, 건전 가요를 불렀습니다. 우리 젊었을 때에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 “잘 했군, 잘 했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신은경씨는 이 노래가 신기하고도 재미도 있어 불러보자고 합니다. 하춘화씨가 불러서 국민가요가 되었던 “잘했군, 잘했어”라는 노래는 칭찬하는 긍정적인 노랫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편으로 나누어 노래 첫 부분을 불렀습니다. 

“영감~ 왜 불러 / 뒤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 쌍을 보았소 / 보았지. / 어쨌소? / 이 몸이 늙어서 몸보신 하려고 먹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병아리 한 쌍을 보았냐고 물었는데, 이미 먹었다는 거예요. 상황 끝. 병아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무조건 “잘 했군, 잘 했어”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지 않지만, 칭찬하고 격려해주어야 이 험한 세상을 힘 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홀리 스피치라는 책은 40일 간의 언어생활을 훈련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생활과 인간관계를 훈련하기 위하여 읽어볼 책입니다. 

우리 사람을 인간이라고 합니다. 인간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산다고 하여 인간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자기 혼자 독불장군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홀로 계시지 않고 공동체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가족과 관련된 어휘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 그리고 보혜사 성령으로 존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하는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형제요 자매요 한 가족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 내 아버지 내 어머니의 가족이 되었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버클리 대학에서 쥐를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혼자서 먹이를 먹으면 얼마를 사느냐를 봤더니 600일을 살더랍니다. 다섯 마리를 함께 먹도록 했더니 700일을 살더랍니다. 세 번째 실험은 사람이 돌보면서 키웠답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끔 쓰다듬어 주면서 더 먹고 싶어 할 때는 더 주고, 먹기 싫어할 때는 다른 것을 주면서 지켜보았더니 무려 950일을 살았답니다. 

미물도 더불어 살면서 사랑의 힘을 느낄 때는 행복한 마음으로 오래 산다는 사실입니다. 쥐도 사랑 안에서 오래 삽니다. 연구팀은 이 실험을 통해 동물도 이렇게 더불어 살면서 사랑을 주고받고 하면 그 결과로 평안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수명이 연장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오래 행복하게 살려면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창세기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매일같이 "좋았더라", "좋았더라" "좋았더라"를 연발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처음으로 "좋지 않다"는 말이 기록되어지고 있습니다. “아담이 혼자 거하는 것 좋지 않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족을 만들어 주십니다. 두 사람이 짝을 이룬 후에 하나님께서는 심히 좋았더라 말씀하십니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화목의 제물이십니다. 

먼저 예수 믿기 전의 우리는 이방인이요, 할례받지 않은 무할례자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이 없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사람,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11-12절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 믿기 이전의 상태를 여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 하나님과는 분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13절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되었고,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와 반역을 용서해주실만큼 사람을 넘치게 사랑해주신다고 하면 죄인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하시고 저주를 받게 하시고, 대신 우리 죄인들을 용서해주시고 자녀로 받아주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과거에 하나님과 멀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과 죄인을 화해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표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셔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보니, 그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때에,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시는 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덮고, 다시 심판하지 않고, 책임을 묻지도 않으시고, 잊어버리기로 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화평이십니다. 

예수님은 화평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화평이시기에 당신이 들어가는 곳마다 막혀진 담이 무너지고, 원수도 사랑하게 하시고, 화평 그 자체입니다. 

14-16절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이란 헬라어로 ‘에이레네’인데 히브리어의 ‘샬롬’을 번역한 말입니다. 이 샬롬이라는 말은 적대감정이 없는 행복과 평안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화평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이 사는 사회는 적대감정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다, 이방인이라는 장벽도 무너지고, 유대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에 가로막힌 담을 헐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로 보아주셨고, 이방인 로마 사람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가진 이가 없다고 칭찬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다리를 놓은 사람이 되어야지, 담을 쌓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의 모든 장벽을 무너졌는데,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무너뜨려야 하는 장벽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과 적게 가진 사람들, 많이 배운 사람과 조금 배운 사람, 지배하려는 사람과 지배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사이에 장벽이 높아만 가고 견고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시 동서의 장벽과 남북 간의 불신과 멸시하려는 장벽을 실감하게 됩니다. 정치의 계절을 맞이하면 동서의 갈등과 편견이라는 장벽에 막혀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장벽, 경제 번영을 이룬 세대와 경제 번영을 누리는 세대 간에 장벽이 있습니다. 이념의 장벽을 넘어온 세대와 이념을 장벽을 무너뜨리려는 세대와 또 하나의 장벽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와 같은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하는 수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멸종시켜야 하는 족속으로 보면서 유럽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것도 이젠 끝내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멸종시킬 수 있습니까? 

이러한 장벽에 또 다시 장벽을 쌓고 있을 때에 그 모든 장벽을 비웃듯이 무너뜨리고 하나의 형제애를 강조하는 예수 공동체가 탄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곧 나와 이웃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할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미워하고 질시하고 원수 맺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16절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나되지 못하던 모든 것을 한 몸으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원수되었던 모든 관계를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17-19절입니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태백시에 있는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를 일으키신 르우벤 아처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 Ⅲ) 성공회 신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영국성공회 신부가 되었고, 1957년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문을 닫게 된 미가엘 신학원, 지금의 성공회대학교의 재건을 위해 내한하였습니다. 그는 신학교를 다시 정비하면서, 태백시 황지에 예수원 공동체를 설립하였고, 영성운동을 하다가 200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한국교회를 보면서, 교회(敎會)라는 말을 할 때에 한문자로 가르칠 교(敎), 모을 회(會)라고 표기한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사상을 주입하는 곳이 아니라, 가족과 같은 모임이 되어야 하고, 성도의 교제 ‘코이노니아’가 있어야 한다는 했습니다. 그래서 교라는 말은 가르칠 교(敎)가 아니라, 사귈 교(交)를 써서 교회(交會)라고 해야, 교회의 본래적인 의미를 준다고 했습니다. 아주 좋은 지적이기는 합니다. 교회는 성도의 교제가 있고, 천국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만남이요, 사귐이요, 교제요, 관계임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가르칠 교, 모을 회를 썼으니 말이 없었지, 만일에 사귈 교를 썼다고 하면 교회는 먹고 노는 곳인 줄 알았을 것이고, 교인들 자기들끼리만 모여 노는 곳이라고 사회적인 비난도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권속(眷屬)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성경은 정말 쉽게 번역했으면 좋겠습니다. 권속이라는 말은 ‘한 집안 식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식구라고 하면 되지, 어렵게 권속이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 원문에 따르면 ‘오이케이오스’라고 하여 그 말은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말이 세 번 나오는데, 한번은 ‘가족’이라고 했고, 또 하나는 ‘가정’이라고 했고, 오늘 본문에서는 ‘권속’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가족이라고 했으면 같은 단어이니 그 다음에도 가족이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새번역에서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알기 쉽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은 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한 가족입니다. 교회가 결코 건물이나, 어떤 조직이나 기관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의 공동체요, 가족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가족, 가정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 가족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가족은 혈육관계의 가족보다 더 중요합니다. 영적인 가족은 영원히 함께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가족은 서로 멀리 떨어져 살수도 있습니다. 이혼으로 헤어지기도 하고 소중했던 사람이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늙고 죽으면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가족 교회는 영원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가장 값진 일은 육적인 가족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영원히 함께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영원한 가족입니다. 

롬12: 5절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한 가족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서로 지체가 되었고, 한 가족,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요 우리 모두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우리는 혼자 존재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신앙생활은 절대 혼자 유지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떠나면 그 날로 우리 신앙은 살아남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닥불을 하나 둘 열 스물 모아 놓을 때 서로 불을 나눠주고 점점 크게 잘 타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타던 모닥불에 나뭇가지들을 하나씩 둘씩 셋씩 떼어놓으면 너도 꺼지고 나도 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부족해 보이지만 하나씩 둘씩 모여서 서로가 격려하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붙들어 줄 때에 큰 신앙의 불꽃으로 타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신앙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에 내 신앙의 불은 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양반과 평민, 그리고 상놈, 천민 간의 높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선교사들이 와서 운동장에서 테니스를 하였습니다. 서양선교사들이 운동하는 것을 양반들이 나와서 구경합니다. 

라켓으로 공을 치고, 받아 넘기는데 아주 땀을 흘리면서 운동하는 것을 보다 못해, “아니 그렇게 힘든 일인데, 종놈들에게 시키지 않고, 선교사님이 하시느라고 고생하십니까? ”라고 했다고 합니다. 양반들은 운동하면 큰 일이 납니다. 점잖게 앉아 ‘에헴’ 해야지, 운동장을 뛰어다닌다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노릇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양반 상놈이 무너진 것 정말 잘 한 일입니다. 우리나라에 오신 선교사님들 중에 새뮤얼 무어(Samuel F. Moore)목사님이 계십니다. 무어목사님은 1892년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반 평민들을 모아 교회를 세웠습니다. 무어는 1893년에 지금의 조선호텔과 롯데호텔 중간쯤에 있던 곤당골이란 동리에 교회를 열고 ‘곤당골교회’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이 교회는 장로교회로서는 새문안 교회 다음으로 설립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가 후에 인사동으로 옮기면서 승동교회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곤당골교회는 백정교회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백정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교회에서 안동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이 안동교회는 양반들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곤당골교회에 양반들이 나오고 보니, 백정들과 함께 앉아 예배드려야 했습니다. 양반들 가운데는 공공연하게 이런 말을 합니다. “양반이 믿는 하나님과 백정이 믿는 하나님이 동일하다는 것은 곧 양반을 능멸하는 것이다. 더욱이 한 교회 지붕 밑에서 같은 자리에 앉아 천당을 생각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안동교회를 개척하여 따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승동교회는 상민의 교회요, 안동교회는 양반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새뮤얼 무어 목사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분이 1895-1896년에 걸쳐 3차례나 고종황제에게 백정차별철폐를 진정하므로 받아들여, 백정도 호적할 수 있게 하였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회가 들어오므로 양반과 상놈의 신분제도가 철폐되었습니다. 

소설가 이철환 씨가 이웃들의 실제 이야기를 단편으로 구성해서 베스트셀러가 된 “연탄길”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한 가족이 차를 몰고 서울 근교에 유원지를 다녀오다가 어두운 골목길에 검은 물체가 길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감이 심상치 않아서 차를 멈추고 내려 보니 한 남자청년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뺑소니 사고였습니다. 

경찰에 신고하고 우리는 관여하지 말고 가자는 아내를 설득해서 골목에 애들과 함께 좀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한 후 남편은 신음하는 사람을 태우고 인근병원에 갔는데 너무 중상인지라 작은 병원에서는 볼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그를 차에 태워서 큰 병원으로 가서 입원수속을 하는 동안에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일을 끝내고 아내와 아이들이 서있어야 할 그 골목에 갔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없었습니다. 너무 기다리다 지쳐서 다른 편으로 집에 갔나보다 생각을 하고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데 자기 집 쪽으로 불자동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갑니다. 놀라서 빨리 가봤더니 자신의 집 조그만 빌라에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큰일이 났다고 생각하고 차에서 내려 보니 아내와 아이들이 밖에 서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윗집에 살고 있던 처제네 식구들도 나와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골목에서 기다리다 지쳐서 처제에게 전화를 했고 처제가 식구들과 함께 차를 몰고 와서 언니네 집 식구들을 태워서 가는 사이에 가스폭발로 불이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행히 모두가 무사했는데 102호에 사는 내외만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뒤에 경찰 조사에 의하면 바로 102호에 사는 그 사람이 골목에서 청년을 치고 뺑소니를 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보고 구하려고 나섰다가 이 남자는 자기 집안 식구를 다 살릴 수 있었고 그러나 사람을 치워 중태에 빠뜨리고 현장을 벗어나 뺑소니를 쳤던 사람은 죽었다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분명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 엄위하신 하나님,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되었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대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우리는 크게 하나님의 가족들입니다. 평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할 사람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려는 우리는 화목의 제물이 되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드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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