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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 (빌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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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뛰어넘는 기쁨 (빌 1:1-11)

영국의 유명한 순회부흥사인 스펄전 목사(1834∼1892)의 일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그는 어느 날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설교자의 표정관리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여러분,『희망에 대해 말할 때는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보십시오. 은혜나 감사, 영광을 말할 때는 눈을 크게 뜨고 청중을 바라보되 빛나는 눈동자로 바라보십시오』 그 때 평소 늘 얼굴을 찡그리며 다니는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옥을 말 할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요?』 
스펄전은 대답했습니다. 『자네의 평소 얼굴이 적당하겠네』
오죽 찡그리는 얼굴로 살았으면 스펄전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여러분, 옆에 계신 성도님 얼굴을 보세요. 천국이 보입니까? 지옥이 보입니까? 
옆 사람을 축복하며 인사해봅시다. 오늘 당신의 표정에서 천국이 보이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표정에서부터 다르게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표정에서는 천국이 보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은 나중에 나중에 죽게 되면 가게 될 먼 나라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속에서 우리가 누리고 살아야 할 아름다운 나라요, 행복의 나라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러분의 현실속에서 천국을 누리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리의 현실속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여러분,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기뻐할 일이 있어서 기뻐하는 사람과 기뻐하기 때문에 기뻐할 일을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 말은 비슷한 것 같지만 아주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뻐할 일이 있어서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할 일이 있어야만 기뻐합니다. 그것도 아주 잠시 기뻐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내 그 기쁨은 사라져버리고 다시 원망과 불평 짜증과 불만이 가득한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고 맙니다. 그러나 반대로 기뻐하기 때문에 기뻐할 일을 경험하는 사람은 기뻐할 일이 주어지지 않아도 그 상황 속에서 기쁨의 요소를 찾고 감사의 제목을 찾습니다. 이런 사람은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더 기뻐할 일과 감사할 제목이 삶 속에서 더욱 넘쳐나게 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아마 우리들 중의 어느 누구도 잠시 기뻐하고 또 금방 짜증과 원망이 가득한 불행한 삶을 살고 싶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삶의 태도가 기뻐할 일이 있어서 기뻐하는 삶이 아니라 기뻐하기 때문에 기뻐할 일을 경험하는 삶의 태도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오늘 말씀 빌립보서에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갔던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바울은 어디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 아십니까? 네 바로 감옥 안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빌1:13-14절을 읽어볼까요?나의 매임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로마 감옥안에서 이 편지를 썼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빌립보서를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쓴 옥중서신은 에빌골몬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이것을 외우기 쉬운 방법은 에비의 골이 몬드라지게 바울은 편지를 썼다. 여기서 애비는 영적 아비인 바울입니다. 바울은 골이 몬드라지게 성도들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감옥 안에서 쓰여 진 이 편지 빌립보서는 성경 가운데 기뻐하라는 표현이 가장 많이 나오는 기쁨의 서신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하여 총16회 이상 기쁨, 기뻐하라등 기쁨과 관련된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 바울은 기쁨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오히려 기쁨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짜증을 부리며 그 단어가 적혀 있는 종이를 마구 찢어버려야 할 상황 즉 감옥에 매여 있는 참으로 답답하고 춥고 배고프고 부자유스러운 그야말로 기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 스스로가 기뻐하고 있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기쁨이라는 단어와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는 바울로 하여금 오히려 기뻐할 수 있게 하며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게 하였을까요? 
오늘 빌립보서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바울이 누렸던 그 기쁨을 우리도 함께 누림으로 우리 역시 도저히 기뻐할 수 없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상황에서도 기쁘다는 고백, 행복하다는 고백이 우리의 삶에 가득히 넘쳐나길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 때문에 기쁨과 너무나 동떨어진 상황에 내팽개쳐져 있었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먼저, 1-2절 말씀을 살펴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servant of christ jesus, all the saints in christ,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1-2절의 편지의 첫 부분에서 그가 밝히고 있는 고백의 매 마디마다 빠지지 않고 있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지저스 크라이스트,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며, 너희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이며 너와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은혜와 평강은 바로 다 하나님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다는 그의 고백입니다. 

결국 그가 도저히 감사할 수 없고 기뻐할 수 없는 그 어두침침하고 냄새나는 감옥 한 구석에서도 나는 기쁘다고 너희들도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세상이 깨달을 수도 맛 볼 수도 없는 평강을 주시는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한번 따라해 봅시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바울이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어두침침하고 냄새나는 감옥의 그가 처하여 있는 상황만을 생각하고 그것만을 바라보았다면 바울도 우리와 같이 똑같이 기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 왔는에 이 어두침침하고 냄새나는 감옥 한 구석탱이가 뭡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입니까?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나를 이렇게 내버려둘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두침침하고 냄새나는 춥고 떨리는 그 감옥 한 구석 탱이에 묶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육체는 묶여 있을지 몰라도 그의 영혼은 자기를 그토록 사랑해주시고 인도해주시고 축복해주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여 기쁨의 날개를 퍼득이며 날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비바람이 세차고 거세게 불어대도 그 비바람은 구름 밑에서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이 아무리 견디기 힘들고 버티기 힘들 정도로 거세고 세찬 비바람이라 할지라도 건장한 나무들이 여기저기 뽐혀 나뒹굴며 심지어 자동차가 집 한 채가 통째로 다 물에 잠길 만큼 거센 태풍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구름 밑에서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비바람입니다. 그 비바람을 쏟아내는 구름위로 올라가면 어떻게 그런 비바람이 불어 닥칠 수 있을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평온함과 안락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그 칠흙 같은 감옥 한 구석탱이에서도 기쁘다고 감사하다고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그 감옥 한 구석탱이에 묶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날아 올라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우리의 답답하고 짜증나고 불평스러운 마치 춥고 냄새나는 감옥 한 구석탱이같은 우리의 상황과 환경속에서도 우리가 불평대신 감사를 짜증대신 기쁨의 고백을 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감사의 날개를 달고 하나님께로 날아올라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의 그 거칠고 험한 비바람을 뚫고 저 아름답고 영원한 천국에 올라가 천국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930년대 미국에 큰 공황이 찾아왔을 당시, 법률가 출신이자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인 클래런스 대로라는 유명한 무신론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이 경제 공황에 들어가자 자기의 무신론을 선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연을 할 때마다 “여러분, 이 사태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 어려운 상황을 우리에게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분명히 하나님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정부를 비판하면서 무정부주의적인 자기의 신념을 선전했습니다. 하루는 흑인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가 무신론 강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꿈과 재산을 잃었고 노래까지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소리치니까 갑자기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한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면서“저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그는“아니 어떻게 우리가 이 지경이 됐는데 노래할 수 있단 말입니까?”했더니, 그 할머니는 큰소리로“예수님 때문에 노래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할머니 한 사람이 자신만만하게 외치자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맞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때문입니다”라고 동조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금새 한 무신론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던 강연장의 분위기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하는 군중들로 인해 바뀌었고, 그는 이런 군중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겹고 고통스러운 상황과 환경 때문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폭풍우가 심하게 쏟아 부을 때 우리는 태양이 비추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폭풍우가 심하게 쏟아 붓는다 할지라도 태양이 뜨지 않는 적은 없습니다. 태양은 떠 있지만 심하게 쏟아 붓는 폭풍우 때문에 잠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잠시 우리가 그 태양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태양은 우리에게 비추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비추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태양이 비추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혹시 태양이 산산조각 나 깨져버리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의 태양은 절대 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비추지 않을 날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향해 비상해 올라감으로 세상이 누릴 수 없는 기쁨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둘째로 어떻게 기쁨과 어울리지 않는 우리의 상황에서도 우리는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요?

여러분, 3-8절까지의 말씀 가운데 가장 많이 반복되고 있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3절에 너희를 4절 너희 무리를 위하여 5절 너희가 6절 너희속에 7절 너희 무리를 위하여 너희가 너희가 8절에 너희 무리를 
 
바울이 무엇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너희 때문 즉 빌립보 교회 성도들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만드는 감사의 대상이었습니다. 3절에 보니 바울은 빌립보 교회성도들을 생각 할 때마다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니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기도의 대상이었습니다. 5절에 보니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교제의 대상이었습니다. 8절에 보니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사모의 대상이었습니다. 즉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감사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빌립보 성도들이 있어서 기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우리를 혼자 살아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태초에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시고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아담의 파트너 하와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부의 시작이요, 가정의 시작이 되었으며 교회의 시작이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부와 가정과 교회를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우리의 목장과 부서가 서로에게 기쁨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셔서가 아닐까요? 

그러하기에 우리는 우리 가정의 부모님을 생각하고 형제들을 생각할 때 우리의 남편과 아내를 생각할 때 우리에게 그런 가족을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고백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우리 목장, 우리 부서 서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입술에서는 감사의 고백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사모한다는 고백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 다들 표정들이 어두워지시는게 아니, 목사님 감사는 커녕 웬수도 그런 웬수가 없는데요.라고 말씀하시는 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 서로를 생각 할 때 어쩌면 우리는 감사의 고백, 사랑의 고백이 되어 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우리 남편에 대해서 뭘 좀 아시나요? 우리 아내에 대해서 뭘 좀 아시나요? 우리 시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알고 그러시는겁니까? 아니 속 썩이는 우리 자식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우리의 가족들과 우리 공동체의 성도들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정말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과 언행 때문에 상처가 되고 그래서 서로를 생각 할 때 감사의 고백은 커녕 짜증과 원망의 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을 수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어땠을까요?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감사의 고백을 한다고 하여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 모두가 다 바울의 편이고 바울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바울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빌4:2절을 볼까요? 빌립보 교회 유명한 여인 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유오디아와 순두게였습니다. 이 두 여인은 그야말로 빌립보 교회에서 좋은 쪽으로가 아니라 좋지 않은 쪽으로 유명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두 여인만 그랬을까요? 바울이 다 고백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때로 아마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하게 하고 어렵게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 할때마다 감사하다고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 때문에자기는 기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였을까요?
9-11절을 보십시오. 내가 기도하노라. 내가 기도하노라.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 냄새나는 감옥 한 구석탱이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바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식과 총명으로 더욱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게 해달라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 때문에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눈만 뜨면 마주치게 되는 나의 아내와 남편, 내 자녀들 그리고 나의 부모와 형제, 우리 교회 지체들로 인하여 기쁘지 못하다면 어떻게 기쁜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눈만 뜨게 되면 만나게 되는 그 사람들을 생각할 때 기쁨이 아니라 짜증이 먼저 확 올라온다면 어떻게 우리의 삶이 천국과 같은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기에 우리는 바울과 같이 우리가 매일 만나고 함께 하게 되는 우리의 가족과 우리의 동역자들이 우리의 기쁨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나에게 기쁨의 대상이 되지 못하면 못할수록 더 많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나에게 진정한 기쁨의 대상이 되는 그날을 허락하여 주시도록 끝까지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먼저 그들은 나의 기쁨의 대상이라고 고백하고 축복하기 바랍니다. 이미 기쁨의 대상이 나에게 되었기에 기쁨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기쁨의 대상이 되어질 것을 믿기에 기쁨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꾸 당신은 나의 기쁨입니다. 라고 말할 때 정말 나의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싶지 않아도 사랑한다 사모한다 고백할 때 그 웬수같은 누군가가 진짜 내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람 역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가파른 경사를 오르고 있었다. 
할머니 너무 힘이 드신지 애교 섞인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영감∼ 나좀 업어줘!” 할버지도 무지 힘들었지만 남자체면에 할 수 없이 업었다.
그런데 할머니 얄밉게 묻는다 “무거워?” 그러자 할아버지 담담한 목소리로 
“그럼∼ 무겁지! 얼굴 철판이지, 머리 돌이지, 간은 부었지.많이 무겁지!” 
그러다 할머니를 내려놓고 둘이 같이 걷다가 너무 지친 할아버지 
“할멈∼ 나두 좀 업어줘!” 
기가 막힌 할머니 그래도 할 수 없이 할아버지를 업는다. 
이 때 할아버지 약올리는 목소리로 “그래도 생각보다 가볍지?” 
할머니 찬찬히 자상한 목소리로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며, 
“그럼∼ 가볍지.머리 비었지, 허파에 바람들어갔지, 양심 없지, 싸가지 없지.너∼무 가볍지!” 

무거워도 가볍다고 가벼워도 무겁다고 해주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내가 먼저 서로에게 감사의 대상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내가 먼저 상대방의 감사의 대상이 되면 그 사람도 나에게 분명 감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우리는 바울이 도저히 기쁨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 어두침침하고 답답한 감옥속에서 어떻게 기뻐한다는 고백을 하며 또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는 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너희 즉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 때문에 기뻐할 수 없을 때 결국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기뻐할 수 없는 그 사람을 기뻐할 수 있게 될 수 있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옥죄고 있는 수 많은 답답함과 힘겨움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뿌리째 뽑아 내려고 불어대는 인생의 비바람과 폭풍우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오늘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의 날개, 감사의 날개로 비상함으로 그것을 초월하여 누릴 수 있는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감사와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정말 그랬기 때문일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았음에도 그렇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기도하고 고백함을 통하여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진정 그런 성도들이 될 수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나의 아내와 남편 우리의 자녀들과 우리 가족들 그리고 우리 이웃과 우리공동체의 지체들이 우리의 감사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내가 먼저 그들의 감사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내가 먼저 그들의 고백속에서 감사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을 먼저 사랑하고 섬기고 위하여 기도해줍시다. 그럴 때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진정 우리의 감사의 대상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그들 때문에 기쁘다고 말할 수 있게 할 주인공들로 서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어떤 어려움과 고난속에서도 어떤 사람들과의 힘겨운 관계와 어려움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함으로 그 모든 시련과 고난의 폭풍우를 뚫고 비상하게 되길, 기쁨을 상상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진정 나에게 기쁨이 되게 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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