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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멸망하지 말고 영생하십시오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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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하지 말고 영생하십시오 (요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005년 8월 19일 자 국민일보에 여의도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님과 온누리 교회 고 하용조 목사님의 대담 내용이 소개 된 적이 있는데, 그 기사에서 조용기 목사님은 자신은 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사치를 부릴 수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인생은 번지 점프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의 줄을 놓치면 죽고, 붙잡으면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폐결핵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시시각각 죽음의 위협을 받고 살았던 사람에게는, 사는 것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마치 번지 점프를 하는 사람이 밧줄을 꽉 붙잡는 것처럼, 예수님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조목사님과 함께 대담을 한 고 하용조 목사님은, 간암 수술을 6번이나 받고, 일주일에 세 번씩이나 혈액 투석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말하기를 “혈액투석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꼼짝없이 사로잡혔다는 생각이 듭니다. 덕분에 그동안 분주하면서 하지 못했던 진실 된 큐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건강한 몸을 가지고 살아있으니까, 이것저것 사치스런 생각을 하고 욕심을 부리지, 만일 암에라도 걸려 몇 달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은 시한부 목숨이라면, 사는 것보다 더 절박한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죽음에 직면해 보아야, 생명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고 김준곤 목사님은 그의 예수 칼럼 ‘나의 최대의 크리스천 체험’이란 글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두 살짜리 막내딸이 큰 화상을 입어, 병원 응급실에서 뜨겁고 숨이 막혀 눈이 뒤집히고 혀가 타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20% 밖에 살 가망이 없다고 했다. 내가 대신할 수만 있다면 열배 뜨거운 불에라도 뛰어들 수 있었다. 목숨을 열이라도 대신 주고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이렇듯 인생은 사랑하는 배우자,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 앞에 서보아야, 죽음이 얼마나 절망스러운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살이에 몰두하여, 죽음이 얼마나 절망적인 것인가를 모르고 사는 것만 같습니다. 죽음이 얼마나 절망스러운 것인가를 알아야, 목숨을 걸고 생명의 길을 찾아 나설 것인데,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처럼, 죽음이 얼마나 절망적인 것인지도 모르고, 죽음 이후 지옥의 고통과 형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모르는 인생들이 많은 것을 볼 때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더 비통한 일, 사별의 아픔보다 더 큰 슬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질병이 고통스럽고, 가난이 힘들고, 실연이 슬프다고 하더라도, 죽음보다 더한 슬픔, 죽음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단란한 가정이라도 죽음이 찾아오면, 그 가정의 행복은 깨어집니다. 아무리 금슬이 좋은 부부일지라도, 죽음이 찾아오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맙니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을 겪어본 사람만이, 죽음이 얼마나 비통한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압니다. 아직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별의 아픔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들은, 병원의 영안실이나 장례식장에 가보면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고 오열하는 유족들의 모습에서, 죽음이 얼마나 비통한 것인지를 간접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은 사람의 낯을 보지 않습니다. 죽음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달려듭니다. 죽음 앞에는 항의도 없고, 면제도 없고, 핑계도 없습니다. 칼 발트는 “사망은 멈추어!(Stop!) 하는 神의 명령이니, 우리는 불복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다윗왕은 임종 직전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라고 했고, 모세는 이 죽음을 가리켜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고 했습니다. 

2008년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 총계는 5688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루 동안에 155.835 명이 죽는 셈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아무리 큰 홍수가 몰려와도, 하루에 15만 명이 죽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죽음은 하루에 15만 명을 쓸어 갑니다. 그러니 죽음이란 것이 도대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그 15만 명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포함될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닥치는 필연적인 숙명이요, 저와 여러분에게도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 올 가장 확실한 사건입니다. 힘차게 뛰는 심장의 고동소리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 심장 뛰는 소리가 사실은 죽음을 재촉하는 장송 마치나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너무 염세적인 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입니다. 

인간은 그만큼 죽음과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과학 문명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화려한 문화가 꽃피워도, 인간을 이 죽음의 운명에서 구해 낼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강한 군왕이요, 천하가 벌벌 떠는 정복자라 할지라도, 죽음의 폭군 앞에서는 모두 아무런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힘없이 당해 버렸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찾아오면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많고 중요한 직책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전혀 사정이 참작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인생을 죽음 저편으로 끌고 가버립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하기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죽음의 때보다 더 불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죽음에는 형언할 수없는 슬픔과 비애가 수반됩니다. 사랑하는 처자와, 부모 형제, 얻은 지위, 쌓은 재물, 과거의 성공, 미래의 계획, 이 모든 것이 다 버리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죽음에 대한 가장 괴로운 사실 중의 하나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모두 내버려두고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망이 이기는 것도 많습니다. 사망이 돈을 이깁니다. 돈 많은 자도 죽습니다. 사망이 권세도 이깁니다. 권세 있는 자도 죽습니다. 사망이 과학을 이깁니다. 과학자도 의사도 죽습니다. 사망이 철학자도 이깁니다. 사망이 청년도 이기고, 장부도 이기고, 어린이도 이깁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오면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아무리 행복한 가정이라도 죽음이 찾아오면 깨어지고 맙니다. 

아무리 행복했던 순간이라도 죽음이 찾아오면 생의 그 아름답고 달콤했던 순간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누가 그 아름다웠던 날의 한 조각만이라도 가져다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애달파 했습니다. 그 때문에 죽음은 인간 최대의 원수요, 최후의 원수요, 원수 중의 원수입니다. 인간 중에 죽지 않는 자 누가 있습니까? 석가도 죽었습니다. 공자도 죽었습니다. 마호멧도 죽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어린이도 다 죽음 앞에서는 굴복했습니다. 

철학자 키엘케에골은 말하기를 “인생이란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감방에 갇혀 있다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날마다 사망의 위협을 받고 있고, 날마다 도처에서 사망의 슬픈 곡성이 들리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사실 인간이 가진 모든 불안의 근본 뿌리는 죽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을 집어삼키고도 만족할 줄 모르는 사망, 우리의 사랑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집어삼키는, 참으로 저주스럽고 철천지원수와 같은 것이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생을 꿈꾸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생이 이렇듯 사망과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면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사망의 폭군 아래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것도, 자녀들을 옆에 두고도 “이 자녀들이 잘못해서 혹 일찍 죽지나 않을까?”하는 불안감을 갖는 것도, 병원에 가서 암으로 혹은 어떤 치명적인 병으로 한 생명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볼 때, “나도 갑자기 저렇게 되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드는 것도, 우리가 다 죽음의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비참한 운명을 벗어나서, 죽음과 관계없는 영원한 삶을 살 수 없을까?”하는 생각을, 인간이면 누구나 한 번씩은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문제를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대답은 하나입니다. 그는 너무 무딘 사람이고, 너무나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덧없는 인생을 향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아기가 되어서 웃고 울 때는, 시간이 기어갔다. 내가 소년이 되어 꿈속에서 살며 좋아할 때는, 시간이 걸어갔다. 내가 이제 성인이 되자, 시간은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드디어 어느덧 내 머리가 반백이 되자, 시간은 날아갔다.” 

어떤 사람이 인생 70년을 하루 24시간으로 계산해 보았더니 너무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을 24시간으로 계산해 볼 때, 서른 살이면 1시 25분에 해당되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이미 점심시간이 끝난 때입니다. 내 나이 이제 겨우 서른이니까, 내 앞은 아직 창창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따지고 보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서른다섯쯤 되면 2시 59분, 3시가 다 되어 가고 저녁 준비를 생각해야 하는 때가 됩니다. 마흔이 넘어가면 4시 16분입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마흔다섯이면 5시 43분이 되고, 쉰 살이면 오후 7시입니다. 이제 곧 밤이 옵니다. 인생이 별 것 아닙니다. 쉰다섯쯤 되면 8시가 넘어갑니다. 예순이 되면 10시가 넘고, 일흔이 되면 ‘땡’하고 종이 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인간에게 종말이 오고 죽음이 찾아오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 시간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죽음이란 절대로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自然死나 好喪이란 말은 당치도 않는 말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이 지금처럼 비참하게 죽도록 하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생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기고, 인간 세계에는 일시에 죽음이 찾아오고, 모든 질병과 한숨과 고통과 눈물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보십시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들을 보십시오. 이렇듯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래서 죽음은 결코 자연 현상이 아닌, 하나님의 진노요 심판이요 저주인 것입니다. 

그러면 죄란 무엇일까요? 죄라고 하면 꼭 살인이나, 강도, 절도, 간음 같은 것만을 의미할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죄를 뜻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하말티아’(αμαρτια)라고 하는데, 이 ‘하말티아’란 말은 ‘표적에서 빗나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과 빗나간 말과, 행동과, 생각을 의미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만이 아니라, 악한 성품, 악한 마음과 생각까지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으로 얼마나 죄를 많이 짓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중에서 과연 누가 나는 죄가 하나도 없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요?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50보 100보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전쟁터에서 개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우렁차게 울리고, 백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때 기겁을 한 병사 하나가 정신없이 도망을 하여 100보쯤 가서 섰습니다. 또 한 병사는 50보쯤 도망친 후, 백보를 도망친 병사에게 겁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50보나 100보나 도망친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의 죄라고 하는 것 역시 이와 같습니다. 죄 속에 50보 들어간 것이나, 100보 들어간 것이나, 죄에 빠진 것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남과 비교하여 나는 죄 없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모두 50보 100보 차이의 죄인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모독하는 죄를 하나 더 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몇 가지나 될까요?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은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죄는 그보다 적습니까?

우리는 가끔 국회의 청문회라는 것을 보면서,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국회의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만일 하나님이 나를 세워놓고 털기 시작하면 내가 어떻게 될까? 사탄은 옆에서 우리의 숨은 죄들을 다 밝히며 고자질을 할 텐데, 하나님 앞에서 내가 청문회 식으로 죄의 추궁을 받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무슨 토지 투기를 했다, 위장 전입을 했다는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죄가 다 노출될 텐데,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그러면 죄의 대가, 죄의 형벌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말씀하기를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으며,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한 번 죽으면 그만이다’ ‘죽으면 다 끝이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리에 속아 넘어가면 절대로 안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사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전 12:14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고, 계 21:8에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사후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영원한 지옥 형벌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1)지옥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된 곳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조차 없는 곳입니다. 2)마귀와 귀신들과 각종 악한 무리들과 함께 지내는 곳입니다. 가장 악하고, 가장 추하고 더러운, 가장 잔인한 살인마들과 함께 지내는 곳입니다. 땅에서는 제아무리 예의 바르고, 고상하고 친절한 사람,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이런 악한 무리들과 영원히 함께 지내야만 하는 곳입니다. 3)지옥은 소망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소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근본적인 원동력입니다. 병이 들면 낫게 될 소망을 갖고, 가난하면 더 나아질 소망을 갖고 살게 됩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털끝만한 소망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자살할 소망마저도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단테는 그의 신곡 지옥 편에서 “이곳으로 들어가는 자여 모든 희망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불로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곳, 죽고 싶어도 죽을 수조차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영원토록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죄와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받을 길이 없을까요? 여기에 그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 한 절만 바로 알고 믿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이 됩니다. 그만큼 중요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미국의 휴스턴 시에서 대 집회를 인도하며 요 3:16을 가지고 설교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이 설교를 할 때는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들을 때, 이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듣는 설교인 것처럼 들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내일을 아무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믿으면 영원히 사는 자가 될 것이고, 이 말씀을 듣고 믿지 않으면 영원히 불행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지막 설교를 하는 것처럼 하고, 여러분은 마지막 듣는 설교인 것처럼 겸허하게, 하나님이 보낸 심부름꾼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자세로, 요 3:16 말씀을 전하고 듣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병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 죄인에게는 의인이 필요하고,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구주가 필요합니다. 죄인에 대한 이 같은 필요성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사흘만인 주일 새벽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죄를 용서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죽음이 찾아 왔을 때, 여러분의 영혼은 하늘나라로 영접을 받게 됩니다. 거기서 세세무궁토록 영원히 복되고 즐겁게 삽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미국의 모든 시민의 가슴을 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신앙의 도전을 주었던 한 어린 소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어린 소년의 이름은 라이언 화이트였습니다. 라이언은 13살 때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았는데, 수혈을 잘못해서 그만 에이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어른들의 부주의로, 소년의 인생은 이제 죽음의 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변함없이 너무나 밝게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하였고, 그를 염려하는 부모님을 오히려 위로하면서 기쁘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신문 기자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소년의 이야기는 매일 신문에 게재되었고, 텔레비전에도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 마이클 잭슨 등 유명 인사들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가 선물도 주고 위로하며 관심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후 라이언은 5년 동안 살다가 결국 18살에 죽었습니다. 소년이 죽기 전에 그의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내용이 한 크리스천 잡지에 실렸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는 아빠가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아빠, 전 지금까지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아무도 아빠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없어요. 아빠는 저에게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는 티켓을 선물로 주셨잖아요. 바로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아빠 때문에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선물로 얻었는걸요. 이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을 거예요.” 그렇습니다. 시시각각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인생들에게, 영생의 선물보다 귀한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다 같이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영생보다 귀한 선물은 없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에 두 명의 젊은이가 타락하기를 작정하고 도박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도박장 바로 옆에는,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도박장으로 들어가던 두 청년 중 한 명은, 교회 입구에 적혀있던 그 주일의 설교 제목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글귀를 보자 그 청년의 마음에 갑자기 죄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친구에게 “야, 우리 오늘 도박장에 가지 말고 교회에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친구는 “한 번 결심을 했으면 가야지. 교회라니 무슨 소리야?”라며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결국 한 청년은 처음 결심한 대로 도박장으로 갔고, 다른 청년은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청년은, 설교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때 회심한 청년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유명한 클리블랜드 대통령입니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는 그 순간, 30년 전 도박장을 선택했던 친구는 감옥에서 자신의 친구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친구의 대통령 취임 소식을 듣고, 가슴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한 순간의 선택이, 자신들의 삶을 얼마나 다르게 만들었는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상품 광고에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내용이 있지만, 우리 인생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영원이 좌우됩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그의 친구가 도박장과 교회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 여러분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옆 사람에게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영생, 얻고 봐야지요!”

“2001년 첫 영업일에 이 광고 전단을 가져오시면 10년간 기다려주신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드립니다.” 2001년 1월 2일 일본 오카 다야 모이즈 백화점의 요코하마, 가와사키 두 곳 점포에는 이 같은 문구가 쓰인 광고 전단을 들고 온 사람들로 붐볐다고 합니다. 이 전단은 10년 전인 1991년 백화점 측이 신문의 신년호에 끼워 돌린 광고 전단 문구였습니다. 

이 날 10년 전의 약속을 기다리며, 두 곳의 백화점을 찾은 사람은 모두 12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백화점 측은 전단을 들고 온 고객들에게, 약속대로 그림접시 시계를 선물했으나, 준비했던 선물이 동나자 나중에 우편으로 보내 주기로 다시 약속하고, 대신 1000엔짜리 상품권과 과자를 사과의 뜻으로 선물했다고 합니다. 전단을 들고 온 고객 가운데는 약속된 날짜를 잊지 않기 위해 ‘액자에 넣어 보관해 왔다’ ‘주방에 붙여놓고 매일 쳐다봤다’ ‘수첩에 넣어 들고 다녔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일개 백화점에서 상술로 한 약속도 굳게 믿고, 10년을 하루같이 광고 전단을 간직하며 살았다고 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결코 식언치 않으십니다. 한 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시는, 그래서 그 이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어서, 언젠가 여러분의 최후 순간이 찾아올 때 하늘나라로 영접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오늘 해피데이 주일에 저희 교회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서, 언젠가 여러분에게 이 땅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올 때, 지옥의 멸망으로 떨어지지 않고, 하늘나라에서 영생복락을 세세무궁토록 누리며 살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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