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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에 보답하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시 1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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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에 보답하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시 116:12)

(시 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어떤 사람이 '베리'라고 하는 개를 기르면서 자기의 외동딸처럼 사랑해 주었습니다. 수시로 고기도 사 먹이고 따뜻한 물로 목욕도 시켜주고, 어디를 가든지 꼭 이 '베리'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개의 주인은 '베리'를 친아들처럼  친딸처럼 사랑했습니다. 비록 한낱 짐승에 불과한 개이지만 주인의 그 사랑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몹쓸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주인이 죽자 가장 마음 아파한 것은 가족들이 아니라 주인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베리'라고 하는 개였습니다. '베리'는 주인의 죽음을 알아차리고는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줄을 몰라 안타깝게 마당만 뱅뱅 돌뿐이었습니다. 

장례가 치러지고 상여가 동구 밖으로 나가던 날, '베리'는 가족들 뒤를 힘없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병들어 아무 것도 먹지 못할 때부터 '베리'도 아무 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시신이 교회 공동 묘지에 묻히고, 무덤 만드는 일을 다 마치고도 가족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는데, 유독 개인 '베리'만은 주인의 무덤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가족들이 '베리'를 데리고 가려고 목에 맨 줄을 끌어도 '베리'는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베리'를 무덤 곁에 놔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밤이 되면 돌아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가족들은 '베리'를 놔두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베리'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베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해서 무덤엘 찾아갔더니 여전히 '베리'는 주인의 무덤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주인의 가족들이 와도 반가워하지 않았고, 가져온 음식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3

일째 되던 날부터 '베리'는 음식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베리'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주인의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겨울의 추운 바람이 매섭게 불어도 '베리'는 여전히 주인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낸 시간이 무려 14년이나 되었습니다. 

주인이 죽은 날부터 꼬박 14년 동안 개는 자기 주인의 무덤을 떠나지 않고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개도 점점 늙어가고 힘이 빠져 야위어져 가더니 마침내 주인의 무덤 앞에서 죽었고 말았습니다. 

주인의 아들들은 은혜를 잊지 않는 개의 죽음을 심히 슬퍼하며 아버지의 무덤 옆에 나란히 개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개의 비석도 하나 조촐하게 세우고는 거기에다 "충성된 개, '베리'가 여기 잠들다"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다윗은 참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왔습니다. 젊은 날 죽을 것 같은 위기의 순간도 지났고, 억울함과 안타까움에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그의 삶의 자리를 가득 채우고 들어오는 일들은 그의 인생을 힘들게 하고, 울게 했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서있는 자리는 광야였고 황무지였습니다. 생명을 노래할 수 없고, 도무지 내일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그를 죽이려는 대적들의 칼이 번득이는 곳이었고, 배신자들의 음흉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힘이 들어 이를 악물고 도망을 해야 했고, 그곳은 미래가 없고 쉼이 없던 그런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픔의 자리에도 어김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위로가 감싸고 있었기에 그의 삶 전부를 흔들고 들어오는 아픔의 시간,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찬양과 기도로 이겨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픔의 시간을 믿음으로 이겨낸 목동이었던 그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던 그 나라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아올 수도 없는 놀라운 복된 자리에 세워 주셨습니다.
성읍도 견고하게 세워 주셨고, 돕는 손길까지 허락하셔서 백향목 왕궁도 세워졌습니다. 가정도 견고하게 세워지기 시작하고, 외국과의 온갖 교역과 외교관계도 견고하게 세워 주셨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도 평정되었습니다.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졌던 나라도 평정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던 나라도 평정되고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레서 그 모든 것이 견고하게 세워지던 시간 그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시온 성에 모셔 들입니다. 그날 그는 얼마나 기뻤던지, 얼마나 감격했던지.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떨리는 감격으로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왕궁에 들어오던 날 그는 감격하며 춤을 추었고 찬양을 했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을 동원하여 언약궤를 들이던 날의 감격을 다윗은 평생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온땅을 다스리시고 그의 인생을 다스려 주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행복한 순간을 지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베풀어 주신 수만 가지 은혜를 잊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한 교회에 부임하여 부임 심방을 하는데 어느 집사님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벽에 보니까 아이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해서 상장을 가득 걸어 두었습니다. 목사님은 "아들이 공부를 참 잘하네요" "예, 우리 아이는 머리가 비상합니다" 목사님이 또 집사님 얼굴을 쳐다보면서 "집사님은 참 미인이십니다" 하니까 그 집사님이 "예, 저의 친정어머니가 예뻐서 저도 예뻐요"라고 합니다. 목사님은 또 "가구가 참 좋네요. 텔레비젼도 오디오도 아주 좋은 것 갖고 계시네요" 하니까 그 집사님이 "예, 저의 남편이 돈을 잘 벌어서 괜찮은 가구를 들였어요"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건드려도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지요"라는 말이 안나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좋은 머리가 무슨 소용 있으며, 예쁜 얼굴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그 날로 무너지는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한번 고백해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도망 다녀야했던 그 시간이, 분노와 억울함, 절망감과 자괴감으로 채울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믿음의 고백으로 자신의 인생을 채우고, 감사로 채웠습니다. 하나님을 오히려 더욱 사모하는 믿음으로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 답답함의 시간에도 그는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고 왕궁에 세워졌는데 그가 어찌 잊겠습니까? 어떻게 그 은혜를 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는 왕궁을 거닐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다 보답할 수 있을까?(시 116)

왕과 우의정이 세상 물정을 알아보려고 평민 복장을 하고 민정시찰에 나섰다답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저녁 식사도 하고 사람들의 민심도 읽기 위해서 한 주막으로 갔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우의정이 왕에게 말했습니다.“폐하, 들켰사옵니다.”“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우의정은 주막 기둥에 적혀 있는 글을 가리켰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손님은 왕이다.”
왕과 우의정은 벽에 쓰인 글짜를 보고 알았으나 다윗은 벽에 쓰인 글귀를 보고 알아본 것이 아니라, 곧 바로 하나님을 알아봅니다.

억울함과 슬픔과 답답함으로 살던 시간에만 하나님을 알아본 것이 아니라 왕궁에서도 하나님을 바로 알아봅니다. 왕이 된 자리에서도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봅니다.
그러한 다윗이기에 왕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주신‘은혜를 어떻게 보답할수 있을까?’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 성까지는 10km도 안 되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먼 거리를 달려왔습니까?
목동이던 그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어떻게 왕이 되어 이곳에 설 수 있었겠습니까?
그 험한 세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다윗은 그날 그 은혜에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시인은 삶의 정확한 푯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라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삶의 열정이 진정한 의미에서 바른 삶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삶의 목적들은 비록 그것을 성취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한낱 일시적, 제한적 성취로서 인생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라지는 허무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눅 12:13-21).

또한 사람들은 탐욕으로 인하여 어떠한 결과에도 만족함 없이 계속적으로 불만과 불평으로 평안한 삶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삶의 행위들은 어느 것 하나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모두가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20)고 촉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 수훈 중에도 하나님의 상급에 대한 언급이 8번씩이나 있었음을 상기해 볼 때(마 5-7장), 우리의 삶은 진정으로 모든 관심을 하늘에 두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후 고민하는 데 하나님께 대한 그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몰라 애태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고민이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까를 고민하며 살아간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는 이와 같은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갖게 됩니다.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할 때 우리에게 올바른 삶의 방향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던 다윗이 생각해 낸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해진 예배 처소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라서 “지금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처소를 세울 때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이 나라의 중심 사역으로 삼겠다.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오는 성소를 세우리라. 그리고 그곳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감격할 그런 성소를 세우리라.”고 다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한 일을 멀리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시온 성에 들어왔고, 이제 언약궤를 위한 성소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함께 모여 예배하고 찬양할 그런 자리를 세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기도하고 숙고하던 그 일을 위해 선지자이자 멘토인 나단을 불러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과 계획을 듣고 나단도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왕이시여,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셨습니까? 어떻게 그런 마음을 다 가지셨습니까? 그것은 기도해 볼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왕이여, 마음에 있는 그것을 속히 행하시옵소서.”흥분하여 외치는 선지자의 외침은 얼마나 용기를 실어 주었겠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흐뭇하고 기뻤겠습니까? 다윗은 기쁨으로 그 일을 착수할 계획을 세워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 땅에 거룩한 예배 처소를 세우리라. 영원히 왕이 되시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임을,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왕이심을 온 땅에, 온 백성들의 가슴에 선포하리라.”

감격하며 다윗은 그 일을 궁리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왕이시다.” 
다윗이 그것을 온 땅에 선포하고 드러낼 성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은혜를 덧입혀 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에게는 이제 집이 있는데,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은 그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내일 아침 책임자를 세우고 감독자를 세워 이 일을 바로 시작할 계획에 행복한 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 서둘러 입궁한 나단을 대했을 때 그의 모든 행복은 깨뜨려지고 말았습니다. 밤새 그 일을 놓고 기도했던 나단이 찾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 밤에 나단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다윗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진심과 정성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많이 힘들어하는가요? 나단은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와서는 건축허가를 취소하고 있습니다. 기도 없이 판단했던 선한 의도가 낮 시간에는 아주 훌륭해 보였지만 이제 아주 부적절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나단이 선한 일에 재를 뿌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아니 하루 만에 그렇게 말을 바꾸면 어떻게 하는가? 그것이 왜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서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겠느냐? 그럴 필요 없다.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고 있다. 내가 여기에 형성하고 있는 왕궁은 네가 나를 위하여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를 통해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건축하고 있는 것이지 네가 아니다. 네가 건축을 시작해서 목수와 일꾼을 동원하게 되면 그들은 네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할 것이고, 내가 하고 있는 것에는 무관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선 다윗이 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의 주권을 세워야 할 때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은 나의 주권을 세울 시간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이고, 내가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윗이 고백해야 했고,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이 온 가슴으로 함께 고백해야 했습니다.

“잊어버려라. 내가 너를 위해서 집을 세워 줄 것이다. 나는 네가 나를 위해 하는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통해서 이 나라를 세우는 중이다. 집을 세우는 것은 나다. 이 백성을 세우는 것은 나다. 다윗아, 너는 이 사건을 통해 그 고백을 배워라.”

하나님은 다윗의 헌신을 거절하고 다윗의 아름다운 마음과 그 맑은 정성을 거부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새로운 고백을 담아 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다!”
하나님은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운 마음은 다 받으셨습니다.   

그 마음만 받으시고 오히려 복으로 채워 돌려보내십니다.“내가 네 왕국을 견고케 하리라. 영원토록 인도하리라.” 때가 되면 네 아들이 그 일을 수행하게 될 것까지 예언해 주시며, 오히려 다윗의 그 예쁜 마음을 받으시고 복으로 덧입혀 주십니다. 그러므로 거절이 아니라 큰 복으로 채우신 일이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메시지에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무엇을 해 오셨고, 앞으로 무엇을 하실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윗은 그 말씀을 들으며 거절당하는 서운한 마음 대신에 은혜에 대한 감격과 고백으로 더 충만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시간에도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이야기는 무엇으로 채우고 있습니까?

캐나다 에드몬튼에 어느 권사님은 한국에서 캐나다 대사관에서 일했었는데 나이가 차도록 아기가 없어서 양녀를 두었습니다. 캐나다로 이민 가서 딸아이가 고등학교 갈 때까지 양녀 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가 말했더니 큰 충격을 받고 반항해서 고생을 많이 했고 거의 집에도 안 오고 벤쿠버에 있는 학교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차 사고가 나서 의식을 잃게 되고 거의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의사는 아무래도 소생할 가능성이 없으니 공연히 환자만 더 오래 고생시키지 말고 산소 호흡기를 뽑아 편히 보내드리는 것이 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 되는 분도 동의했는데 벤쿠버에서 어머니 사고 소식을 듣고 쫓아온 딸이 극구 반대합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24시간 간호하고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하는 것 외에는 누구도 출입하지 않게 하고 간호했는데 이 어머니가 열흘만에 의식이 회복되기 시작해서 한달 만에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담당 의사선생님 말씀이 이것은 따님의 정성과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권사님은 "내가 산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내 여생은 캐나디안 인디언 전도를 위해서 바치려 합니다." 하셨다합니다.(박조준목사설교)

오늘날 우리 주위에 만연하고 있는 사상 중에서 가장 인간 사회를 메마르게 하는 것은 '개인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들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인격적이며, 인간의 개인적 가치를 존중해 준다는 의미에서는 옳은 사상인 듯하기도 하나 이러한 긍정적인 요소보다 부정적인 측면이 더 많이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인해 인간 각 개인마다의 주장이 너무나 상이하고 모든 관계에 대해 폐쇄적이며 모든 권위에 대해서 부정적이며 그래서 심지어는 부모의 권위마저 위태롭게 되어 가족 간의 따뜻한 사랑이 식어져 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인간 자신의 개인적 가치를 존중하고자 하는 결과라고 볼 때 이러한 사상은 그러한 숭고한 목적과는 달리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된 주의는 커다란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들 합니다. 즉 자신의 가치를 타인과 비교함으로써 찾고자 하는데 그 모순이 있다합니다. 

자기 자신의 외모를 타인과 비교하고 자기의 능력과 생활환경 및 심지어 가족까지도 타인의 그것과 비교하여 가치 기준을 설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열등의식과 불평, 불만 등으로 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이 없이 불행하게 삶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심한 경우 삶을 포기하는 무서운 결과까지 초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개인주의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못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은 이름난 상담가였습니다. 어느 날 52살 된 한 중년 신사가 눈빛이 흐리고 초췌한 모습으로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목사님은 잠잠히 물었습니다. ‘어쩐 일이십니까?’‘저는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좌절했고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마지막 상담 하고 내 인생을 정리하려고 왔습니다.’‘그렇게 다 잃어 버렸습니까?’‘예, 한때 잘 나가다가 경제 공황으로 인해서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목사님은 그를 안심시키고 조용히 이런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선생님, 정말 아무것도 없으십니까’ ‘없습니다.’‘그러면 한번 찾아보시죠.’‘찾아보다니요. 정말 아무것도 없다니까요.’‘그러면 내가 찾겠습니다. 선생님에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습니까?’‘예, 30년 같이 산 아내가 있습니다.’‘소중한 분이군요’‘또 묻겠습니다. 선생님에게 자녀가 몇이나 있습니까?’‘예, 착하게 자라고 있는 삼남매가 있습니다.’‘아, 참으로 귀중한 보화들이군요’‘또 묻겠습니다. 선생님은 친구가 있는지요.’‘예, 제가 비록 망하긴 했지만 의리 있는 친구가 몇이 있습니다.’‘아 그래요, 세상에 보기 드문 사람들이군요’‘또 묻겠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큰 질병 없이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참으로 다행한 일이군요’‘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을 믿습니까?’‘예 믿습니다.’‘아! 선생님은 엄청난 것을 가지고 있군요. 선생님이 지금까지 잃어버린 것하고, 지금 있다고 고백한 것 가운데서 어느 것이 더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그때 처음으로 그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목사님, 제게 참 보화가 많이 있군요. 이제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눈동자가 흐릿하며 좌절감에서 찾아왔던 그가 돌아갈 때는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갔는데, 10년 후에 그 인생은 완전히 성공적인 사람으로 바꾸어졌다고 합니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가치 기준은 바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을 외면하기 때문에 올바른 인간의 자아 형성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가치 기준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발견한 자기 자신의 가치는 '성도'라는 것입니다.

(시 116: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종'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시인은 그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시 116:18-19)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

서원은 반드시 갚아야 할 빚입니다. 그러나 그는 채무자처럼 빚을 갚는데 옹색하거나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개적으로 그것을 약속했습니다.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그는 서원을 이행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정직히 행할 것을 결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이와 같이 모든 면에 있어서 정직하게 살기를 원하며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인도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 본부 벽에는 이러한 시가 붙어 있다합니다. “당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세상과 나누라. 언제나 부족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것을 세상에 주라.”
캘커타의 빈민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그 사람들은 물질로는 언제나 부족함 가운데에서 살고는 있지만, 사랑의 가슴으로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최고의 것이었고, 그들의 필요를 다 채우지는 못하지만 최고의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엄청난 것을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나누기 위해 빈민들이 힘겹게 삶을 이어가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그 참혹한 삶의 현장을 다 바꿀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사랑의 가슴으로 그곳을 덮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여성 한 분이 혼자되어 살면서 아들 하나를 길렀는데, 장성하여 군대를 마치고 오더니만 취직할 터이니 용돈을 달라고 하더랍니다. '야 이 녀석아 제대를 하고서도 용돈이냐?' 하면서 몇 푼을 주었더니, 정말 취직을 하여 직장으로부터 첫 월급을 받았는데 그걸 송두리째 가지고 와서 '어머니 이것이 저의 첫 월급입니다' 하며 내놓는데, 그걸 받은 과부 어머니의 마음이 어찌나 기쁘고 감격스러운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너무도 고마운 마음에 그 아들을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이것저것 사주다가 보니, 봉급의 갑절을 더 쓰면서도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이러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물질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 은혜를 깨닫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물을 바치면서 예배할 때에, 갑절뿐만 아니라 영육간에 수천 수만 배로 복 주시기를 원하여 감사를 요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보답하는 좋은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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