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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루살렘을 위하여 (시 122:5-9) -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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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위하여 (시 122:5-9)

이씨 조선의 시조 이성계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 중에 무학대사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아는 것이 없다 하여 무학(無學)대사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이성계가 농담을 걸었습니다. “내가 오늘 스님을 보니 꼭 돼지 같이 생겼습니다.”라고 하자, 스님을 껄껄 웃으면서 “제가 오늘 임금님을 뵈오니 부처님처럼 보입니다.” 이성계는 기분이 좋아 “허허 그렇습니까? 그런데 대사께서는 내가 돼지 같다고 해도 화가 나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화가 나다니요. 기쁠 뿐입니다.” 무학대사는 허허 웃으면서 “돼지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처님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무엇으로 보입니까? 언젠가 성도 집에 심방갔더니 꼬마가 먼저 보고 “엄마! 목사님 왔다!” “어떤 목사님?” 뚱돼지 목사님 그랬습니다.

󰊱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9절)라는 말씀을 “교회를 위하여”라고 바꿔 읽어도 좋습니다. 성도들은 교회를 위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위하는게 아니라 해치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교회를 불신자가 와서 해칩니까? 교인이 교회를 해칩니다. 
  
“교회를 위하여”란 교회를 생각하고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고 잘되게 하는 것입니다. 의복이 몸을 위해 있고, 음식이 사람의 몸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유는 음식이 사람을 병들게 하고 음식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있어야할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이야기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제사장의 의상을 그토록 섬세하게 말씀하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너는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을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띠를 만들며 그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되,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며”(출28:40-41)
  
제사장들을 위하여 속옷을, 위하여 띠를, 위하여 관을 만들라 “위하여”를 반복합니다.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행할 수 있도록 위해 주셔야 합니다. 목회를 돕는 일이 교회를 위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목사가 목회 사역을 잘 행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합니다. 
천주교회는 신부님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여깁니다. 신부님이 고소를 당해도 신부님은 절대로 법정에 나가지 않고 대리인을 보냅니다. 그 신성과 품위를 지켜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9절) 
  
목사 하나가 망가지면 그가 목회하는 교회가 망가집니다. 종려나무를 죽이려면 “키파”라는 꼭지점을 꺾어 버리면 됩니다. 
교회를 위하는 것은 목자를 위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방해하면서 교회를 위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십시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갈6:6-7). 
 
  
󰊲 평안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이라는 말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평안의 도시가 평안하기를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을 글자대로 해석하면 “살렘을 소유 한 곳” 입니다. 예루살렘의 히브리어 형태는 “예루-샬라임”입니다. 샬라임은 평안입니다. 평안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며 예루살렘은 “평안의 비전”을 뜻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평안해야 합니다. “평안을 구하라” 교회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하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형통하다는 말은 안전하다, 평온하다는 뜻입니다. 평온하고 번영하는 것을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교회의 평안을 사모합니다.  
  
“살렘”은 히브리어로 “평안” 이고 형통은 히브리어로 “샬바”입니다. 평안과 형통을 구하기 바랍니다. 아랍인들은 “샬람”하고 인사합니다. 유대인들은 “샬롬”하고 인사합니다. 평안하심을 비는 인사입니다. 
살렘이란 말 앞에 예루라는 말을 붙여 “예루살렘”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란 “평안을 둘러싼 도시” “영원한 하늘의 집”을 의미합니다.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잠16:28) 다툼을 일으키는 자는 평안을 위하는 자가 아닙니다.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사람은 예루살렘을 위하는 자가 아닙니다. 언제나 평안을 끼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필수요소는 평안입니다. 다툼과 의심과 파당과 분열은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그것이 바로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입니다.
  
“네 성안에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7절) 

성벽은 오랑캐를 막는 방어벽입니다. 교회는 벽이 필요 없지만 평안을 지키는 벽은 꼭 필요합니다. 
  
평안은 형통을, 불화는 고통을 몰고 옵니다. 교회는 평안이 깨지면 반드시 무너집니다. 내부의 일치가 없으면 원수마귀가 공격을 합니다. 마귀는 오늘도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닙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는 모여듭니다.  
  
“교회가 평안해야 든든히 서가고 성령의 위로 진행해야 수가 더 많아집니다”(행9:31) 

교회의 구성 요소는 폭풍 같은 논쟁이 아니라 조용한 순종입니다. 수군수군 하는 헐뜯음이 아니라 소곤소곤하는 교제입니다. 교회는 평안의 처소여야 합니다. 교회는 평안을 구하고 평안을 받아 누려야 하고 평안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의 복은 평안과 형통입니다. 이 복을 받는 길은 성령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평안과 형통을 얻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를 기뻐하며 형통하시기 바랍니다.   

  
󰊳 복받기 위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아브라함에게 부의 공식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멜기세덱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히7:1-4)
  
멜기세덱은 성서 연구가들에게 지대한 관심의 대상입니다. 그는 신비한 인물입니다. 의의왕, 살렘왕, 하나님의 아들과 닮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멜기세덱이 살렘왕이라는 사실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전설에 의하면 멜기세덱은 바벨론에서 지혜학교를 운영했고 아브라함은 그 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살렘왕에게서 부의 원리를 배운 것입니다. 부의 원리가 십일조입니다.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드렸고 부를 누렸습니다.
   
살렘salem이란 평화, 번영, 완전함의 장소라는 뜻입니다. 살렘은 훗날 예루살렘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예루살렘은 “물질의 영토”라는 뜻이 있습니다. 살렘왕 멜기세덱은 물질의 영토를 다스리는 자입니다. 그는 물질의 풍부함을 일으키는 왕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고 돌아올 때 살렘왕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빵과 포도주를 제공하고 축복했습니다.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내 몸이다” “내 피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빵과 그 포도주는 신비의 백만장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신비의 백만 장자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살렘왕이 아브라함에게 제공한 빵과 포도주는 풍부한 아이디어와 성공의 토대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살렘왕이 주는 풍부함과 부의 원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사람들입니다. 
고대 바벨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든 것은 지속적인 십일조의 실천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가난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부의 증가를 경험하게 합니다. 
  
어떤 사업가는 자기가 크게 번성한 비결을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는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은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십일조를 하면 부유해진다는 약속입니다. 성공 원리가 성공하게 하고 성공이 또 다른 성공을 불러들입니다. 살렘왕을 여러분의 왕으로 삼으시고 십일조를 바치고 복을 받은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아 풍부한 삶을 누리기 바랍니다.

평안과 형통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평안이 원인이고 형통이 결과입니다. 
평안이 있어야 형통이 있습니다. 평안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 하리로라” 

평화를 사랑하여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형통하시기 바랍니다.
살렘왕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께 십일조를 드려 물질의 영토를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아등바등 살지 않고 풍부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평안이 있고 여러분의 집에 형통이 있기 바랍니다. 형제들에게 친구들에게도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평안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거든 여러분은 저에게 “목사님에게도 평안이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3)

“네 성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7절)
  
형통은 평안에서 옵니다. 평안이 있고 형통이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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