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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솟아나는 샘처럼 (요 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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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아나는 샘처럼
요한복음 2:13-22,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당시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이자 비텐베르크에 있던 어거스틴 수도회의 신실한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지, 494주년(2011년 현재)이 되는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세계역사에서 아주 의미 있는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단지 Protestant, 곧 미사보다도 복음과 성경말씀을 중시하는 개신교회가 생겨났다는 것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해서, 근대국가로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그런 과정에서 인권신장과 민주주의로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종교개혁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중세의 주술적인 신앙에서부터 복음적인 신앙으로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 ‘종교개혁의 정신’자체입니다. 역사와 종교 그리고 인간에 속한 모든 것은 계속 개혁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종교개혁이란 과정을 통해서 역사 속에 뚜렷한 흔적으로 남겼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종교개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종교개혁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종교개혁’이란 큰 부분으로 표현한다면 ‘변화’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에서 말하는 변화는 단지 새로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겸손하게 본질로돌아가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마탄 루터와 다른 많은 종교ㅛ개혁자들이 말한 종교개혁이란, 새로운 신앙을 만들고자 하는 변화가 아닙니다. 믿음생활에서 교황이나 사제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주인 노릇을 하는 잘못된 종교현상 때문에 파생된 수많은 부조리를, 다시 믿음의 본질을 이루는 복음,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서, 본래적인 복음적인 믿음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개혁은 사람중심의 신앙생활, 마술적인 믿음생활에서 벗어나서, 목회자들이 겸손히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회복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나오자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사제들의 모든 탐욕을 버리고 정결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실행되는 교회를 이루어보자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자의 진정한 관심사였고,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사람이 먹는 생수는, 대부분, 하늘에서 내린 빗물이 땅으로 들어가서,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난후에 샘물이 되어 지상으로 나올 때 영양가도 있고, 맛도 있는 특별한 생수가 됩니다. 하늘에서 내린 빗물을 바로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 빗물이 땅 속으로 들어가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지하수가 되어서 여러 곳을 지나오면서, 자동적으로 정화가 되고, 또 지하에 있는 특별한 물질을 물에 품게 될 때에, 인간이 마시면 여러 가지로 유용한 맑고 깨끗한 생수가 됩니다. 빗물이 지하로 흘러 들어가지 않고, 지표면으로만 흐른다면, 그 물은 태양 빛과 건조한 바람에 금시 말라버리거나,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물은 인간이 마실 수 있는 생수가 도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지표면에 있는 온갖 오염된 물질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좋은 생수란 지표수가 땅 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가면서, 정수의 과정을 거치고, 지하로 흐르면서 사람에게 좋은 성분의 미네랄을 함유하게 되어가지고, 밖으로 분출될 때, 모든 사람이 마시고 싶어하는 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한 번 이런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으로써, 남이 볼 때에 마치 ‘에비앙 생수’처럼 그렇게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셨는지요? 어떻게 해야만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이웃에게 ’저 사람은 비록 예수를 믿는 사람일지라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다.‘라고 인정을 받을 수가 있으며, 하나님께도 그런 인정을 받으며 살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그리스도인은 항상 진지하게 생각을 하고, 그런 삶을 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만 합니다. 

정말이지 그런 삶을 살자면, 먼저 생수를 뿜어내는 샘물처럼, 모든 사람이 전혀 여러분을 기억해주지 못하는 지하수의 시절을 잘 참고 견뎌내야만 합니다. 땅 속 깊은 곳까지 흘러들어가야만 합니다. 아주 낮은 곳까지 내려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지하수맥으로 흘러가면서 자기를 정화하고, 자연스럽게 좋은 광물질을 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변화가 된 후에야 샘물이 되어서, 지상으로 솟아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으로 돌아가서 자기를 먼저 변화시켜야만, 남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생수가 되고, 개혁이라는 역사를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언제나 성령의 은혜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져야만 한다고 당신이 전도한 사람들에게 쉬임없이 권고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습관과 생활방식 등과 같은 것을, 그냥 그대로 지표면으로 흘러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땅 속 깊이 내려 보내서, 깨끗하게 정화를 한 후에, 다시 지표면으로 나와서, 분출하는 좋은 샘물같이, 여러분도 보이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서, 복음과 성령으로 정화되고, 새롭게 만들어진 후에, 교회로 세상으로 다시 나와서 교회와 세상에 마치 생수처럼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삶이 그렇게 되어질 때에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생활을 감당하게 되고, 생명력을 가진 생활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이 시간부터 그런 삶을 감당하기 위하여 오직 말씀과 그리스도 예수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살 뿐만 아니라 자기 정화를 위하여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자, 그러면 마치 생수와 같은 삶을 위해서는 어떨게 해야 하겠습니까? 본문 요한복음 2:13-22의 말씀을 중심으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면 항상 물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가) 나는 지금 바로 가고 있는가? 
나)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 예수와 말씀 앞에서 옳게 행동하고 있는가? 
라) ‘내가 지금 주님 앞에서 옳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라고 항상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겸손하게 자문을 해야만 합니다. 만일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이 없으면, 여러분은 대부분이 스스로에게 속고, 세상에게 속고 맙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아주 잘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본문의 내옹은 이렇습니다. 유월절이 되어서 예수님과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이 지켜야만 하는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정들은 모두 유월절 절기에는 야훼 하나님 앞으로 나가서 하나님께 자신을 보보여야만 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에는 팔레스타인 전역뿐만 아니라 멀리 타국에 나가 있는 유대인 장정들 까지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모여드는 그런 절기입니다. 

성전에 도착을 한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가지 않고, 각자의 삶의 수준에 맡게 소나 양, 염소, 비둘기 중에서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고, 일종의 인두세인 성전세를 냈습니다. 예수님도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성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성전개혁을 단행하신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기에는 아무리 합법적인 것이라도, 성전 안에서 순례객과 제물을 파는 상인과 환전상이 뒤엉켜서 장사하는 모습을 보자,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점을 보고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지성소와 성소, 성전 뜰로 나뉩니다. 성소와 지성소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장소이고, 일반인은 성전 뜰에서 예배에 참여하는데, 그리고 이 성전 뜰은 네 개의 뜰로 나뉩니다. (1) 이방인의 뜰이고, (2) 여인의 뜰이고, (3) 이스라엘의 뜰이고, (4) 제사장의 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매매 행위가 행해지는 곳은 바로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방인은 아무리 신실해도 이스라엘의 회중으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이방인의 뜰을 만든 것입니다. 이방인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명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그곳을 빼았았습니다. 제사장과 장사치가 공모를 해서, 서로 이권을 가지고, 이방인의 뜰을 제물을 사고 파는 장터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조치에 대하여 종교 지도자 가운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런 반대가 없었기 때문에, 비록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 말게 된 것입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야훼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해야 하는 장소를 장터로 바꿔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이방인을 위한 자리까지도 탐욕 때문에 없애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점에 대해서 분노하시고, 채찍을 들어서 장사치를 성전 구역에서 내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항상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서, ‘지금 내가 올바르게 살고 있는가? 주님의 마음에드는 삶과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가?’하는 점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을 하고, 자기를 살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분은 언제나 입으로는 ‘주의 이름으로 살고, 주의 이름으로 일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주님의 뜻에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되고, 그런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복음에 따른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여러분은 전혀 새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본질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따라서 생각하고, 스스로에 대해서 정직하고 겸손하게 질문을 할 때 근심을 하게 되고, 복음을 따라서 거룩한 근심을 함으로써, 바울처럼 진리를 깨닫게 되고, 온전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더 가까이 가게 됩니다.

마틴 루터가 수도사가 되고 나서 어느 날 그에게 찾아온 도전은 ‘이것이 옳은가?’였습니다. 비록 선행을 한다고 하지만, 몸과 마음으로 죄를 짓는 자신이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고해성사를 밥을 먹듯이 했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씩, 많을 때는 스무 번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해성사를 해도 죄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루터는 27세가 되던 해 1511년 로마를 방문합니다. 로마에는 라테라노 대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에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오르셨던 28개의 계단으로 된 ‘성계단’이 있습니다.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가 성지에서 뜯어와 라테라노 성당에 설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내리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여, 수많은 사람이 오르내려서 계단이 다 닳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루터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그 계단을 오르내렸지만 마음의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루터가 고행을 하고 있을 때,루터의 마음속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는데, “의인은 믿음으로 말마암아 살리라.”는 바울의 말씀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바로 여기에서부터입니다. 모든 개혁의 시작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복음에 비추어 볼 때에, ‘내가 옳은가? 이 일이 진정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인가?’라는 끊임없는 물음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여러분도 모든 것에 대하여 먼저 이것이 복음을 따른 것인가?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인가?를 진지하게 물으면서 믿음생활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먼저 말씀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말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마치 땅 속 깊이 스며들듯이,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안으로, 말씀 속으로 스며들어 갈 때, 거기서 정화가 이루어지고, 참된 지혜를 얻으며, 요동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게 되고, 삶이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바른 기도를 하게 되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볼 때, 그런 사람이 성령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믿음생활의 진정한 답을 얻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상을 엎으시고 채찍을 드신 것은, 예수님의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닙니다. 

막 11: 17절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청결하게하시면서 말씀하기를, ‘내집은 만민의 기도하는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실은 이사야 56:7절의 말씀을 근거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17절에서 제자들은 "주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하고 기록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는 성전의 참된 의미를 주님은 알고 계셨다. 라는점입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대제사장과 유대인이 예수님께서 하는 일을 보고는 묻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라고 하자, 

예수님은 19절에서 대답하기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헤롯이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어떻게 사흘 동안에 일으킬 수 있겠느냐?’라고 웃기는 소리를 한다고 조롱합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과 유대인은 성전을 헤롯이 세운 건물로만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무엇이 참 된 성전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장차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세워질 참된 믿음공동체인 교회를 예수님은 성전으로 보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개혁은 철저히 말씀중심, 하나님 중심입니다. 

마틴 루터의 개혁의 시작도 성경말씀에서입니다. 카톨릭교회가 말하는 전통과 계율이 루터를 깨운 것이 아니라 로마서의 말씀이루터를 깨웠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그리고 루터는 깨달은대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라는 기치를 내걸고,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본질로 돌아가야만 할 것인가?를 바로 성경이 말해줍니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것인지는 학자의 논리가 아니라 성경이 말해줍니다. 성경이 여러분의 나침반이 될 것이고, 성경이 여러분의 잣대가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장차 어떻게 가야하는 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교회가 지금 바로 가고 있는 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성경 말씀을 토대로 오늘을 보고, 앞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사람에게, 좋은 교회로 서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제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해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오직 성경말씀대로 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의문이 생기면 모든 것을 뒤로하고 겸손히 성경으로 돌아가는데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3) 그리스도인은 성경대로 용기 있게 가야만 합니다.

겸손하게 말씀 속으로 들어가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마음과 뜻으로 정화ㅘ고, 성령의 도우심 아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지면, 그 때에는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만 머물지를 않고, 마치 샘솟는 샘물처럼 세상으로 분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심령이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마치 빗물이 지하로 들어갔다가 지상으로 샘솟는 샘물처럼 생수의 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힘을 얻었다면 이제부터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용기 있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말씀 안에서 깨닫고, 그 해답을 찾았다면, 이제부터는 행동하는 용기가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개혁은 자신의 개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세상의 부조리와 죄악을 개혁하고자 하는, 개인의 개혁의지나 혁명의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타락과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혁명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건설해보겠다는 꿈에서 시작된 것도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나 자신의 개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의 생명, 나의 영혼, 나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등, 이런 문제를 인하여 근심하면서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루터 안에서 성경 말쓰대로의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그 힘이 교회라는 영역 속에서 들어와서 샘물처럼 솟아난 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먼저 복음적으로 자신이 변화하는 것과 성령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문제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잘못에 대해서, 주님 앞에 겸손하고, 진실하게 고백하고, 과거의 더러운 것을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는 용기가 여러분에게 충만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본문을 보세요, 예수님은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 때문에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의 미움을 더 사야만 했고, 점점 더 십자가를 향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유대교 교권을 가진 자에게 강력한 저항과 반발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길이 외로운 길임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희생 없이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십니까? 희생 없이 새로워지기를 원합니까? 희생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바리새인 청년을 보세요. 부자 바리새인 청년은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고 하늘의 보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 청년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영생의 길을 알면서도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더 나은 것을 위해서, 때로는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희생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새로운 생명의 역사,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교황의 권위에 도전한 문제로 고발이 되어 1521년 보름스 의회에 서게 됩니다. 이 회의는 루터를 단죄할 목적으로 열린 회의였습니다. 그때 루터의 동료들이 ‘지금 가면 모든 것을 다 잃고,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루터는 동료들에게 “제국 의회장의 지붕의 기왓장만큼이나 많은 마귀가 있다 해도, 나는 갈 것이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루터는 제국 의회의 재판정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은 채 담대하게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런 루터의 믿음과 용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새로워지기 시작했고, 세계의 역사가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용기가 여러분을 새롭게 할 뿐 아니라, 이 세상이 새로워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루터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용기로 마귀를 향하여 담대하게 서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항상 개혁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이점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항상 가장 좋은 상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겸손히 묻고 또 물어야만 합니다. 어느 것이 주님의 바라는 것이고, 주님의 말씀대로 되는 것인지를 물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지식이나 경험, 그리고 세상적인 상식을 따라가려고 하지 말고,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과 뜻만을 따라가고자,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예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자 정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답답해보여도 거기서 진정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답을 가질 때에야 비로서 개혁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마치 수십년을 땅속으로만 흐르다가 때가 되어 지상으로 뿜어져 나오는 샘물처럼, 주님께서 주신 답을 갖ㄴ 사람은,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생명력을 가진 값진 인생으로, 이웃에게 새 삶을 선물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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